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 엘리어스!”
세느는 로비를 빠르게 지나쳐 정문 쪽으로 향했다. 굽이 달린 구두가 매섭게 바닥에 부딪혔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세느의 발에 실려 아파왔지만 그녀에겐 그런 작은 아픔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문에는 알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바닥에 엎어져 목에 칼이 닿아 있는 렌의 뺨에는 생채기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또 그 옆의 엘리어스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렌에게 칼을 겨눈 남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한 남자만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저의 기사들에게 이 무슨 무례인가요, 바그너 영애!”
세느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닿은 곳에는 푸른 군청색 머리칼의 소년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그쪽의 기사가 먼저 달려들었다는 생각은 아예 안하는 거냐? 말을 끌고 들어오는데 이 놈들이 먼저 달려들었다고, 짜증나게.”
남자가 아주 불쾌하다는 듯 무례한 말투로 세느에게 말했다. 세느는 처음 받아보는 무례한 태도가 기가 찼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렌과 엘리어스의 안위였다.
“어떻게 된 거야, 엘리어스.”
세느는 뜨겁게 이글거리는 눈빛을 풀고 엘리어스에게 물었다. 엘리어스는 겨누던 검을 거두고 세느의 앞에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렸다.
“안장하나 달지 않고 소속을 여쭈었을 때도 무시하고 들어오려 하셨습니다. 렌과 저는 기사의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주군.”
엘리어스는 신념을 담은 눈빛으로 세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은 틀린 것이 없었는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할 뿐 다른 반박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양쪽의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바그너 영애.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릴 테니, 이만 저의 기사들을 풀어 주시지요.”
세느는 화를 억누르며 남자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사실, 저택을 침입자로부터 지키는 것은 가문의 기사들이 해야 할 아주 당연한 일이다. 엘리어스와 렌은 그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바닥을 굴러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렌과 엘리어스가 무척 안타까웠지만, 어쨌든 바그너가의 남자는 둘과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을 가진 백작가의 영애였기에 세느는 자신의 기사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못 들었어? 저놈들이 나는 짜증난다니까? 아참, 그런 의미로 죽여도 되지? 공작가의 영애나으리.”
남자는 소맷자락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그것을 빙글빙글 돌리며 세느에게 물었다. 남자의 말투에선 그가 귀족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상스러움이 느껴졌다. 세느는 남자의 태도를 어디부터 따져야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공작가의 차기 가주님께 예의를 갖춰 주시지요, 바그너가의 후계자님!”
“줄리, 나서지마!”
남자의 예의 없는 말투에 세느를 대신해 세느 뒤의 줄리가 나섰다. 줄리는 세느에게 짓던 상냥한 미소와 상반되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노려봤다.
“잘난 공작가는 그 시녀도 잘나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냐? 감히 백작가의 차기 가주에게 명령을 해?”
남자는 잔뜩 쏘아붙이는 눈빛으로 줄리에게 아주 위협적인 자세로 다가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세느에게 저지당했다. 세느는 강한 힘으로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저의 시녀의 실수는 제가 사과드리지요, 하지만 제가 예를 갖춰드릴 때 영애께서도 제게 예를 다해주시지요. 그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백작가의 이미지가 좌우 된다는 것 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자는 세느가 잡은 팔이 불쾌해 팔을 빼내려 힘을 주었지만 세느가 더 강한 힘으로 잡고 있어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못 배워먹은 놈이라, 내 신경에 거슬리는 놈들에게 자비 따위 못 베풀거든.”
남자는 세느에게 붙잡힌 채로 기어코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줄리의 뺨을 내치려는 듯 자세를 취했다. 세느는 남자의 손에 들린 단도를 빼앗아 빠르게 고쳐 쥐었다. 남자에게 위협을 주려는 듯한 자세를 취할 때, 붉은 그림자 같은 것이 세느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붉은 그림자의 정체는 엘리어스였다. 그가 빠르게 줄리를 밀어내고 바그너 가의 남자 앞에 서자, 감히 뺨을 칠 때에 나는 소리라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거친 마찰음이 들렸다. 엘리어스의 뺨이 붉게 부어올랐다. 줄리는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고 세느의 눈빛은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감히 내 앞에서 나의 사람들에게 무슨 짓이지?”
짧고 굵게 이를 갉아대며 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집어던지고 빠르게 팔을 휘둘렀다. 남자의 얼굴을 쳐버릴 생각으로 세느는 팔을 휘둘렀지만 묵직한 목소리에 저지당했다.
“이 무슨 소란이냐!”
목소리가 들린 곳은 잔뜩 경계의 가시를 든 바그너가의 기사들 뒤, 즉 정문 너머였다. 정문 너머에는 세 남자가 말을 타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앞쪽에서 말을 타던 남자는 바그너가의 현 가주, 젠 바그너였다. 그 뒤로는 앳된 소년과 발키리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미하일이 있었다.
“칼로스! 먼저 가 준비를 하고 있겠다하여 믿고 먼저 보냈더니 이 무슨 무례한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기사들을 물러라!”
“...”
“형님....”
젠은 칼로스를 엄하게 꾸짖으며 언성을 높였다. 칼로스는 불만이라는 표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은 채 렌을 붙잡고 있던 기사들을 물렸다. 칼로스 뒤의 소년은 칼로스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세느는 렌에게로 달려가 렌을 일으켰다. 렌은 일어서자마자 바로 미하일과 세느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였다.
“렌, 일어나, 먼저 상처 치료부터...”
세느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바그너가의 기사에게 붙잡혀 있던 그의 팔목과 목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가주님. 제가 미숙하고 어설퍼 가문에 누를 끼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무슨! 렌, 나는...!”
자신을 탓하며 고개를 숙여 말하는 렌을 세느는 손사래를 치며 일으키려 하였으나 마하일의 목소리가 세느를 잡아챘다.
"사세니아 룬 로즈티아!"
“아버님...”
근엄하고 진지한 미하일의 목소리에 세느는 경직되었다. 미하일은 무릎을 꿇고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세느, 정말 실망스럽구나, 공작가의 영애가 그렇게 쉽게 흥분하고 손을 올려도 되는 자리더냐?”
그녀는 좀 전까지 잔뜩 흥분하여 언성을 높이며 손을 올린 자신을 떠올렸다. 그것은 공작가의 영애가 보여서는 안 될 추태였고 세느의 실수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을 끔찍이 아끼는 세느에겐 그것마저도 많은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아버님, 저는...”
“가주님, 부디 아가씨께 책임을 묻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경거망동하게 행동하여 생긴 일입니다. 엘리어스 부단장과 아가씨는 아무잘못도 없습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렌은 이마를 땅에 닿도록 숙이며 미하일에게 청했다.
“가주님께서 초대하신 손님인줄도 모르고 제가 오인하여 일을 벌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안장조차 잘지 않고 통설명도 해주지 않았어요. 렌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버님.”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을 벌해달라고만 말하는 렌이 신분에 밀려나 진 것처럼 보여 세느의 마음이 무거웠다. 세느는 열심히 렌의 변호를 해주었지만 미하일은 단호하게 렌에게 일주일간의 근신을 명하였다.
“미하일 저하,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장남이라는 놈이 영 신통치가 않아서...”
미하일과 세느의 대화에 나긋하게 젠이 끼어들었다. 젠의 옆에는 젠보다 키가 한참 작은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세느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젠 경. 저희 기사들이 실수했습니다. 정문에서 어수선하게 이러지 말고 들어가지요.”
미하일은 금안을 반짝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젠은 멋쩍어하는 태도를 조금씩 안정시키고는 세느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로즈티아의 영애께도 폐가 많았습니다.”
젠은 자신보타 한참 어리고 작은 세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평소의 세느라면 다정하게 받아주었을 인사였지만 내키지 않아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세느의 태도에 젠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기는커녕 다시 한 번 사과를 올리고 옆의 작은 소년을 데리고 미하일의 뒤를 따랐다. 젠과 미하일이 멀어지자 렌은 조심스레 일어나 세느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저 때문에 괜히 다른 가문과 마찰을 만들지 말아주세요.”
“너는 편을 들어주어도 밀어내는구나. 융통성이 너무 없는 것도 나는 싫어.”
세느는 근신을 받을 렌이 안쓰럽고 또 자신의 변호를 끝까지 거절한 것이 미워 쌀쌀맞게 대했다. 그리고는 바로 등을 돌려 줄리와 엘리어스에게 갔다. 렌은 멀어지는 세느를 보며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나지막이 렌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가씨의 영광이 되고 싶은 제 마음을 언젠가는 이해해주십시오.”
.
.
“어쩜 사람이 그렇게 미련하고 바보 같아요? 당신 진짜 싫어, 엘리어스!”
줄리의 오렌지 같은 눈망울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진다. 엘리어스는 멍이 든 뺨을 부여잡으며 다른 한손으로는 줄리를 다독였다.
“울던지 화내던지 하나만 해, 얼굴이 아파서 둘 다는 못 받아줄 것 같다.”
엘리어스는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줄리의 뺨에 손을 뻗어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줄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바보같이 구는 남자가 짜증나 더 큰소리로 엘리어스를 탓했다.
“줄리! 엘리어스, 괜찮아?”
“주군!”
“아가씨!”
펑펑 울던 줄리도, 뺨을 부여잡던 엘리어스도 세느를 보자 벌떡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엘리어스, 집안의 의사를 부를게, 바로 뺨을 식히고 렌도 데려가서 같이 치료해줘. 줄리는 같이 따라가 주고.”
세느는 자신의 눈에 퉁퉁 붓고 이젠 푸른빛으로 멍이 든 엘리어스의 뺨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애써 이성을 붙잡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의 옆을 떠날 수는 없어요...”
줄리는 눈물을 닦고 흐트러진 호흡을 정리하며 말했다. 세느는 단호하게 된다며 엘리어스의 곁을 지켜달라고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저런 힘으로 줄리를 때리려 한 칼로스가 떠올라 칼로스에게서 줄리를 조금이라도 더 멀리에 두고 싶었다.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줄리와 렌을 데리고 정문을 떠났다. 렌은 세느가 안 보일 때까지 세느를 응시했지만 세느는 끝까지 렌은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뭐?”
맹렬하게 칼로스를 노려보는 세느가 거슬렸는지 여전히 무례한 태도를 유지하며 칼로스가 말했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그냥 쳐. 아까 못 때렸잖아?”
칼로스가 위협적으로 상체를 숙여 세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세느는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주인님아, 왜 살벌하게 웃고 그래... 불안하게.]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세느의 어깨에 올라타 앉은 넬이 세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그럴까요?”
[헉, 주인님아 살인은 안 돼!]
넬은 세느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세느가 품은 짧은 살기를 느꼈다. 넬은 진심으로 세느 앞의 건방진 남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뭐?”
칼로스는 당황한 듯 재차 물었다. 세느는 아침에 줄리가 껴준 레이스 장갑을 벗어 칼로스의 발치로 던졌다.
“결투 신청입니다. 당연히 피하지는 않겠지요?”
세느는 도발하듯 말했다. 칼로스는 입가를 씰룩이며 아주 밟아 죽여주겠다는 눈빛으로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다.
“난 오래 안 머물러 있어, 그러니까 결투는 지금 당장 시행한다.”
“좋아요, 수련장으로 모시죠.”
태연하게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세느, 넬은 그녀의 어깨에 앉아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세느는 행여라도 방해 말라며 쐐기를 박아두었다.
세느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수련장으로 들어왔다. 온통 흙빛과 잿빛의 수련장과는 정말 안 어울리는 진주 장식이 박힌 붉은 드레스였다. 세느는 반으로 묶어 리본을 단 머리를 풀고 높게 치켜 올려 묶었다. 칼로스는 옷을 갈아입을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세느가 거절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저 애송이를 꺾고 아버님께 인사를 올리러 가야했기에 시간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히스는 세느에게 상황설명을 부탁했지만 그녀는 ‘나중에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어쩐지 참견 말고 시작이나 알리라는 말 같아서 히스는 찜찜했지만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사실 칼로스는 세느의 결투 신청을 받았을 때 묘하게 흥분했다. 세느는 무가 집안이었던 바그너 가문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의 검술 천재였고 최근 검술 이외의 학문에서 활약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 소문에 호전적인 성격에 다혈질인 그는 거물급의 세느와 한번쯤 붙어보고 싶었다. 그녀와의 결투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처음 본 세느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의 눈에 비친 세느는 검술이라고는 배워본 적도 없는, 레이스가 달린 장갑과 흰색 구슬이 박힌 요란한 드레스를 입은 자존심만 센 귀족 여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전부 칼로스의 자만심이었고, 오만이었고, 오해였다. 결투의 시작을 알린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칼로스는 넝마가 되어 항복을 외쳤다. 칼로스의 자존심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땅에 처참하게 처박혔다.
반면 세느는 높은 구두를 신고도 드레스에 달린 진주알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칼로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힘 조절은 했지만 렌과의 대결만큼 세세하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에 칼로스는 잔기술만 믿고 자만에 빠진 무례하고 건방진 남자였으니까. 그런 배려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세느는 칼로스를 크게 봐주지 않았고 결투 내내 아주 여유롭게 칼로스를 상대했다. 그리고 그 여유는 결투 상대인 칼로스는 물론 결투를 지켜보던 히스에게도 보였다. 히스는 뭔가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세느가 넘어진 칼로스의 콧잔등에 칼을 들이밀자 칼로스는 분한 표정으로 칼을 쳐내고 일어섰다.
칼로스는 온몸으로 느끼며 깨달았다. 자신이 자신만만하게 생각한 상대는, 구두에 드레스, 장갑까지 낀 채로 자신을 여유롭게 이긴 세느는, 제국이 칭송하는 검술천재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