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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금꽃
작가 : 권가야
작품등록일 : 20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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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금꽃 13
작성일 : 17-07-23     조회 : 249     추천 : 0     분량 : 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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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 줄리입니다.”

 

 이른 아침, 세느의 기상시간에 맞춰 줄리가 그녀의 방문 앞으로 왔다. 노크를 하고 세느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방 안은 조용했다.

 

 “아가씨?”

 

 다시 노크를 하며 세느를 불렀지만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줄리는 방문을 열어 세느가 누워있는 침대 쪽을 바라봤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려 덮은 세느는 일정하게 느린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직도 주무시고 계시네... 식사도 거르시고, 괜찮으시려나...”

 

 줄리는 세느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세느는 어제 회의장에서 쓰러지듯 잠에 들어 저택을 시끄럽게 했었다. 의사의 진찰로는 긴장이 풀려 잠이 든 것이라고 했다. 회의가 빠르게 정리되고 렌과 칼로스는 미하일에게 인사를 한 뒤 저택으로 돌아갔다. 둘의 눈에는 창백하게 식은 그녀의 얼굴이 안타깝게 닿았다.

 

 [주인님아 고생했어.]

 

 넬이 세느의 곁을 지치며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세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군.”

 

 “가주님!”

 

 세느의 방을 나와 계단으로 향하던 줄리는 미하일과 마주쳤다. 줄리는 치마 끝을 살짝 들어 올려 미하일에게 인사를 올렸다.

 

 “예,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줄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미하일의 시선은 줄리를 넘어 복도 쪽의 세느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걱정은 된다만 윌리엄의 당부대로 세느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지.”

 

 “예.”

 

 윌리엄은 로즈티아 가문의 전문 의사였다. 세느가 갓난쟁이일 때부터 그녀를 돌본 배태랑 의사이기도 하다. 그는 저택의 식솔과 미하일에게 세느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라며 당부했다.

 

 세느는 잠들어 있었지만 저택은 분주했다.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택의 모든 카펫을 새로운 카펫으로 교체하고 가구를 옮겨가면서 깔끔하게 청소했다. 세느의 방을 제외한 채 저택의 모든 곳이 재정비 되고 있었다.

 

 저택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세느는 깊게 잠들어 꿈을 꾸었다. 그녀에게는 달콤하고도 잔인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세느는 스물다섯 살의 체형으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또래보다 키도 크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이었다.

 

 “여기는...”

 

 세느가 좋아하는 봄꽃들이 만개한 황궁의 정원. 그 한가운데에 세느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단장!”

 

 세느가 허공에 대해 물음을 던졌을 때, 세느의 등 뒤에서 맑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서린? 네가 왜...”

 

 캐서린은 세느의 훈련 동기로 그녀가 발키리에 입단하였을 때 친해진 전우였다. 캐서린은 기사복장을 입은 채 긴 머리는 높게 올려 묶고 세느에게 다가왔다.

 

 “어제 그 얘기,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오늘인 것 같아! 문 아저씨네 가게에 그가 다녀갔대!”

 

 어리둥절해하는 세느를 무시하고 캐서린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세느가 더욱 어리둥절해하며 캐서린을 붙잡고 그게 무슨 말이냐며 되묻자 고개를 갸웃하던 캐서린이 당연한 것을 왜 묻고 그러냐며 대답했다.

 

 “무슨 말이긴, 폐하의 청혼 이야기지.”

 

 “뭐?”

 

 당황하는 세느의 양 팔을 캐서린이 강하게 붙들었다.

 

 “잘 들어. 무조건 예스라고 대답하면 안 돼. 조금은 고민하는 척을 해야 한다고! 너는 폐하에게 만큼은 너무 풀어지니까...”

 

 엄한 표정을 지었다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캐서린의 표정은 풍부하고 다양하게 바뀌었다. 세느는 익숙한 그녀의 얼굴 변화에 짧은 미소를 짓고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을 꼬집어 물었다.

 

 “폐하라니, 누가...?”

 

 “아이참! 너 어디 아파? 당연히 네 약혼자, 바엘루크 황제 폐하지!”

 

 그녀의 질문에 캐서린은 세느를 찰싹찰싹 때리며 잠꼬대는 그만하라며 소리를 쳤다.

 

 “그가 지금 황제폐하라고? 어째서...”

 

 “아무튼, 반드시 행복해져야해! 세느! 네가 걸어온 가시밭길만큼이나 행복해져!”

 

 어리둥절해하며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세느를 두고 캐서린은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은 너무나 단호하고 명료해서 반드시 그렇게 되야만 한다는 캐서린의 염원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그녀의 단호한 표정에 세느는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

 

 “캐서린, 나는...”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자신은 황제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과연 세느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동료에게 말할 수 있을까, 세느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앞에는 그저 넓은 황실 정원이 펼쳐졌다.

 

 “캐서린?”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간지러운 바람이 부는 정원, 세느의 신비로운 빛깔의 머리카락이 흩날려 그녀의 시선을 가렸다. 바람이 멎고 머리카락에서 시선이 자유로워지자, 그녀의 눈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세느의 키보다 훨씬 큰 훤칠한 키. 넓은 어깨, 단정한 정장차림, 그녀의 손을 잡는 생각보다 거칠고 단단한 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와 시선을 맞춘다.

 

 태양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깊고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바엘루크...”

 

 그는 그녀가 사랑한, 그녀가 증오한 남자였다.

 

 “세느, 여기 있었네.”

 

 그는 바람 때문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아주 섬세하고 다정한 손으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음? 어디 아픈가? 뺨이 붉어, 세느.”

 

 아픈 것이 아니었다. 세느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결국 자신은 이 사랑스런 남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떠올랐기에.

 

 그녀는 그의 반짝이는 얼굴이 그렇게도 역겨울 수가 없었다.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허망하고 잔혹한 꿈에 발을 맞추기로 했다. 꿈을 벗어나면 그와는 적으로서 만나야만 했기에, 한평생을 사랑한 그의 다정함을 꿈에서만큼은 만끽하고 싶었다.

 

 “하하, 아니면 새삼스레 부끄러워 진거야?”

 

 그가 두 손으로 세느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자신의 큰 손으로 세느의 뺨을 간질이며 따스하게 안았다.

 

 “그것도 아니면 벌써 눈치 챘나?”

 

 그는 조심스럽게 세느를 품에서 떼어내고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상실의 미소로 답했다.

 

 “무엇을요?”

 

 세느는 앞으로 그가 내뱉을 말을 전부 똑같이 따라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이 흔한 청혼의 대사여서는 아니었다. 세느는 청혼을 받고나서 몇날 며칠 동안 그의 대사를 곱씹었기 때문이었다.

 

 “어렵고 복잡한 말은 몰라, 나는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는 얼굴을 붉히며 서두를 띄웠다.

 

 “그냥, 눈치채보니 너였어, 내 세상의 전부가 되어있었어. 내 시선은 항상 너를 따라가고 있어, 눈치채보면 항상 너를 보고 있어. 내 곁을 지켜주는 네가, 나를 따라와 주는 네가, 나를 이끌어주는 네가, 전부 좋았어. 너무나 사랑스러웠어.”

 

 그의 머릿속에는 한 여자가 그려졌다. 눈부신 사람, 아름다운 사람, 그것은 그가 사랑한 세느였다.

 

 “이 살얼음 같은 황궁에서 나를 존재하게 해준 사람이 너야,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야.”

 

 거짓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의 눈동자, 떨리는 목소리, 그 어느 때보다 붉은 뺨, 미세하게 들려오는 그의 심장고동 소리는 세느에게 그가 진심을 다해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을 안겨주었다.

 

 “나의 하늘이 되어주고 나의 전부가 되어줘서 고마워, 세느.”

 

 바엘은 세느와 시선을 맞추다 천천히 자리를 잡고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세느는 당황하지 않고 그의 낮아진 시선와 눈을 맞추고 떼지 않았다. 그는 품 안에서 황금색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세느, 앞으로도 나와 영원을 함께해주겠어?”

 

 상자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반지는 오후의 햇살에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급스런 디자인에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정말 아름다운 반지였다.

 

 “바엘, 전부 똑같이 돌려줄게, 너 역시 나의 전부였고, 나의 세상이었어.”

 

 세느는 반지를 받는 대신 입을 떼어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세느?”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바엘은 귀까지 빨개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서 흐른 눈물을 보자, 그는 표정을 굳혔다.

 

 “그만, 바엘. 이걸로 됐어, 이뤄지지 않을 약속은, 이걸로 됐어.”

 

 세느는 손을 뻗어 상자를 닫았다. 바엘은 이해할 수 없었는지, 그의 동공은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너를 미워할 수 있어.”

 

 파직-.

 

 꿈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치 유리공예품에 금이 가듯 세느가 서 있던 황실 정원에는 그렇게 금이 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부서져 사라질 것처럼.

 

 산산히 흩어지는 세상 속에서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안녕, 바엘. 다음에 만났을 때 우리는, 적이야.”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세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음 순간부터 그는 적이라고, 마음과 몸을 속이려 들었다. 가슴이 메어왔지만 웃음이 나왔다. 허망한 웃음이었다.

 

 황실 정원은 이미 산산히 부서져 내려 반짝이는 파편이 되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세느의 머리카락과 섞여 아름답게 빛났다.

 

 “하하, 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린 공허한 공간에서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하하... 하...”

 

 아직 몸에 그의 손길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던 그 듬직한 팔과 단단한 손. 괴로웠다. 남아있는 온기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역겨웠다. 차라리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양 팔을 꽉 쥐어 잡은 채 주저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사세니아!]

 

 빛이 번쩍하고 세느의 시선을 덮쳤다. 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터질 듯이 울려 퍼졌다.

 

 “넬? 여긴...”

 

 세느의 눈앞에 넬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넬은 처음 보는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 주인님? 땀 엄청나.]

 

 세느는 넬의 말에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줄리가 입혀놓은 듯한 긴 소매의 잠옷은 땀으로 축축했고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몇 시야?”

 

 [음, 정오를 조금 지났어, 곧 줄리가 올라올 것 같은데. 어때, 더 잘래?]

 

 “아니, 충분히 잤어.”

 

 ‘이제 일어나야지. 이 침대에서도 그를 향한 미련에서도.’

 

 침대 시트 위의 세느의 손이 강하게 쥐어졌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줄리...”

 

 노크 소리 후에 인사를 고하는 줄리의 목소리를 끊고 세느가 방문을 빠르게 열었다. 줄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줄리! 나 배고파.”

 

 확실히,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이 든 세느는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녀가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줄리에게 다가간 것은 그동안 죄책감에 스스로 그녀와 거리를 둔 줄리가 안쓰러워서였다.

 

 “아, 아가씨..언제...”

 

 방문을 열고 여느 때와 같이 상냥한 미소를 짓는 세느를 보자, 줄리는 덜컥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군분투를 벌이는데, 줄리의 메이드 스커트를 세느가 주욱 당기며 줄리를 불렀다.

 

 “줄리, 나 옷 갈아입고 점심 먹으러 가고 싶어.”

 

 “네, 네! 어서 준비를 할게요!”

 

 세느는 자신의 옷자락을 가리키며 줄리에게 말했고 줄리는 세차게 흔들었다. 줄리는 세느의 방에서 옷가지와 머리 장신구를 꺼내 화장대에 세느를 앉히고 머리를 빗겨주었다.

 

 와인색 카라가 붙어 있는 원피스에 브로치를 달고 머리는 평소처럼 반으로 묶어 리본으로 묶었다. 줄리가 가장 좋아하는 머리모양이었다.

 

 손질이 매끈하게 되어 있는 구두까지 신고 나니 시간이 꽤나 흘러 있었다. 줄리는 서둘러 세느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아버님!”

 

 식당에 도착하자, 그녀를 기다리며 아직 식사를 시작하지 않은 미하일이 세느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바쁜 평일 점심인데도 자신을 기다려준 미하일에게서 그녀는 애정을 느꼈다.

 

 “그래, 잘 잤느냐? 미인은 잠이 많다더니. 자도 너무 자더구나.”

 

 한참이나 걱정을 했지만 미하일은 애써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후후,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세느는 그가 농담을 하면서도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을지 눈에 선하였다. 세느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즐겼다.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너만 괜찮다면 곧 있을 황태자 전하와의 티타임은 미뤄보도록 하마.”

 

 정적을 비집고 미하일이 들어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는 세느를 걱정하는 듯 했다.

 

 “괜찮습니다, 아버님.”

 

 “세느?”

 

 세느의 거절은 정말이지 단호했다. 마지못해 하는 거절 따위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세느는 안타깝게도 꿈속에서의 일을 믿고 있었다. 자신이 그에게 안녕을 고한 것에 지나치게 안심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정말로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또 미련과 추억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아직 그러한 것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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