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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금꽃
작가 : 권가야
작품등록일 : 20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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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금꽃 02
작성일 : 17-07-11     조회 : 273     추천 : 0     분량 : 6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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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느는 스르륵 다리가 풀리며 거울 앞에서 거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줄리는 놀라 세느의 곁으로 달려와 세느를 부축하여 침대로 다시 옮겨주었다. 줄리는 걱정이 가능한 눈으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아가씨 지금 피곤하셔서 꿈 내용이랑 현실이랑 구분을 아직 잘 못하시는 것 같아요. 무례한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꾸중은 아가씨께서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였을 때 듣도록 할게요."

 

 줄리는 혼란스러움을 최대한 억눌러 단호하게 세느에게 말했다. 다른 시녀였으면 건방지다고 매를 맞았을만한 발언이었지만 나중에라도 줄리가 혼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외동으로 자란 세느에게 줄리는 피보다 진한 것으로 이어진 언니이자 세느가 챙겨야하는 동생이었으며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줄리는 세느에게 쉬라고 하며 이불위로 세느의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더니 살며시 문을 열고 나갔다. 세느는 줄리가 나간 문을 보다 생각에 잠기며 눈을 감았다. 세느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이라고. 하지만 다시금 떠오르는 그날의 감촉이 스물다섯 살의 세느가 겪은 일 역시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목 언저리에 통증이 오는 듯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 나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을 뛰어넘어 이 시간으로 되돌아왔고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건 나는 나인 상태로 있어야하니까. 식솔들에게 그리고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진 않아...'

 

 세느는 이 신의 장난 같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혼라스러움을 표시내고 싶지 않았다. 친자매 같은 줄리와 세느를 상냥하게 보살펴주는 다른 시녀들. 언제나 세느의 건강을 생각해주는 주방의 사람들과 세느의 안전을 위해 밤낮없이 수행하는 가문의 기사들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준 아버지께 스물다섯의 자신은 황제에게 배신당해 죽어 여기로 돌아왔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을 못할 테니까.

 

 '여신님 이것이 당신의 실수, 장난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좋습니다. 발을 맞춰 드리지요.'

 

 무언가 다짐한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세느는 통증이 멎지 않는 몸을 이끌고 다시 잠이 들었다.

 

 피바다 속에서부터 세느를 괴롭힌 전신의 통증과 극심한 두통은 그녀를 3일 동안 괴롭혔다. 모시는 주인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주제에 감히 가르치는 듯한 말을 했다며 세느의 전속 시녀 줄리는 끊임없이 자책했다.

 

 세느의 열은 3일간 39도를 넘나들며 가문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가문의 집사들과 시녀들은 물론 기사들까지도 세느의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던 3일 밤이 지나고 4일 날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햇살이 기분 좋게 세느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세느의 방 창문에 걸린 실크커튼이 살랑이며 부드럽게 파도치고 있었다. 회귀 이후 처음 맞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잘 잤다.'

 

 세느는 눈을 부스스 뜨고 일어나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몸의 통증이 가고 열도 내리니 정신이 맑아진 모양이었다.

 

 똑똑.

 

 "들어와, 일어났어."

 

 "아가씨!"

 

 세느가 대답해줄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줄리는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세느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좋은 아침이야 줄리."

 

 줄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세느의 작은 품으로 안겨들었다. 더 이상은 뜨겁지 않은 세느의 체온에 안심한 듯 싱긋 웃어보였다.

 

 "다행이에요, 아가씨. 3일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엇을 준비할까요?"

 

 물론 3일간 고열과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린 건 세느였지만 어쩐지 줄리가 세느보다 더 고생을 한 듯 초췌해보였다. 그럼에도 줄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세느의 곁에 머물렀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열다섯 살의 세느가 받던 가정교육을 스물다섯 살의 기억까지 있는 세느가 받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열다섯 살의 자신을 연기하려 노력했으나 20여 년 동안 받은 엄격한 교육은 세느의 몸가짐과 생각에 영향을 미쳐 여러 학자들과 가정교사에게 놀라움을 줄 뿐이었다. 모두가 열다섯의 생각과 말투, 행동이라 볼 수 없다며 그녀가 검술에만 천재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며 극찬했다.

 

 줄리는 세느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마치 자기 일인 마냥 좋아해주었다.

 

 "가주님께서도 어서 돌아오셔서 아가씨의 칭찬을 같이 들으셔야 할 텐데요."

 

 오전수업이 끝나고 둘은 소소한 티타임을 가졌다. 간식은 세느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에 블루베리를 잔뜩 올린 디저트였고 차는 로즈마리였다.

 

 "아버님? 지금 황궁에 계시다고 했었지?"

 

 세느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열다섯에게서는 나오기 힘든 기품과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물론 황실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줄리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네에, 군사협정에 대한 안건으로 며칠 황궁에 머문다고 하셨지요."

 

 세느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열다섯으로 돌아와 버렸으니 지금의 제국은 수치스런 칭호가 따르는 군사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것을.

 

 '제국의 영광을 위해 그 발키리의 소드 마스터도 되어 보였는데'

 

 세느는 잠시 옛 추억. 아니 미래의 추억에 빠졌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가 발키리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은 건 앞으로 1년 뒤인 내 성년식의 날. 그리고 4년 뒤 소드 마스터가 되어 가주로 인정받았었지.'

 

 세느는 찻잔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새하얗고 뽀얀 피부지만 제법 단단하고 근육이 붙은 손이었다.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손만 들여다보아서는 지금 자신의 실력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세느의 내면에는 소드 마스터의 실력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녀의 다 자라지 않은 작은 몸이 그 실력을 전부 보여줄지는 알 수 없었다.

 

 '검술은 체력단련과 체술이 기본이야.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지?'

 

 세느는 나름 열다섯의 자신을 연기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정치나 다른 예법에 있어서는 다소 눈에 튀어버린 실수를 했지만 검술만큼은 실수해선 안됐다. 안 그래도 천재라고 불리는 와중에 더한 실력자가 되어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진짜 열다섯은 이렇지 않았으니까.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간 미래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다.

 

 세느는 자신이 모르는 미래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고 자신이 원할 때에만 다른 미래를 선택하고 싶었다. 스물다섯 살에서 열다섯 살이 된 그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피바다의 세계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라 다짐했으니까.

 

 ‘뺨은 후려치지 못하겠네, 지금 이 시대의 바엘은 아직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까.’

 

 세느는 바엘을 떠올리다 다시 목 언저리에 느껴지는 통증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원망하는 사람,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 하지만 아직은 그 사람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였다.

 

 오후 수업은 검술 수업이었다. 세느는 다소 긴장을 한 체 검술 수련장에 들어섰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세느는 짙은 붉은색의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제법 날카롭게 손질된 목도를 들고 수련장에 들어서 인사를 했다. 그녀의 인사를 받고 있는 남자는 눈부신 은발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아프셨다 들었습니다. 한번을 찾아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으신지요?"

 

 "예, 밤하늘의 별에게 유혹 당에 그만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세느의 농담 섞인 말에 은발의 남자는 낮은 목소리를 내며 웃었다.

 

 '히스 바르톨디아. 아버지의 친우이자 나의 검술 스승. 발키리의 전 기사단장.'

 

 그녀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계산해갔다.

 

 '예전에는 그가 나의 스승인 것이 마냥 좋았는데, 단장님 씩이나 되는 실력자이라면 내가 같잖게 실력을 숨기는 것이 더 이상할거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세느는 가능한 그와의 수련을 피하고 싶었다. 그라면 세느가 실력을 숨기려고 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것만 같았다.

 

 "그럼 준비가 다 되시면 바로 수련을..."

 

 세느는 수련을 시작하려던 히스의 말을 다소 다급하게 막아섰다.

 

 "단장님."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제가 3일간 고열을 앓아 아직 몸이 조금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세느는 자신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며 히스에게 말을 이어갔다.

 

 "하여 체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나, 실력이 둔해지지는 않았나, 다른 사람과의 대결을 통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피해야지.'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수습 기사를 보며 말했다. 세느와 눈이 마주친 수습기사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세느에게 인사를 건넸다. 세느는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그런 것이라면 평소 아가씨의 실력을 아는 제가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히스가 의아해하며 세느에게 물었다.

 

 "단장님은 항상 저를 봐주시잖아요? 봐주시는 걸로는 제가 제 실력을 가늠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나마 저와 실력이 비슷해 보이는 저 아이와 대련을 해보고 싶습니다."

 

 세느는 빠른 걸음으로 갈색머리의 수습기사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의 뺨은 여름날의 라즈베리처럼 붉어졌다. 소년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금빛과 분홍빛이 섞인 묘한 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굽이굽이 물결치고 있었고 로즈티아 가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금안은 태양보다는 달과 같은 느낌으로 그녀의 두 눈에 박혀있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은 검술천재라고 불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하얗고 부드러웠으며 대련을 해보지 않겠냐며 오물오물 움직여 묻는 입술은 당장이라도 과즙이 흐를 것 같은 체리 같았다.

 

 소년은 뺨은 더더욱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등을 돌려 히스를 바라봤다. 히스 겨으이 허락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뭐, 좋습니다. 하루쯤은 다른 이와의 대련도 아가씨의 성장에 도움이 되겠지요."

 

 히스는 생각보다 흔쾌히 세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느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었다.

 

 '이걸로 알 수 있어. 나의 실력을 어디까지 감춰야하며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아침 수련을 하던 다른 기사들의 시선은 세느와 갈색머리의 소년 수습기사에게로 쏠렸다. 세느와 소년은 각각 날이 선 목도를 받았고 머리를 치거나 가슴팍을 찌르는 것으로 승부를 가릴 것이라는 룰을 들었다.

 

 세느는 다소 여유롭게 세발자국 뒤로 물러나 인사를 올렸고 소년은 그런 세느의 모습을 보고 자신 역시 인사를 올렸다. 두 소년소녀의 기사의 인사를 받은 히스는 그 둘의 가운데에 서 선언했다.

 

 "사세니아 룬 로즈티아와 렌 그로키. 둘은 여신의 이름 앞에 긍지 높은 기사로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서로를 존중하되 봐주어서는 안 된다.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정정당당하게 대련에 임할 것을 로즈티아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명한다."

 

 동굴 같은 히스의 목소리가 수련장 안을 가득 채운다. 세느와 렌은 짧게 대답을 마치고 서로에게 목검을 들이댔다.

 

 "시합 개시!"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히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세느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렌은 당황한 기색 없이 세느에게 곧장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은 박력 있고 진지해보여서 좀 전까지의 소심해보이고 그녀를 보고 수줍어하며 뺨을 붉히던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국의 송곳니라 불리는 로즈티아 가문의 기사라는 것은 황실 기사단 ‘발키리’ 다음으로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이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로즈티아 기사단의 수습기사로 임명받은 렌은 비록 천재라 불리는 것도 아니었고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히스가 인정한 노력바보였으니까.

 

 둔탁하게 목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수련장 안에 퍼져갔다. 렌은 맹렬하게 세느의 가슴팍과 머리는 노려가며 놀라운 속도를 자랑했다. 그에 반해 세느는 뭔가를 계산하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렌의 맹공을 떨쳐낼 뿐이었다.

 

 히스는 세느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세느는 검에 대한 열망이 크고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아이였다. 세간에서 천재라 불리며 칭송받던 아이니까. 그런 그녀는 히스와의 시합을 지루해 했었고 평소에도 또래의 아이들과 대련해보고 싶다며 그를 졸랐었다. 히스는 그동안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최근 그녀가 아팠었기도 했고 가문의 기사들을 관리해야만 하는 자신은 3일 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히 세느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는 이 상황을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렌과 달리 세느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저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자신과 가장 비슷한 신체조건과 수련 기간을 가진 또래의 경쟁자를 보면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고 경쟁자와의 사이에서 순위를 가리기 위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세느는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 그녀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 침착한 모습은 히스에게 낯선 감각만을 줄 뿐이었다.

 

 렌은 기합이 바짝 들어가 방심을 하지 않았다. 세느의 무심한 표정에서 자기보다 강한 자의 여유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렌은 초반부에 흥분한 탓에 슬슬 다리에 한계가 왔다. 맹공격을 펼치는 동안조차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은 렌의 자세가 아주 잠깐 흐트러졌고 세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느는 사교계 파티에서나 쓰일법한 부드럽고 빠른 스텝으로 렌에게 다가갔고 마치 꽃이 바람이 흐르는 듯 부드럽고 싸늘하게 그녀의 목도가 렌의 가슴팍에 닿았다. 세느의 승리였다.

 

 “제가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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