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정오, 햇살이 따사로이 비치는 공작가의 정원, 손질 된 나무와 분수대는 가문의 식솔들이 성실하게 정원을 손질해왔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정원의 분수대 옆, 작은 테이블과 의자는 큰 느티나무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정원에서의 티타임을 좋아하던 세느의 모친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공간.
단풍이 붉게 물드는 가을에 어울리는 보랏빛 꽃잔디가 사방에 만개했다. 소년 소녀가 마주보며 앉은 작은 테이블 위에는 온갖 고급 디저트가 화려하게 놓여있었다. 저마다의 달콤한 향기와 빛깔을 자랑하며 홍차와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둘 사이의 길고 긴 정적을 깬 건 소년이었다.
“공작가의 정원의 아름다움은 내 소문으로 익히 들어왔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아름답군.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황궁의 정원보다 아름다운 것 같소.”
살랑이는 바람이 소년의 태양 같은 황금빛 머리를 어루만졌다. 소녀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은 사파이어 빛 바다를 담은 듯 잔잔하고 고요하게 빛났다. 누구나 가슴을 떨려할 소년의 외모에도 소녀는 무심하게 홍차에 설탕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한 낯 공작가의 정원이 아름답기로서니 황궁의 고고한 아름다움과 겨를 수 있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황태자 전하.”
연분홍색의 장미를 닮은 세느는 가시 같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바엘은 세느의 차가운 태도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세느,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에게 그런 태도는 조금 무례하지 않아?]
삼천년을 살아온 할아버지 요정 넬에게는 세느에게 기가 죽은 어린 황태자가 안쓰러웠는지 세느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세느는 방해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며 넬을 쫒아냈다.
“로즈티아 영애. 혹시 나에게 화난 것이 있나?”
바엘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세느는 숙이고 있던 고개는 가만히 두고 시선만을 끌어올려 바엘과 눈을 맞췄다.
“편지에 대한 답장도 없고, 오늘따라 말투도 무척 딱딱하지 않은가.”
세느가 불편한 티를 감추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를 원망하는 입장이었어도 황태자인 그 앞에서 불편한 티를 낼 만큼 세느는 바보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 자리에서 불편한 티를 낸다고 해서 세느의 편을 들어줄 식솔들이나 아비인 미하일은 없었기 때문에 세느는 각별히 더 조심했다. 문제는 이런 세느의 행동이 바엘에게 안 통한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느의 기분만은 정확하게 꿰뚫어보던 바엘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나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 했나.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해주는 걸까.’
권한이 없는 그녀가 제국의 실사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덧은 황궁을 크게 들썩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는 그에게 세느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간 제가 미숙하고 어려 황태자 전하께 너무 무례한 말투를 사용한 것 같아 이번 기회에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은 죄송합니다. 일전에 감기를 크게 앓아 그동안 정신이 없었....”
세느는 끝까지 웃으며 말을 마치려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전속 시녀와 호위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바엘은 급히 손을 뻗어 세느의 발그레한 뺨을 만졌다. 세느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아팠다니, 그게 무슨... 어디가? 지금은 괜찮아? 열은 없는데, 내가 너무 불쑥 찾아왔구나.”
아무래도 반 공식적인 자리라 위엄 있는 말투를 유지하던 바엘은 세느의 말에 바로 긴장을 풀고 편지에서나 쓰던 가벼운 말투를 사용했다.
“황자님, 말씨요!”
당황해서 멈춘 세느의 몸을 일깨워 준건 바엘의 전속 시녀 라일라의 목소리였다. 바엘은 알았다며 손사래를 치고 다시 세느에게 집중했다.
“아팠었단 이야기를 들었으면 오지 않았어. 편지에 대한 불만도 말하지 않았을 거야.”
라일라의 언급에도 말투를 고치지 않는 바엘을 보며 라일라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세느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 전하, 어찌 저 같은 것의 감기에 신경을 쓰시며 시간을 낭비하려 하십니까, 별로 중요치도 않을 일에 전하의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세느의 선을 긋는 듯한 말에 바엘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사세니아, 정말 왜 그래? 내가 너의 걱정을 하는 것이 지금 쓸모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예, 그렇습니다. 전하.”
미세하게 떨려온 바엘의 목소리와는 달리 세느는 칼바람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분명 정중하고 깍듯한 말이지만 바엘에게는 상처가 될 말이었다. 하지만 세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회귀 이후로 처음 보는 그를 보자, 꿈에서의 다짐은 이미 무너졌으니까.
“중요해. 내게는 중요하다고, 사세니아. 암묵적으로 너와 내가 이미 약혼한 사이와 같다는 것을 황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데, 너는 어째서...”
‘암묵적인 약혼자’ 어쩐지 익숙한 바엘의 말. 과거에 한번쯤 들어본 듯한 말이었다. 지금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겠지만 세느는 바엘에게서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세느는 그때의 자신은 어떤 기분이었더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런 비참한 기분은 아니었겠지.’
세느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전하, 전하의 약혼자는 곧 이 제국의 예비 황후이십니다. 부디 신중히 생각하시고 말씀하여주시지요.”
“세느!”
화는 조금 전부터 내고 있었지만 나긋나긋한 말투를 유지했던 바엘이 언성을 높였다. 라일라와 호위 기사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꽂혔다.
“... 내가 어떤 기분으로 그 황궁을 버티고 있는데.”
콰앙!!
바엘은 바로 맞은편에 앉은 세느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읊조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곧이어 라일라와 호위 기사들이 흘깃, 눈치를 보며 바엘의 자리를 뒤따랐다. 세느는 모두가 떠난 정원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아름다운 빛깔의 케이크는 그 누구도 먹어주지 않은 채 세느와 함께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고만 있었다. 차가운 빗물이 세느의 머리부터 떨어져 옷가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추워.’
세느는 비를 피할 생각은 않고 그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두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회귀 이후 처음 만나는 그는 생각보다 더욱 깊고 아프게 세느를 흔들어 놓았다. 비참하고 비참하게도 그를 보고 세느가 처음 느낀 감정은 사랑스러움이었다.
‘렌...’
세느는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운 바엘을 애써 밀어내고 렌을 떠올렸다. 자신을 편안하고 느긋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 ‘친구’라는 이름의 피난처인 부드러운 갈색 머리의 소년이 그리웠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끝끝내 그녀의 머릿속엔 바엘을 떠올랐다. 자신의 목에 칼을 쑤셔 넣은 바엘이 아닌, 자신에게 사랑한다, 속삭여 주던, 사랑을 속삭이며 얼굴을 붉히던, 무릎을 꿇고 청혼을 해주던 그를 떠올렸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스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저 하늘의 태양을 닮은 사람, 황금빛 머리칼과 푸른 눈이 신비롭던 사람, 상냥하고 다정한, 따스했던 사람.
“왜, 왜 그랬어...?”
세느의 얼굴에 촉촉하게 흐르는 것은 빗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빗물을 이렇게 뜨거울 순 없었으니까.
“왜 그랬어, 바엘. 어째서 나를 죽인거야....”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 당당하던 세느가 낼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목소리. 다행히도 그 목소리는 빗속에 파묻혀 세느의 곁을 지키던 넬에게만 들렸다. 세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넬의 온몸을 감싸는 에메랄드빛이 흐려진 시야 속에 보였으니까.
그렇게 세느는 한참을 빗속에서 슬픔을 토해냈다.
‘너를 적으로 돌리고 싶었는데, 나는 아직 너무나 미련스럽구나.’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지는 저택 안, 줄 리가 다른 하녀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 아가씨... 황태자 전하와 잘 계시려나.’
따듯한 홍차를 한 모금 넘기자, 양 갈래의 어린 하녀가 줄리를 찾았다.
“줄리, 밖에 손님이...”
“손님?”
줄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방을 나왔다. 로비 쪽에서 줄리를 기다리는 남자는 소나기를 조금 맞은 탓인지 젖어 있었다. 렌은 몸의 물기를 무심하게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레, 렌님! 수건을 가져다 드릴까요?”
“어, 줄리!”
렌의 젖은 모습에 줄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렌에게 물었다. 렌은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보다, 세느는 안에 있어?”
렌은 2층의 복도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일전에 자신이 아직 수습 기사였을 때 이렇게 문득 세느를 찾아왔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계단을 내려오던 사랑스러운 소녀.
“예? 아가씨는 오늘 황태자 전하와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계실 텐데...”
황태자라는 단어에 렌은 잠시 주춤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차, 그게 오늘이었나, 그런데 비가 오는데, 세느는 괜찮아?”
“음, 황태자 전하께서 함께이시니 괜찮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걱정되지만 그쪽에는 황궁 하녀와 기사들만 들어오도록 하셔서...”
소나기치고는 제법 쏟아지고 있었지만 황실 하녀들과 기사들이 함께하니, 당연히 괜찮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비가 쏟아질 때를 대비하여 천막을 칠 준비도 했었으니까. 황태자가 그런식으로 돌아간 줄은 꿈에도 모르는 줄리는 그렇게 안심하고 있었다.
“...줄리, 황태자 전하께선 혹시 말을 타고 오셨나?”
하지만 렌은 미간을 좁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줄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가로로 내저었다.
“아뇨, 마차 다섯 대를 동원하셔서 오셨지요, 마차는 정문에 있습니다만...”
“젠장!”
줄리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렌은 거친 말을 내뱉고 정원 쪽으로 달렸다.
“앗, 렌님?!”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렌을 보고 줄리는 서둘러 큰 수건을 하나 챙겨 따라 나섰다.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쳤다. 눈앞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렌은 필사적으로 비를 막으며 정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렌의 차려입은 정장은 이미 빗물에 젖어들었고 가죽 신발도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다. 예의와 체면을 차리는 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추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사랑스럽게 웃어주는 그 소녀가 걱정이 되어 사소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느!”
결국 그의 걱정스러움이 터져나오는 듯 했다. 렌은 빗줄기 속에서 자신이 그렇게나 걱정하는 소녀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렌님! 무슨 일이셔요!”
갑자기 로비에서 뛰쳐나가 정원을 내달리는 렌에게 줄리가 물었다. 줄리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따르며 비를 맞고 있었다.
“정문에서 마차 같은 거, 본 적 없어.”
렌은 텅 빈 정문이 떠올랐다. 줄리의 말 대로 마차가 여러 대가 들어왔다면 렌이 마차를 분명 보았을 텐데도, 렌은 정문에서 로비로 들어올 때에 마차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예?... 아, 아가씨!”
줄리는 그제야 렌의 말을 이해한 듯 사색이 되어 세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가지고 나온 수건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해 품속에 고이고이 안고 있었다.
“세느!”
렌의 외침은 빗속에 묻혀 답답하게 울려퍼졌다. 그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정원을 돌아보며 계속 불안한 생각만 들었다.
“세느! 사세니아!”
렌의 절박한 외침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흐릿하게 무엇인가 움직이는 듯 한 것이 보였다. 세느였다.
“세느!”
"렌....?"
“아가씨!”
렌이 먼저 겉옷을 벗으며 느티나무 아래의 테이블로 다가가자 줄리도 발걸음을 돌려 세느의 곁으로 다가왔다. 세느는 둘을 보고도 멍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안 돼, 이미 젖은 옷으로는...’
이미 빗물에 젖어 축축해진 자신의 겉옷을 거칠게 던지고는 줄리가 가져온 수건으로 세느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줄리가 품속에 고이고이 품고 있던 덕에 수건은 거의 젖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안아 올리자 세느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렌은 무언가가 내려 앉는 듯한 기분에 혀를 찼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텅 빈 눈동자 때문이었다.
“줄리, 먼저 가서 따듯한 타월이라도...!”
“예!”
사색이 되어 어쩔줄 몰라하는 줄리를 먼저 저택으로 보내고 렌은 세느를 안아 올려 줄리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가는 숨이 렌의 쇄골 근처에 머물렀다. 그는 세느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차가워, 젠장...”
첨벙-. 첨벙-.
렌과 줄리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개의치도 않고 정원에서 저택까지 가장 가까운 길로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빗속을 뚫고 세느를 안고 들어오자 식솔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택에 거주하는 의사를 깨워 불러내고, 젖은 세느의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혀 비를 맞은 세느의 몸과 머리카락을 뜨거운 물수건으로 일일이 다 닦아주었다.
“빗속에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셨습니다. 우선 몸을 따듯하게 하고 상태를 지켜보죠, 아가씨는 강인한 분이시니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새느로 인해 아수라장이 저택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은 의사 윌리엄뿐이었다. 집사 필의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줄리와 다른 시녀들은 코를 훌쩍이며 세느의 곁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강인한 분? 그런 말로 세느를 붙잡아 두지 마, 예전에는 고열로 앓고, 며칠 전에는 신경 예민으로 쓰러지고, 이 아이의 어디가 강인하다는 거야!”
렌은 윌리엄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그의 무례한 태도에는 윌리엄은 차분하게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갔다.
“크흠, 그럼 저는 가주님께 서신을 넣고 오겠습니다.”
윌리엄이 방을 나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집사 필은 헛기침을 하며 세느의 방을 나갔고 다른 시녀들도 필의 뒤를 이어 나갔다.
“렌님, 혹시 아가씨가 진정되시면 귀찮으시더라도 저희에게 꼭...”
“그래, 당연하지. 나가 봐, 줄리.”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세느의 걱정뿐이던 식솔들이 나가자 렌과 세느만이 남은 넓은 방에는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