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판타지/SF
영웅환상곡
작가 : 하이아라키
작품등록일 : 20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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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검술의 달인
작성일 : 17-12-07     조회 : 306     추천 : 0     분량 : 12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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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검술의 달인

 

 안대가 풀리자 비로소 살 거 같았다.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자 마음 속 언저리에 내내 자리잡고 있었던 공포감 같은 것이 조금씩 사그라 들었다.

 시야가 완전히 확보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래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누군가 어설픈 자세로 말에서 내려진 나를 잡아 세우고는 안대를 풀어준 것이었다.

 공포감과 조바심이 모두 사라진 뒤에 비로소 제대로 앞을 볼 수 있었다.

 안대를 풀어준 소녀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눈망울이 매우 크고 머리를 양갈래로 딴 검은 머리칼의 소녀였다.

 어려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키는 그리 작지 않아보였다.

 제타 중부 지역의 특색이 고스란히 드러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춥지도 그렇다고 크게 덥지도 않은 연중 기후탓에 평상복이 예사로웠고 치장이 없이 단정한 것이 특징이었다.

 민무늬의 플레어 스커트와 학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깔끔한 상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소녀의 외모를 요목조목 살펴보는데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없이 소녀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소녀 역시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미묘한 상황은 뒤에서 들려온 노인의 헛기침 소리에 깨어져 버렸다.

 약간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까지 말 등 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건 그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에리야, 녀석에게서 물러 나거라, 어디서 빌어 먹다 온 거렁뱅이 인 줄도 모르는데 허튼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단 한 마디만으로도 그 걸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노인은 쉴새 없이 몰아부쳤다.

 

 "목숨은 살려줄터이니 어서 썩 꺼지거라. 훠이훠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 같은 물체를 들어 올려 하늘로 휘 젖는 시늉까지 해가며 진심으로 날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손녀딸이나 되는 모양인양 어디라도 해할까 싶어 부랴부랴 날 떼어 놓으려는 심산인가 보다.

 비쩍 마른 노인 주제에 목숨을 살려준다느니 어서 썩 꺼지라느니 기도 안 찼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출신도 알 수 없는 타지인에 대해 자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것을 두고 뭐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머물 생각도 없었다. 최소한 이곳이 제타 중부 지역 어딘가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수확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 하나만 딱 물어보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

 

 "뭐 하나만 물어 보고 바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혹시 부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고 계신지요?"

 

 순간 소녀와 노인의 얼굴 표정이 완전히 똑같아졌다.

 마치 어처구니 없는 그래서 터무니 없다못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은 것 마냥 그렇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둘이 닮아 보이기도 했다.

 

 "부토라는 사람을 알고는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왜 찾는 게냐? 허튼 짓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게 좋을게다. 비록 늙었지만 네 녀석 하나 즈음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될테니까 말이다."

 

 당췌 이 노인은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는 안하는거 같았다.

 빠르게 말을 이으며 뒷 주머니를 뒤적였다.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차싶었다.

 노인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 같은 것이 어느샌가 뻗어와 내 오른팔 사이로 파고 들었다.

 1성에서 2성으로 진화하면서 동체 시력이 좋아진 탓에 잠시나마 노인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였다.

 나는 또 한번 무기력하게 노인에게 내 오른팔을 내주고는 지팡이 같은 물체에 이끌려 순식간에 노인의 앞까지 끌려 갔다.

 노인이 지팡이 같은 물체를 길게 뻗어 내 오른팔을 휘감더니 그대로 들어 올려 내 몸 전체를 틀어 버렸다. 그러고는 지팡이의 끝 부분으로 내 목을 감싸 노인에게 끌어 당긴것이다.

 나는 의사와 상관없이 노인의 품에 등을 기댄채 고개를 쳐 들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영웅족인게냐? 2성이로군"

 

 노인은 아마도 목 뒤에 새겨진 성환 표식을 본 모양이다. 영웅족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 부터 목 뒤에 흐릿 한 별 표식을 갖는다. 이것을 성환이라고 불렀다.

 1성부터 현존하는 최고 성위인 7성까지의 표식이 새겨져 있는데, 태생으로는 6성(이 조차 거의 드물지만)이 한계 이므로 생후로는 6개의 별 표식이 최고이다. 제타 뿐 아니라 세레이아스 전 세계를 통틀어도 태생 6성위를 지니고 태어난 영웅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진화에 성공하면 이 표식은 자연스럽게 수정된다. 이러한 표식의 변화는 고대 요르만왕국의 오랜 연구 활동을 통해 그 비밀이 밝혀졌는데, 영웅족들만의 독창적인 신체 구조에 의한 것이었다. 과거 영웅족과 초월족이 창궐하던 시기에 이 표식은 그야말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안타깝게도 척살의 대상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노인은 표식을 확인한 뒤에도 자세를 풀어주지 않았다.

 

 "무슨 해꼬지를 하려고 한게냐? 팔을 당장 부러뜨리지전에 솔직하게 말해라. 이놈"

 

 고개가 꺾여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소녀가 안스러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에서 걱정을 끼칠 수 없을 거 같아 상황을 빠르게 설명했다.

 헤르타베와 카르곤의 언덕 그리고 부토라는 인물을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것 까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고 간결하게 이야기 했다.

 노인은 곧바로 내 주머니를 확인하는 듯 싶더니 다시금 지팡이로 내 목을 강하게 조였다.

 

 "이 녀석이 목숨이 아깝지 않은게냐?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도데체 편지가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네 놈이 씹어 먹기라도 한게냐?"

 

 순간, 또 한번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산장에서 쓰러져 있을 때 누군가에게 빼앗긴 모양이었다.

 변명 처럼 들리던 그렇지 않던 일단 생각하는 바를 빠르고 간결하게 또 한번 내 뱉었다.

 도저히 목이 꺾여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거 같았다.

 

 "편지는 아마도 산장의 청년들에게 빼앗긴 거 같습니다만, 저는 하루빨리 부토라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 때 였다. 꺾인 목이 풀리며 순식간에 몸이 한 바퀴 휑 하고 돌아 노인의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콜록콜록, 나는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목을 연신 쓸어 내리며 심한 기침을 수 차례 뱉어 내었다.

 

 "알았다. 이놈아, 내가 바로 그 부토다. 헤르타베는 내 오랜 친구이자 제자이기도 하다. 헤르타베라는 말을 들었을 때 풀어 주려고 했는데 장난을 조금 더 쳐 보았다. 그런데 엄살이 정말 심한 녀석이로구나."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했다. 카르곤의 언덕을 내려 온 뒤로 찾아야 할 사람을 우여곡절을 조금 겪기는 했어도 이렇게 무사히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노인의 태연한 태도 때문에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는 없었다.

 다만, 소녀의 눈망을을 보고 있자니 그런 억울함은 금새 사그라 들었다.

 소녀는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라도 하고 싶은 듯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에헴,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편지를 잃어버렸다지만 아마 내용은 뻔했을 것이다."

 

 노인은, 아니, 부토라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는 저 멀리 숲 속에 자리잡은 작은 오두막 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두막 내부는 생각했던것보다 더 넓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응접실의 끝 벽 중앙에 거대한 검 하나가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걸려 있었다.

 한 동안 그 거대한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마치 내 마음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이 소녀가 말을 걸었다.

 

 "저는 헤르타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저 검에 얽힌 이야기는 조금 알고 있어요."

 

 소녀는 수줍에 이야기 하고는 사알짝 웃었다.

 뭐가 우스운 건지 소녀는 한참을 미소 짓더니 말을 이었다.

 

 "할어버지가 아주 오래전 실리즈에서 은퇴하시기 전에 제자였던 헤르타베에게 선물로 받은 검이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다시 혹여라도 제자를 받게 된다면 그 때 검을 그 분에게 전해주시라고 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후로 제자를 키우시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아직도 저 검이 이 곳에 있는 것이에요."

 

 헤르타베로 부터 선물받은 검

 누구의 작품일까?

 제타에는 유명한 대장장이들이 많긴 했지만 저 정도의 검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그랬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특히 길게 뻗은 검신과 손잡이 부분인 검병의 모양새가 제타의 흔한 검들과는 달리 이국적이었다.

 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봐도 알만 대륙에서 만들어진 검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에리의 말 그대로다 .그 검은 헤르타베에게 받은 것이지, 눈썰미가 있는 녀석이라면 단 번에 알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검은 제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검은 저 바다건너 그란델라 대륙의 장인이 만든 특별한 검이다. 그런 검을 나는 선물 받았지. 오래전 일이지만 말이야.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이 검을 전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포기한지는 이미 오래다. 자 우선은 앉아라."

 

 노인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는 응접실 중앙에 놓인 등받이가 잘 만들어진 낮은 의자에 몸을 던졌다.

 나도 따라 앉았다. 자연스럽게 등이 젖혀 지면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가 되었다.

 조금 뒤에 소녀가 중부 지방 특유의 잎새 차를 내 왔지만 이 자세로는 차를 마시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냥 그대로 등을 기댄 채 미동도 하기 싫었는지 몰랐다.

 

 노인은 한 참을 그렇게 이야기 했다.

 헤르타베의 근황을 묻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헤르타베와 만나게 되었는지, 헤르타베에게 어떠한 훈련을 시켰는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시시 콜콜한 이야기를 한 없이 늘어 놓았다.

 소녀는 요리도 직접 하는 것 같았다.

 저녁이 되어 내 온 요리는 산장에서 먹었던 것 보다 몇 배 더 맛있었다.

 

 노인이 술을 권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밤이 깊어 노인과 소녀가 각자의 방에서 잠을 청하고 나는 손님이 묵을 때 쓰는 작은 서재 방에 거처를 마련했다.

 아마도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부토는 헤르타베의 편지가 없이도 헤르타베가 검술 전수를 위해 나를 부토에게 안내 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했다.

 너무 당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탓에 무어라 말을 하지도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사실일테니까.

 

 카르곤의 언덕에서 내려 오기 전, 헤르타베는 진화석이나 영혼의 축출이 없이 나를 2성으로 진화시켜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방식의 의식이었는데, 높은 성위의 영웅족이 자신의 힘을 스스로 축출 해 낮은 성위의 영웅족에게 부여하는 형태로 비교적 간단한 절차의 의식이었다.

 헤르타베는 진화의 의식이 끝나고 나에게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진화석없이도, 진화전없이도 충분히 진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7성위를 이루기 위한 여정은 생각보다 더욱 더 험난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카르곤의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부토라는 노인을 만났다.

 실리즈의 옛 교관으로부터 어떠한 훈련을 받을 수 있을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내 미래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난 뒤로 처음으로 목표 같은 것이 생겨났다.

 강해지고 싶었다. 헤르타베는 내가 불길한 운명에 맞설 영웅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것을 모두 떠나 그저 우선은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님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비웃고 거드름피며 소중한 생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여 간 그들과 그들의 우두머리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한 참을 미친사람처럼 울며 웃다가를 반복하다 어느샌가 깊이 잠이 들어 버렸다.

 

 부토의 가르침은 이튿날부터 곧바로 시작되었다. 처음엔 나무로 만들어진 검을 들고 기본 자세부터 배웠다.

 소녀도 옆에서 같이 따라 했는데 처음에는 내 자세보다 좋아보였다.

 

 부토는 교관 출신 답게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하르타베는 검을 다루는 것이 서툴러 요인암살법과 같은 특수 훈련을 주로 했었다고 했다.

 훈련 전 이미 4성 이상의 성위를 지니고 있었던 헤르타베와 달리 이제 갓 2성 진화에 성공한 나는 부토의 모든 가르침이 벅찼다.

 

 한달 가량을 숙식하며 어느정도 검술의 기초가 잡혀가는 듯 했다.

 기본 자세와 찌르기 베기 막기 그리고 반격하기까지의 과정이 어느정도 몸에 벨 무렵 부토는 나에게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마치 오래전부터 검을 다루어 본 사람 처럼 습득 속도가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같은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무엇이든 한 번 보면 잘 잊어버리지 않고 금새 따라 하는 것이 1성위로 태어난 나의 유일한 장점이었던 것이다.

 헤르타베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 빠른 전투 상황을 어렵지 않게 따라 갈 수 있었다.

 

 "단순히 눈썰미가 좋다라고 하기엔 그 익힘 정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어쩌면 그것이 너의 스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스킬' 그렇다. 아버지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3성위를 지녔던 아버지는 독특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었다.

 아버지의 능력은 사실 종교계나 정부에서 부단히 원했던 S클래스의 능력이었다. 낮은 성위의 영웅족에게서 특별히 발현되는 심리스킬 중 최고 수준에 속하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자신의 능력을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평범한 일반인처럼 생을 살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버지의 아들인 나 역시 그런 능력 정도는 가지고 태어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그 능력을 부토라는 교관이 온전히 일깨워 주고 있었다.

 

 "스킬이 없이 태어나는 영웅족이 대부분이지만, 아무래도 너는 스킬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 어디 이 공격을 한번 받아 보아라."

 

 검술을 배운지 이제 갓 한달 남짓 된 초보에게 부토는 가차없이 검을 찔러 들어왔다.

 부토의 자세는 그야말로 교본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땅을 구르고는 허리를 펴고 우아하게 검을 들어 내 가슴을 찔러왔다.

 나는 그런 부토의 움직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저 너무도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부토의 공격을 회파하였다.

 부토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 거리더니 재차 공격을 펼쳐 왔다.

 이 노인은 성격은 괴팍하지만 그렇다고 몰상식하지는 않았다.

 특히 비열한 행위나 가식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 그야말로 올곧은 성격을 가진 노인이었다.

 한달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 지금의 공격은 그러한 그의 상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가슴을 찔러왔던 첫 번째 검은 정직한 것이었다.

 반면 허리를 찔러 들어 온 두 번째 검은 가식적인 것이었다.

 검은 허리춤으로 오는 듯 하더니 이내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베어 나갔다.

 아무리 동체 시력이 빠른 나라고 하더라도 이번의 공격을 몸을 틀어 회피할 수는 없었다.

 뒤로 물러서기에도 이미 늦었다고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검을 퉁겨 공세를 쳐 낼 수 밖에 없었다.

 순간 부토의 표정이 변했다.

 

 "음, 나는 비록 영웅족이 아니지만 검술에 있어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건 스스로 자부하는 바이다."

 

 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이 잔뜩 긴장했다.

 나는 노인의 검을 거둬 낸 뒤 멋적은 표정으로 노인의 입을 주시했다.

 

 "방금의 공격은 영웅족으로 따지면 4성위를 지닌 자들이 낼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알겠느냐? 네 녀석의 반응 속도가 이미 상식 선을 벗어났다는 얘기야."

 

 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노인의 이야기인즉슨 내가 가르침을 받은 지 단 한달 여 만에 4성위 수준의 검격을 별 어려움 없이 막아 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

 노인의 말대로 그것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단순히 동체시력이 좋다느니 반응속도가 빠르다느니 그런 소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거지, 아마도 헤르타베는 그런 네 녀석의 능력을 감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것이 내 능력인 것 같았다.

 스킬은 비록 갖고 태어났어도 개방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었다. 스킬 개방은 자연개방되거나 어떠한 계기로 개방되는 경우도 있었는데,나는 아무래도 자연개방 된 경우 같았다.

 순간 이 스킬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그것이 고민이었다.

 그저 빠른 습득력, 반사신경, 그리고 동체시력이 좋은 것 뿐인데 그런 기초 능력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그런 것 따위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후로도 노인의 가르침은 아니, 공격은 계속 되었다.

 노인은 서서히 강도를 높여 마치 스스로 연구를 하듯 나를 공격해 들어왔다.

 노인은 중간 중간 몸을 띄워 후방을 찔러 들어 오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속절없이 당해 가격을 당했다.

 부토의 가르침은 저녁 늦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에리의 음식 솜씨는 늘 그렇듯이 최고였다.

 한달 내내 그 향이나 모양이나 재료를 달리하여 색다른 요리들이 끊임없이 제공되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검술 훈련으로 고단 했지만, 음식 때문에 행복했다.

 

 어느덧 반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다.

 부토와도 그리고 소녀, 에리와도 돈독한 정이 쌓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노인은 나에게 검술 뿐 아니라, 암기술과 각종 암살기술, 기습기술을 비롯해 헤르타베에게 가르치지 않았던 독창적인 검술과 응용검술까지 본인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전수시켰다.

 그저 2성위를 지닌 영웅족에 불과했던 나에게 무슨 재미를 그렇게 느꼈는지 부토는 온 힘을 다해 그리고 정성을 다해 스스로 만족할 때 까지 그렇게 끊임없이 나를 가르치고 채근하고 훈련시켰다.

 그렇게 나는 2성위 답지 않은 2성위의 영웅족이 되어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카르곤의 언덕아래를 내려오기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 되어 있었다.

 

 고향을 떠난 뒤로 비로소 한 사람분의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사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흐르는 듯 했다.

 그 누구도 약속한 일정은 아니었지만, 나나 부토 그리고 에리는 이제는 내가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복수, 개인적인 감정사를 그들에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헤르타베도 그러한 이유로 날 거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설픈 노인에게 가르침을 받느라 그간 고생이 많았구나, 처음 봤을 때 그 어리숙한 모습이 이제는 제법 사리진 티가 난다. 뿌듯하구나."

 

 노인은 아니 검의 현자로 불리우던 부토는 아쉬움과 시원함이 모두 담겨 있는 목소리로 평소처럼 뒷짐을 진 채 격려했다.

 잠시 후 에리가 자신의 키 만한 무언가를 들쳐 메고 나왔다.

 한 눈에 봐도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네 것이다. 받아두어라."

 

 에리는 무겁게 들고 나온 그 대가의 검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이걸 제가 받아도 되는건가요? 이것은 또 다른 가치와 의미가 깃든 물건이 아닙니까?"

 

 흥분과 감격이 뒤섞여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러나 검의 현자 부토는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비로소 그 검의 가치가 완성된 것이야. 그 검은 네 손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기억해둬라. 녀석의 이름은 '우라인'이다. '우라인' , 그란델라 대륙의 최고 장인에 의해 오래도록 벼려진 검이다. 결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검, 그 검이 너의 앞으로의 길을 충분히 개척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거둬라. "

 

  '우라인'

 

 그렇게 나는 나의 '우라인'과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에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쉬움에 대한 눈물이기도 했고, 서운함에 대한 눈물이기도 했으며, 다시 그리워질 세월에 대한 눈물이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에리를 안아주었다.

 아무말도 없이 그렇게 한 참을 안아 주고는 그녀의 이제는 더 사랑스러워진 소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사알찍 미소지었다.

 소녀도 같이 미소지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는 마지막 인사를 마쳤다.

 

 그 때 였다.

 거친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치 천둥이라도 치는 것 처럼 땅을 흔들며 숲을 뒤 흔든 말발굽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급기야 먼지를 일으키며 시야에 드러났다.

 

 "왠 놈들이 겁도 없이 이 부토의 오두막을 향한 게냐?"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지팡이를 꺼냈다.

 

 좋지 않은 예감은 항상 맞아 떨어진다고 했던가?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잦아졌다.

 한 무리의 일행이 내 앞에 부토와 에리의 앞에 나타났다.

 

 순간 나는 무언가에 압도당한 듯 온 몸이 굳어 버렸다.

 헤르타베에게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산장에서 의문의 청년에게 당했던 것처럼 또 한번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에 온 몸을 봉쇄 당했다.

 반 년간 신 내린 듯 받아 들였던 검술 따위는 아예 펼쳐 볼 틈도, 기회도 없이 내 쓸모없는 육체는 그렇게 또 다시 묶여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진공 속박이 아니었다.

 영웅족이 사용하는 진공 속박은 정신 보다 신체를 우선으로 속박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 기운은 정신이 속박되는 느낌이었다.

 이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진공 속박이었다. 마치 정신을 지배당한 것 처럼 온 몸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일까?

 진공 속박도 아닌 이 무형의 압박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온 힘을 다해 등 뒤에 맨 검으로 손을 움직여 보았다.

 부질없었다.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부토는 그런 속박에 압도 당하지 않아보였다.

 비로소 노인의 경지가 눈에 보였다.

 부토는 내가 범접할 수 조차 없는 그런 경지의 인물이었다. 이제야 그런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감격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안감힘을 썼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에리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에리는 노인의 뒤에서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어렸다.

 외모도 어렸고 목소리도 어렸다.

 낮고 중후하게 깔리는 저음톤의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젊고 여렸다.

 누구든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중후함 속 깊이가 부족한 그런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그런 앳됨 속에 공포가 흘러 넘쳤다.

 알 수 없는 공포와 혐오가 오두막 주변을 완전히 감싸 안은 듯이 그런 무형의 기운이 사방을 둘러 쌌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살기와는 다른 또 다른 무형의 압박이 숨통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대기에 모든 공기가 사라진 것 처럼 숨을 쉬는 것 조차 힘들었다.

 에리는? 순간 부토의 뒤로 몸을 숨긴 에리로 시선을 돌렸다.

 의외로 에리는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실리즈의 첩보가 이렇게 정확했었나요? 어르신이 은퇴 했어도 실리즈는 역시 실리즈인가 봅니다."

 

 청년은 아마도 부토를 알고 있었나 보다. 부토가 과거 실리즈의 특수 훈련 교관이었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는 듯 했다.

 

 "많이 컸구나, 세월이 흐른다 흐른다 해도 변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지라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살았는데, 네 녀석 얼굴과 목소리르 들으니 새삼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 차이가 느껴지는 구나."

 

 부토는 대담하게 그렇지만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맞습니다. 세월이 흘렀고 변했고 나는 성장했습니다. 특무대 또한 왕국 군 내 최고권위를 지니게 되었구요. 이제 어르신의 빈자리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지요."

 

 부토는 노려보듯 청년을 쏘아 보았다. 청년은 그런 시선에 흔들림 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중간 중간 나를 쳐다 볼 때 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최고의 검술가로부터 그야말로 최고의 검술을 내려 받았다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었고 나는 그저 자만심 가득한 먼지 조각에 불과 했던 것이다.

 자괴감과 공포가 뒤섞여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청년이 말을 이었다.

 

 "하여튼간에 실리즈의 첩보에 의하면 이곳에 영웅족 하나가 숨어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녀석이 7성 진화의 단서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군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이지만 진위를 파악해 둘 필요가 있어 이렇게 굳이 제가 어르신의 거처를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역시나 목표는 나였다.

 나를 잡아 가려고 온 것이다.

 누가 어떻게 헤르타베와 나의 관계를 누설한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내가 정보를 흘린 것일까? 산장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내 손님을 수색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부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나는 또 다시 무력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

 

 "수색은 무슨, 영웅족이니 단서 따위가 없으면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겁니다."

 

  '죽인다고? 나를?' 또 다시 뒷 머리에 전율과 소름이 끼쳤다.

 생사를 다투었던 여정이 불현 듯 뇌리를 스쳤다.

 

 "건방진 녀석, 나이를 쳐 먹어도 그 놈의 버르장머리는 변한 것이 없구나. 네 녀석도 결국 영웅족이 아니더냐? 종족 말살에 앞장서는 역겨운 녀석"

 

 부토는 거침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훗, 어르신 지금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청년이 실소를 하자 이를 관망하던 일행이 모두 허리를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도대체 뭐가 우스은거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부토라는 전설적인 검술가 앞에서 저렇게 웃을 수 있는 녀석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한 때 내각 경호를 도맡았던 전설적인 검술가에 대한 예우를 거부하시겠다는 것으로 받아 들여도 될런지요?"

 

 "미친새끼"

 

 부토는 또 하번 거침없었다.

 부토의 욕지거리로 잠시나마 통쾌함을 맛 봤다.

 그러나 상황은 호전되지 못했다.

 

 "노인네가 망령이 들었군. 모두 대기하도록 명령 없이 움직이는 자는 그 자리에서 뱃가죽을 벗겨버리겠다."

 

 청년의 혀도 부토 못지 않았다.

 그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 보였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장 내에 긴장이 흘렀다. 과도한 긴장이 공포를 만들고 두려움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그럼 어디 한 수 배워보겠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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