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아가씨.”
세느의 말을 곱씹으며 감동을 느끼고 있는 엘리어스를 대신에 줄리가 입을 열었다. 세느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세느는 엘리어스에게 렌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그녀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유치한 구석도 있어서 아직 자신의 변호를 끝까지 거절한 그가 미웠으니까.
그녀는 애써 전혀 궁금하지 않다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으며 줄리와 함께 로비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의 끝에는 항상 이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려주는 남자가 있었다.
“세느, 일어났느냐? 아무리 미인은 잠이 많다지만 식사도 거르고 잠을 자는 것은 좋지 않단다.”
그는 세느가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다 내려오자 여느 때처럼 힘차게 그녀를 끌어안아 한쪽 팔에 앉히며 세게 안아주었다. 세느도 자연스럽게 미하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시선이 미하일 만큼이나 높아지자 미하일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테의 안경을 쓴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다미엘 서기관님!”
그는 제국의 최연소 서기관이자 그로키 가문의 명예라 물리는 렌의 아버지 다미엘 그로키였다.
“아가씨, 못 본새에 숙녀가 다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가득 머금고 세느에게 인사를 올렸다. 세느도 밝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다미엘 서기관님께서도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인사 한번 못 드려 죄송합니다.”
그는 황공하다며 세느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세느는 그가 입은 밤색의 깔끔한 정장을 보고 자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될 것이란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는 자동적으로 시선을 굴려 렌을 찾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의 모습에 다미엘은 또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세느에게 말했다.
“렌은 상처 때문에 준비가 조금 늦어지는 듯합니다. 곧 오겠지요.”
“예? 아, 별로 렌을 찾은 건 아니었습니다만...알겠습니다. 일단 식당으로 모시죠.”
그에게 생각을 꿰뚫려진 것이 부끄러웠는지 세느는 살짝 부정을 해주고 두 남자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미하일은 상석에 앉았고 그 오른편에는 세느가, 세느의 맞은편에는 다미엘이 앉았고 다미엘 옆자리는 렌이었는지 식기구가 놓여 있었다.
[하하, 나처럼 네 생각을 읽는 것도 아닌데! 보기 좋게 읽혀버렸구나, 주인님아.]
‘시끄러워, 그런 거 아냐.’
식당의 시녀들이 손을 씻는 물이 담긴 그릇을 놓아줄 때 즈음, 렌이 식당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렌은 세느와 같은 짙은 남색의 정장을 입고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인지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머리 손질까지 완벽하게 되어있는 렌에게서 기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완벽하게 문가 영애의 차림으로 다미엘 옆자리에 앉았다. 렌이 자리를 잡고 착석하자 바로 준비된 음식들이 차례차례 나오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렌은 세느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다미엘과 미하일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세느와 렌은 조용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며 식사를 계속할 뿐이었다. 둘 사이의 정적을 깬 건 다미엘이었다.
“아들놈이 오늘 큰 실례를 저질렀다 들었습니다, 아가씨.”
다미엘의 말에 렌의 시선이 세느에게 꽂혔다. 세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전에는 느끼지 못한 긴장감이라는 것을 느끼는 듯 했다.
“아, 그것이...”
‘아버지가 다미엘님께 서신을 넣은 것일까? 아냐, 서신이 이렇게 빨리 전달될 리가 없어. 그로키 가문의 저택은 바그너 가문의 저택과 가까우니 그쪽을 의심하는 게 빠르겠지. 끝까지 쓸데없는 일만 만들고 갔군.’
세느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그녀에겐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다. 오늘 일은 결코 렌의 기사로서의 길에 좋은 영향이 못되어 주기에 근신에서 끝나기를 빌었지만 다미엘의 귀에 들어간 이상 그것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꼬마시절부터 펜과 책만 끼고 공부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로즈티아 가문의 기사다 된다고 하였을 때 말렸어야 하는 건데. 제 실수입니다.”
세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렌은 누구보다 기사다웠고 렌이 기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다미엘이 안다면 깜짝 놀랄 것이라며 렌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느라고 해도 낮처럼 렌에게 변호를 거부당한다면 상처받을 것 같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렌을 바라보았다. 렌의 눈에서 몰아치는 어떤 감정을 세느는 알 수가 없었다. 세느는 침묵했다.
“소란을 피운 주제에 책임감 없이 도망치는 꼴이 되어버렸지만, 오늘 제 아들놈을 저희 저택으로 데려갈까 합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아가씨.”
다미엘이 렌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세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저택으로 데려가 다시 서기관 수업을 시킬까 합니다. 그로키 가문의 영광은 곧 로즈티아의 것이니 이번 일의 사죄가 될 것입니다.”
“네?”
세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듯 계속해서 다미엘의 말에 물음표를 찍었다. 다미엘은 끝까지 정중하게 말했다.
“제 아들에게 기사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미엘의 말에 세느의 화는 엉뚱한 곳에 흘러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넬이었다.
‘그는 로즈티아 기사단의 부단장이 될 남자라고. 왜 미래가 바뀐 거야? 대답해.’
세느는 절대 입을 열지 않고 생각으로만 외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식사예절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렌이 떠난다는 생각에 세느는 사소한 것 하나 둘쯤은 잊기로 했다.
[미래를 바꾼 건 너야, 사세니아.]
‘무슨 뜻이야.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넬.’
[네가 렌의 미래를 바꿨다고. 회귀 이전과 달리 렌에게 너라는 존재가 크게 개입해 버렸으니까. 주인님아, 미래라는 건 아주 섬세하고 정교한 거야. 네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누군가는 크게 영향을 받아. 네 행동이 회귀 전과 같지 않은데, 미래가 바뀌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
‘...’
[칼로스 일도 그래, 너의 기억 속에 오늘 같은 일이 있었어? 아니지? 네가 회귀의 기적을 겪으면서 네 주변도 달라지는 거야.]
넬의 말에 세느는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 했다. 그의 노력을 자신이 망친 것만 같았다. 자신이 렌에게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호감같이 우스운 것을 갖지 않았더라면 렌은 바위 같은 손만큼의 노력을 보상 받았을 텐데, 로즈티아 기사단의 부단장이 되어 자신의 노력은 역시 재능이었노라 확신했을 텐데.
‘내가 망쳤어.’
세느는 방금까지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 마냥 엘리어스에게 떠들어 댄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명예라, 정작 나는 렌의 명예를 빼앗아 버렸는데.’
[주인님아, 이건 네가 회귀를 한 이상 어쩔 수 없는 거야, 앞으로도 네 주변 인물들의 인생은 네가 아는 미래와는 다르게 흐를 거야. 그럴 때마다 이렇게 좌절할거야? 것보다 눈앞의 현실에 집중해. 아까부터 미하일이 너를 부른다고, 일단 대답부터 하자.]
‘....’
“세느, 왜 그러느냐, 혹시 어디가 아픈 것이냐?”
넬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자 미하일의 목소리가 세느의 귀에 닿았다. 그녀는 생기를 잃은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가씨?”
걱정 어린 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하는 검술을 빼앗기고 가문으로 돌아가는 이런 상황에서 조차 그는 그녀의 걱정뿐이었다. 세느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마지막이 될 그와의 식사시간을 엉망으로 끝냈다.
다미엘과 미하일은 따로 더 나눌 이야기가 있다 하면서 2층의 업무실로 올라가 버렸고 렌과 세느는 무의미하게 저택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무거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노을이 다 지고 정원에는 밤이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의 밤공기는 다소 차가웠다. 세느는 양쪽 팔을 감싸 안았다. 그때 그녀의 어깨 위로 렌의 겉옷이 덮어졌다.
“됐어, 렌도 추울 거 아냐.”
“훈련 때는 이보다 더 얇게 입고 있는 걸요, 괜찮습니다.”
여전히 상냥한 렌의 말씨에 세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렌, 나는 너의 미래를 빼앗은 여자야, 상냥하게 대해줄 가치가 없단 말이야.’
“많이 추우시면 들어갈까요?”
세느의 붉어진 눈가가 추위 때문이라 생각한 렌은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니, 더 있을래.”
세느의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세느는 렌이 덮어준 겉옷자락을 꽉 쥐었다. 가을에 피는 꽃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둘은 그 사이를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꽃향기를 잔뜩 머금은 밤바람은 시원하고 향기로웠다. 하지만 렌은 혹시라도 꽃가루가 세느의 눈에 들어갈세라 큰 손으로 세느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세느는 걸음을 멈추었다. 렌도 세느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세느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가씨?”
“미안해...”
세느의 목소리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렌은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예? 대체 무엇이...”
‘나는 너의 미래를 망쳐놨어, 내가 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어. 내가...’
세느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참았다. 저 말을 한다 해도 렌은 그녀가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괜찮다며 넘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의미의 ‘괜찮다’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렇기에 세느는 그 무엇도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정원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렌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나긋하게 바라봤다. 렌은 그의 눈동자에 세느가 담길 때마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렌의 뺨을 붉게 물들였고 그의 시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렌은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이윽고 시선은 다시 세느에게로 꽂혔다.
처음에는 예뻐서 눈에 들어왔다. 렌은 17년을 살면서 세느만큼 예쁜 아이를 본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두 칙칙한 수련장에는 어울리지 않은 화사한 꽃과 같았다. 다음은 존경이었다. 매일같이 엄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히스와의 수련을 불평불만 하나 없이 해내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은 호기심이었다. 그녀의 재능이 궁금했고 과연 어디까지 성장해 나갈지 궁금했다. 눈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 그 다음은 현실감이었다. 그녀와 검을 맞대었을 때 렌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할 경지를 그녀는 손에 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 검술천재구나 싶었다. 이제 호기심도 풀리고 그녀에 대한 존경심도 그 끝에 달했으니 이젠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가 자각하기도 전에 그의 눈은 이미 세느를 쫒고 있었다. 이 감정을 일컫는 말을 렌은 알고 있었다.
렌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세느.”
“어?”
렌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렌을 바라보았다. 어두웠지만 달빛이 밝아 렌의 새빨개진 얼굴이 세느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세느는 그제야 그가 자신을 부른 호칭이 ‘아기씨’나 ‘사세니아’가 아닌, ‘세느’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렌...”
“음, 나는 이제 너의 기사가 아니니까. 또, 우리 매일 함께 수련하면서 친해지기도 했고, 또... 나는...네가 말한 대로 긍지 높은 로즈티아 가문으로부터 나온 그로키 가문의 후계자니까.”
렌은 애칭으로 부른 것에 대한 변명을 잔뜩 늘어놓다가 자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잔뜩 헝클이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렌은 귀까지 새빨개져있었다. 잘 익은 사과 같았다. 세느는 그런 렌을 멀뚱히 바라보다 그와 똑같이 주저앉아 그와 시선을 맞췄다.
“왜?”
세느의 미소가 렌의 눈 속에 박혀왔다. 렌은 머리가 아찔해져오는 감각을 느꼈다. 그의 심장은 빠르고 뜨겁게 뛰고 있었다.
‘나는 이 감정을 뭐라고 하는 지 알아.’
렌은 똑똑하고 박식한 남자였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라 불리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너무나 소중하고 소중해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아끼고 아꼈다.
“왜 불렀어, 렌?”
“세느.”
렌은 달콤하게 세느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귀 뒤로 손을 넘겨 그녀의 가는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쭈그려 앉은 세느의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자 세느는 아주 쉽게 렌의 품에 안겼다. 렌의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 깊고 달큰한 향이 났다.
“레, 렌?”
이런 식의 포옹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세느가 얼굴을 붉혔다. 세느는 자신을 품에 안은 렌의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괜히 자신까지 부끄러워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렌은 보드라운 세느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세느 나는 너의 영광이 될 거야. 비록 그게 검을 든 기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지키고 수호하는 기사가 될 거야.”
세느의 원래 성격이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아무리 친분을 쌓았다고는 해도, 일개 파생가문의 후계가자 공작가의 영애인 자신을 마음대로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는 건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세느는 어쩐지 전혀 화가 나질 않았다. 오히려 렌과 눈을 마주치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세느는 뜨거워진 자신의 양쪽 뺨을 손으로 가렸다.
세느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렌과 시선을 맞췄다. 달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그림자가 졌지만 그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품은 감정이 살짝 엿보였다.
“왜냐하면 나는,”
세느는 갑자기 렌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렌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렌의 눈동자가 품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세느는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느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내가, 나는...”
세느가 렌의 눈동자에서 엿본 그 감정의 이름은, 렌이 세느를 볼 때마다 그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이 감정의 이름은,
“네가 좋으니까. 너를 좋아하니까.”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