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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환상곡
작가 : 하이아라키
작품등록일 : 20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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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태생1성이라는 것
작성일 : 17-10-10     조회 : 284     추천 : 0     분량 : 6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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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태생1성이라는 것

 

 딱히 훈련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나이든 노인의 푸념을 들어주거나, 카르곤 언덕에서의 경관을 감상하는 것.

 밭에서 채소를 거둬와 하루 세끼 요리를 한다거나 오두막을 정리하는 일 따위가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특히나 시간이 흐를수록 헤르타베에게서는 7성위를 지닌 위대한 영웅의 위엄 같은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마치 이전의 기억들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져 들기도 했다.

 

 일상은 평화로웠고, 지나치게 정적이었으며 무료하고 심지어 따분하기까지 했다.

 

 - 카르곤의 언덕 아래 펼쳐진 끝없는 대지여

 - 하늘 아래로 그대 역시 작은 한 조각 파이와 같다.

 - 손 끝에 불꽃을 일으켜 온 세상을 불태워도

 - 누군가의 손 끝은 그저 간지러울 뿐이라네

 

 노인은 오늘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요상한 노랫말을 외우고 있었다.

 노인은 한참이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오후가 다 지나고 언덕아래로 석양이 물 들 때 즈음에서야 나를 불렀다.

 

 "오늘로 며칠이나 되었지?"

 "음, 글쎄요. 이곳에 온 뒤로 시간 개념이 없어져서 날짜가 언제인지 가물가물 하네요."

 

 별 의미 없는 질문이라 생각하고 별 생각없이 툭 대답해버렸다.

 

 "이름이 무어라고 했더라?"

 

 또 다시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자는 것 같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 맞다. 쿠로, 쿠로라고 했었지?"

 

 애초에 진짜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인지, 능청맞은 연기를 하고 있는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내 이름은 노인이 나를 이 곳으로 데려온 직후에 물어 알려주었다. 그 뒤로 하루에 한 번은 이름을 물었으니

 절대 기억하지 못할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허름하게 지어져 강풍이라도 불면 금새 날아가 버릴 듯 위태한, 그러나 정취하나는 끝내주는 오두막 앞 야외 탁자에 앉아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곤의 언덕아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수 도 없이 보았던 풍경이라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푸른 숲과 붉은 바위산이 얽히고 설켜 만들어 낸 경치는 그야말로 세레이아스 최고의 경관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잠시동안 넋이 나간 듯 경치에 취해 있던 중 순간 헤르타베에게서 묘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노인은 헛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나를 보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영웅족의 후예이자, 나 같은 태생1성위의 영웅족이 바라 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역사적인 인물,

 헤르타베는 어찌보면 동경의 대상이자 동시에 공포의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노인을 마주하면서도 존경심이나 두려움같은 것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일상이 그러했고 그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아마 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노인의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슬퍼보인다고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고 이 카르곤의 언덕으로 데려왔는지 궁금하지 않더냐?"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카르곤의 언덕을 올라온 뒤로 그에게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그나마 조금은 노인의 질문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처음 며칠은 그것이 제일 궁금했었다.

 왜 날 살려두었을까?

 길드와의 싸움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였던 나를 굳이 살리지 않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금 그때의 궁금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노인은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흥미가 동하셨던 것일까요?"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렇게 말해버렸다.

 다행히 노인의 심경에 어떤 변화같은 것이 일어나진 않아 보였다.

 

 "흥미가 동했다라, 그게 무슨 의미냐?"

 

 노인은 되물었다.

 대답 자체에 또 다시 흥미가 인 모양이다.

 

 "그 곳에서 처음 제 눈을 바라보았을 때 이미 그런 눈빛이셨어요. 흥미로운 눈빛"

 

 노인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렸다.

 

 "계속 이야기해보거라."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노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 사뭇 재밌기도 했다.

 

 "아마도 그때 알아 차린거 같습니다. 제가 태생 1성의 영웅족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노인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그리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처음엔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에 마치 머리를 둔기로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몰려왔다.

 그것은 헤르타베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그런 숨겨둔 비밀 같은 것이었다.

 헤르타베는 잠시 나의 당황스런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나 역시 태생 1성의 영웅족이다. 네 말대로 네 녀석을 없애려던 순간 알아차렸다. 모두가 알고 싶어하던 그 7성 진화의 비밀을 전수시킬 유일한 자가 바로 네 녀석이라는 것을 말이다. "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머리에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나는 노인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진화는 진화를 거듭할 수록 성공확률이 떨어지지, 그래서 태생6성위를 지닌 자들은 절대로 7성위를 이룰 수 없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태생1성위를 지닌자는 그 노력 여하에 따라 1성위에서 7성위까지의

 가능성이 아주 조금, 극히 조금이지만 어쨌든 열려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것이야. 신께서 허락한 1%의 희망이자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세상의 이치이다."

 

 노인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으며 또한 굉장히 흥분되는 것이었다.

 태생1성의 영웅만이 태생7성위를 이룰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열정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흥분도 잠시였다. 노인이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진화에 필요한 의식, 절차 그리고 그에 필요한 수 많은 재료들을 아무가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녀석이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과 마찬가지일것이야"

 

 그런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기운이 쭈욱 빠져버렸다.

 3성위 이상의 성위를 가지고 태어난 보통의 영웅족들은 가문 대대로 진화의 의식을 치룬다. 그것이 관례였다.

 진화에 사용되는 진화석역시 가문 대대로 보존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보물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일부 타락한 가문의 후예들이나 지나치게 진화에 욕심이 많았던 자들이 진화전이라는 것을 벌인 사례도 있었다.

 그것은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한 일종의 결투 같은 것이었는데, 같은 성위를 지닌자의 영혼을 축출하면 진화석이 없이도 성위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전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아주 오래전 부모님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타락한 가문의 후예들이 성위를 올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벌이는 축출전투

 살아남은 자도 죽은자도 모두 득이 될 것이 없는 그야말로 타락한 자들의 욕망이 전부인 의식이었다.

 

 내가 별 다른 말이 없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타락한 가문에서 진화석없이 성위를 올리기 위해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벌인 일종의 의식이자 싸움이다."

 

 나는 노인의 의중을 꿰뚫어 보기위해 표정을 살폈지만 노인의 얼굴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도무지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노인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로지 진화전을 통해 7성위를 이루었다."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극한의 공포가 온 몸을 휘감았다.

 극히 일부의 타락한 가문에서, 그것도 극비리에 전해지는 진화전, 진화석없이 성위를 올리기 위해 치뤄졌던 욕망이 전부인 그런 의식을 지금까지 내내 치루어 왔다고 노인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누가 희생당한 것일까?

 노인은 과연 누구를 재물삼아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까?

 공포와 조소, 그리고 경멸과 두려움이 뒤섞이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놀랐느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비웃고 있는게냐?"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노인이 자의적으로 내 표정을 해석하고 있었다.

 

 "아니, 그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놀랐겠지, 하지만 굳이 너에게 변명할 이유도 또 숨길 이유도 없었다. 사실 그대로 난 진화전을 통해 세에리아스 최초의 7성위를 지닌 영웅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노인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느샌가 노인에게서 공포감따위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회한에 찬 표정, 그리고 모든것을 내려놓은 듯 노인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려서는 잔혹한 삶을 살았다. 영웅족이었지만 일반 사람보다 못한 삶을 살았지, 그런 나에게 어느날 기회가 찾아왔어."

 

 노인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으면서도 또 슬프고 그리고 끔찍했으며 때로 납득이 가기도 했다.

 노인은 스스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노인이 진화의 재료로 사용한 모든 영웅들은 정부의 타락한 고위관료였다고 했다.

 진화전에 응했던 모든 가문들이 그러했듯 떳떳할 수 없는 승부가 소문이 날 리도 없었고 노인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고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게 4성진화에 성공했을 때 누군가 자기를 찾아왔다고 했다.

 

 -

 

 헉, 헉, 헉

 제기랄, 쿠엑

 

 헤르타베는 피를 한움큼 토하고 무릎을 꿇었다.

 헤르타베의 옆에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헤르타베는 그를 통해 비로소 4성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있음을 직감했다.

 

 "대단하군, 그저 뜬 소문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진화전을 통해 4성진화에 성공한 멍청이가 실존할 줄 꿈에도 몰랐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혈전이 끝난직후라 몸 전체가 온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상대가 누군지도 무엇때문에 이곳을 찾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재물이 필요한 타락한 고위 관료의 요청에 의해 진화전에 응해 준 것 뿐이었으니까,

 

 "너에게 더 큰 기회를 주려고 찾아왔다. 실리스, 내가 속한 집단의 이름이다. 너는 이제부터 실리스를 등에 업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헤르타베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제야 비로소 헤르타베는 다듬어지고 날카로워지고 더욱더 견고해져 갔다.

 

 헤르타베가 실리스에서 이탈하게 된 것은 그가 5성 진화를 이룬 후였다.

 제타의 내각 경호를 맡고 있던 실리스가 국가 전복에 관여 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된뒤로 지원이 일정부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헤르타베는 버려진 셈이었다.

 이후로 헤르타베는 특무대와 실리스 모두에게 제거 대상이 되었다.

 

 제타를 떠나 그루지아로 건너 간 그는 그곳에서 6성진화에 성공했다.

 절정에 오른 헤르타베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헤르타베는 이후로 특무대와 실리스 모두에게서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서서히 잊혀져 갔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그 누구도 그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7성위를 지니고 제타로 돌아왔다.

 

 그 뒤로 인고의 세월이 흘러 그루지아의 포츈길드로부터 그의 행방이 밝혀지기까지 그의 족적과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노인은 덤덤하게 자신의 과거를 소년에게 풀어 내었다.

 마치 응어리진 가슴한켠의 한을 쏟아내듯 그렇게나 한참을 토해 내더니 깊게 숨을 내 쉬었다.

 

 "나는 실리스의 개로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그리고 버려졌다. 철저하게 비밀로 봉해진 짧은 기간 동안의 첩보 활동이었지만, 나는 새로 태어났고 비로소 철이 들었지"

 

 노인의 이야기는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놀랄만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었다. 도무지 잠시도 정신을 팔 수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진화전을 명목으로 요원암살을 지시하고 진화연구를 지속했다. 힘을 확보하고 언젠가 세상을 뒤집고자 했을테지.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이 항상 뜻대로는 되지 않는 법이지만 말이야."

 

 궁금했다. 노인이 실리스에게서 버려진 후 7성진화에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이 말이다. 그러나 물을 수도 없었고 노인이 거기까지 나에게 이야기를 해 줄 이유도 없었다.

 세레이아스의 영웅족이라면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최고성위 진화의 비밀을 길다가 만난 1성 성위의 보잘것없는 소년에게 들려줄리 만무했으니까 말이다.

 

 "네 녀석도 짐작했겠지만 단순한 진화전으로 결코 7성위를 이룰 수 없었다. 그것때문에 모두가 나를 찾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방법이나 해법같은 것이 아니야. 그것은 아주 별개의 것이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넌 그 하나의 조각을 반드시 맞출 수 있을것이다. 넌 그럴 자격이 있어, 그렇게 하늘이 원하고 있다. 아마도 곧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다. 운명은 결코 우리를 비켜가는 법이 없지. 그러니 운명에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

 

 노인은 나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노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에게 그 시작의 길을 열어주겠다. 그것은 단순히 최고의 성위에 도달하기 위함이 아니야. 그것은 이 세상의 불길한 운명에 맞 설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함이 될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허무할 수도 있었을 그 짧은 대화를 통해 나는 노인이 두려워 하는, 반대로는 희망에 찬 마음을 온전히 물려받았다.

 그리고 뜻밖의 전혀 새로운 방식을 통해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카르곤의 언덕을 스스로 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닥칠 거대한 음모와 두려움의 실체를 직감할 수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도 없었다.

 노인은 아마도 모든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태생1성위를 극복하고 2성위를 지닌채로 카르곤의 언덕아래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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