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질긴 생명의 끈
카르곤의 언덕을 내려 온지도 벌써 1주일이 지났지만 도통 이곳이 어디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챙겨 온 양식 덕에 며칠 동안은 배고픔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마저도 바닥이 나버렸다.
처음 헤르타베를 만나기 전 고향을 등지고 떠나 왔던 때에도 이런 식으로 배고픔에 시달렸었다.
그래도 그때는 어차피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마음을 다 잡고 머리를 써보려고 노력했다.
고향이었던 알루아(지방 소도시)에서 서쪽으로 일리언 연합국 방향으로 무작정 걷다가 헤르타베를 만났으니까, 카르곤의 언덕은 그렇다면 그 즈음 어디라는 건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이 곳이 어느 즈음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주변은 카르곤의 언덕아래 풍경 그대로였다. 무려 1주일이나 넘게 걸었지만 온통 붉은 바위산뿐이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보았을 땐 짙푸른 녹음이 바위산과 어우러져있었는데, 막상 내려오니 온통 바위뿐이었다.
낮엔 찌는 듯이 덮고 밤에는 얼어 붙을 듯이 추운 것은 고향이나 여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보면 이곳이 제타 왕국령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우선은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
바위 틈 사이 고인 물을 찾아 목이라도 축여야 더 걸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다행히 이렇게 해가 쨍쨍 내리쬐는 와중에도 바위 틈 사이를 흐르는 물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혓 바닥을 최대한 길게 늘여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목을 축였다.
짜릿한 쇳 물 맛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한 참을 그렇게 목을 축이자 조금은 몸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잠시 멈췄던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머리가 핑 도는 듯 하더니 위 아래가 구분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앞으로 걷고 있는지 땅으로 무너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의식 속에서 의식을 찾으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내 신체 그 어느 것도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없었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두 발목이 잠긴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고 있던 그 때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느껴졌다.
무의식이 의식으로 전환되고 빛 줄기를 통해 형상이 확인 되었다.
흐릿한 형상만으로도 시야에 들어온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드시나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이 한마디의 목소리만으로도 의식이 또렷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몸 속으로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었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완전히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온전해지면서 눈 앞의 형상도 또렷해졌다.
지금껏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던가?
동물적인 감각이 순간 온 몸을 지배했지만 이성이 이를 누그러뜨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시선을 돌려 주변을 빠르게 훑어 보았다.
위협적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함이었는데 쓸데 없는 걱정을 한 것 같았다.
"운이 좋은 녀석이군요. 아르셰님에게 직접 치유 받았으니 말입니다."
이제야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바위틈에 흐르던 물을 마신 후 의식이 사라졌었다.
그리고는 이곳에 누워있는 것이다.
아마도 내 눈 앞에 있는 이 여자가 날 살려준 것이겠지.
그러나 그런 감사한 마음도 잠시 뿐 엄청난 허기가 몰려왔다.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잠시 후 누군가 먹을 것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터라 침상에 걸 터 앉을 수 있었다.
날 치료해 준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침상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르곤의 언덕아래 환영의 숲에서 바위틈에 흐르는 물을 마시는 것 만큼 바보 같은 행동은 없다. 그 물은 특수광물이 녹은 채 섞여있어 소량만 마셔도 정신을 잃고, 많이 마시면 중독되어 끝내 죽게 되지. 네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오래 머물 생각 따위는 안 하는 게 좋아. 알겠냐?"
음식을 가져온 덩치 큰 사내는 그녀의 의자 옆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오래 머무를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고..'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오던 것을 꾹 참으면서 침상에서 일어나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야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집단의 산채처럼 보였다. 오두막으로 지어진 간이 건물 같았는데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이곳은 아마도 누군가의 침실이었을 것이다.
오래된 장식들과 가구들이 공간을 적절히 매 우고 있었다.
급조 된 시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꽤나 오래 사용 된 사용 감이 느껴졌다.
"드세요. 중독상태가 치유되면서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을 거예요."
"그런 배려 따위 해주지 않으셔도 그 녀석 허겁지겁 알아서 잘 먹을겁니다요."
이 즈음이면 슬슬 화가 나야 맞을 테지만, 어쨌든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은인일터 일단은 조용히 차분히 해야 할 것을 하자.
먹자.
그리고는 무슨 음식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덩치의 말 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맛있었다.
고향에서 먹었던 돌아가신 어머님의 음식 맛이 되살아 날 정도로 익숙한 맛이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갑자기 울컥한 감정이 생겼다. 어머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난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덩치 큰 녀석의 비아냥 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울려댔지만 아랑곳없이 그렇게 훌쩍이며 쟁반 위 모든 음식을 모조리 비워 버렸다.
어느 샌가 그녀도 덩치도 모두 방에서 나가고 없었다.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헤르타베 만큼은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가 앉았던 그 의자에 턱 하니 걸 터 앉았다.
그리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끔찍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 냈다.
"아,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일단 자네는 말이야 운이 좋았어. 우리에게 발견 되었으니까말야.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어렵게 살아난 목숨을 소중히 다뤘으면 좋겠단 말이야. 그러니까 쉽게 설명을 해줘야겠군.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된 단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그러니까 잠시 후에 우리 친구들이 자네 눈을 가리고 자네가 다시 길을 갈 수 있도록 잘 데려다가 줄 거야.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시키는 데로 잘 따라줬으면 좋겠단 말이야. 만약 시키는 데로 따르지 않거나 무엇을 캐묻거나 혹은 이후에라도 누구에게 우리를 봤다고 말했다가는 아마 어렵게 부지한 그 목숨을 다시 내어놓아야 할 것이야"
사내는 마지막 말을 할 즈음에 미소가 사라졌다. 어딘가 모르게 가볍지만 흡입력 있는 말투를 지닌 묘한 사내였다.
날카로운 인상도 아니었고 무섭거나 험악한 인상도 아니었지만 사내를 마주하는 내내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끊임없이 온 몸을 조여왔다.
"나는 여 튼 할 말을 다 했고, 나 말고 다른 친구들 중에는 자네를 죽이자는 녀석들도 있었어,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서 안대를 풀 때까지 지금 그 긴장 놓지 말도록 해."
어느 샌가 그에게서 가벼운 인상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그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대장~ 왔습니다."
내 앞에 있던 사내는 어느 집단의 대장이었나 보다.
대장이 나가고 나는 또 혼자 남겨졌다.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전까지 안전하게만 보이던 장소가 갑자기 공포스런 곳으로 바뀌어버렸다.
소란함이 잠시 가시는 가 같더니 문 앞으로 소리가 커져 왔다.
순간 밖으로 나가 볼까 하는 쓸데없는 충동이 일었다.
누가 왔다는 것일까?
이 곳은 은신처라 하지 않았나?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장소라고 나를 그렇게 위협하더니 누가 이곳을 찾아 온 것인가?
그 때 문이 활짝 젖혀지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여러 명이 후다닥 들이 닥쳤다.
"자, 일단 침상에 눕히세요. 아르셰님께서 곧 봐주실 거에요. "
급작스런 상황에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일어서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잠시 후 아까 나를 치료 해 준 미모의 소녀가 다급하게 들어와 침상 옆에 섰다.
나도 저렇게 치료를 받았을 거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소녀의 치료 모습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달리 소녀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상태가 어떤가요?'
"그리 큰 부상은 아니신 거 같아요. 굳이 제가 치유하지 않아도 곧 회복되실 겁니다. "
그 때 문 입구에서 지켜보던 사내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군, 진이 빠져 쓰러진 것 가지고 이 난리를 치다니, 이래서 무슨 혁명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건지 흥"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결코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 내가 굳이 들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들이 내 귀로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 오고 있었다.
"루소, 당신 역할은 이미 끝났소, 그러니 우리의 신성한 계획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소리는 자제해 주시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애가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몰래 나가야 할까? 아니지 그렇게는 너무 위험해. 아까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더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아야 할 것 같았다.
"얀가이, 우리는 왠지 이곳에서 환영 받은 인사들은 아닌 것 같다. 준비하고 출발하자. 말 그대로 우리 역할은 여기서 끝이니까."
아무래도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 오는 것을 의뢰 받은 자들인가 보다.
그런 쓸데없는 상상과 추리를 하고 있던 찰나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기분 나쁜 소름이었다.
충분히 익숙하고 또 기분 나쁜 기억이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진공속박'
여느 수준의 단계를 넘어선 엄청난 압박이 전신을 에워쌌다.
"그런데, 저 애송이는 누구지? 누군데 이런 중대사한 순간에 이곳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이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무슨 능력의 소유자라도 되는 것인가?
온 몸이 경직된 순간에도 그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루소, 당신 뭔가 새로운 능력이라도 익힌 거요? 이 녀석은 이번에 새로 합류한 풋내기요. 그러니 큰 신경 쓸 거 없소."
집단의 우두머리가 순간적인 지혜로 나를 감쌌다.
아니 아마도 그것이 여러모로 일을 편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음,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괴리감이 있군. 마치 어디선가 끌려온 사람처럼 안절부절, 그리고 쓸데없이 사방을 살펴제끼는 저 두 눈, 언제라도 기회를 틈타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소?
어쨌든 말씀대로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요. 얀가이 그만 가자. 오래 있어봐야 우리에게 득 될 것은 없다. 그리고 대장, 비용을 의리인 에게 전달받기는 힘들 테니 직접 부탁 드리겠소."
나는 순간적으로 오줌을 지릴 뻔했다.
아무래도 저 사람은 내 정체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비용은 내가 챙겼다."
얀가이라고 불리는 작자가 대답했다.
"진공속박은 그만 풀어 주는 게 어떻겠소? 숙녀분도 계신데 오줌이라도 지리면 꼴불견이니까"
대장으로 불리는 자의 요청이 아니었으면 오줌을 지리기도 전에 숨이 먼저 멎을 뻔했다.
나는 헛기침을 수 차례 하고 비로소 깊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콜록 콜록'
잠시 후 산채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루소라고 불리는 자와 그 동료가 모두 떠난 뒤였다.
실려왔던 사내는 회복중인 거 같았다.
"거기 자네, 이름이 뭔가?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군, 고맙다는 인사는 됐으니 이름이나 알려주고 나가서 우리 부하의 명령에 따르게"
순간 당황했지만, 순수히 이름을 말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쿠로, 쿠로 라고 합니다."
"쿠로, 좋은 이름이군. 자넨 영웅족인가? 성위가 높아 보이지도 않고 전투 훈련을 받지도 않은 것 같지만, 수도로는 절대 가지 말게나. 금새 발견 당해서 개처럼 죽게 될 거야."
나는 또 한번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됐네 어서 나가보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지만 이곳에서 들은 것 본 것 모두 철저히 함구하지 않으면 왕국 특무대에게 당하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당하게 될거야. 우리가 자네 목숨을 되살려 준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게 되는 거지. 그렇다고 너무 쫄지는 말게나. 자네 입이 왠지 무거워 보여. 그래서 살려 둔 걸세. 그러니 스스로를 배신하지 말고 믿으라구 친구, 난 에레시크라고 하네. 운명이 인도한다면 언젠가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에레시크'
어떤 단체의 대장일까? 위엄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사내. 그가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접대 실로 나가자 싸늘한 시선이 여럿 느껴졌다.
아무래도 다들 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돌려 보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저 따가운 시선들이 말하고 있었다.
"안대로 눈을 가리겠다. 생명을 구해주고 또 살려서 돌려보내주었으니,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말아라."
덩치 큰 사내가 내 귀에 닿을 듯이 얼굴을 들이밀고는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눈이 완전히 가려지자 또 다른 공포가 밀려들었다.
정말 날 살려주는 걸까?
그런 믿음 따위 미련한 생각이 아닐까? 차라리 기회를 봐서 도망을 갔어야 했을까?
하지만 도망가다가 잡히기라도 했다면? 분명히 전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일 게 분명했다.
치유사를 거느리고 있는 단체이니, 길드는 아닐 것이다. 영웅 족을 전부 말살시키고 있는 요즘 치유사를 대동할 만큼 간 큰 길드는 없을 테니까
여 튼 길드보다 더 영향력 있는 집단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쓸데없는 잡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뒤로 양 손을 묶인 채 두 명의 사내에게 이끌려가고 있었다.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말에 태워 데려다 줄 모양인가 보다. 그런데 어디로 나를 데려다 줄 생각일까?
"바짝 엎드려, 말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즉사할 테니까. 어렵게 부지한 목숨 아깝지 않게 몸을 최대한 말 등에 바짝 붙여라."
나는 또 다시 공포에 휩싸인 채 말 그대로 바짝 붙었다.
잠시 후 말이 크게 몸을 들어 올리더니 세차게 울부짖은 후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망할 놈들이 나를 혼자 말에 태워 보낸 거다.
가다가 떨어져 죽든 혹은 또 굶어 죽든 이럴 거면 차라리 살려주지나 말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말 등에 바짝 달라 붙어 있는 모습이 스스로 수치스러워 몸 서리가 쳐졌다.
- 같은 시간 반란군 전초시기
"잘한 걸까요? 대장"
"글쎄다. 그런데 이상하잖아. 그 녀석 주머니에 있던 쪽지,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죽여서는 안 되는 녀석일 게다. 우린 옳은 판단을 한 거야."
"음, 하긴 그도 그래요. 도대체 그 허약한 녀석이 무슨 이유로 과거 실리스의 은퇴한 무술교관을 찾아가는 것이었을까요? 여 튼 우리와 적대시 될 녀석은 아님이 분명하겠죠"
덩치 큰 사내는 그렇게 말해 놓고 에레시크를 보았다.
에레시크는 태연한 표정으로 손을 턱에 괴고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초월족의 마지막 후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지금은 이 녀석이 중요하니까, 다른 생각은 잠시 잊어둬야겠지. 이번 일이 성공하려면 이 녀석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테니까. 마츠가 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말이야.'
얼마나 달렸을까? 이 놈은 지치지도 않나 보다. 허기도 지고 목도 마를 텐데 언제 즈음 멈춰 설까?
강제로 세워야 할까?
또 다시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잠시 후 마법처럼 말이 멈추어 섰다.
또 다시 온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달리는 동안 청량했던 기분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더위와 공포로 등골, 온 몸이 땀으로 적셔지기 시작했다.
말이 서 있는 곳은 안전한 걸까?
옆으로 굴러서 떨어져볼까?
어떡하지?
그 때 가까이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딜까? 젠장 할 안대 좀 벗을 수 없을까? 갑자기 분노가 솟구쳤다.
모든 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도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