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의 시간은 제멋대로다.
문득 졸음이 찾아와 잠을 잤다가 깨어나니 어느새 낮이 지나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미 껌껌해진 하늘은 적어도 완전한 밤이 된 지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을 알 수 있는 느낌이다.
“너무 자버렸나? 대체 몇 시인거지”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시간을 짐작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아 나는 주섬주섬 목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목걸이 형태로 되어있는 시계를 꺼내서 보았다.
[02:30]
새벽의 한 중간인 시간을 잠시 가만히 본 나는 흘끔 정면을 바라보았는데 그 자리에는 스텐씨가 몸으로 검을 한쪽에 고정시킨 상태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뭔가 자세가 불안한 게 조금만 건들 어도 갑자기 깨어나서 검을 꺼내들 것 같은 기분이다.
그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애매한 시간이다 그러니… 조금 더 자자.
동시에 다시 의자에 등을 대고서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자버린 것일까?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잠이 오기는커녕 심심해지기만 해져서 한참 이러다가 결국 다시 눈을 뜨고 말아버렸다.
“아, 싫다. 뭐 할 것 없나?”
웅얼거리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한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가만히 잠을 청하고 있는 스텐씨다. 아마 조금만 크게 몸을 움직이면 깨어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어서 조금 먼 곳을 바라보자. 아까는 둘이 끝에 서 있던 기사들이 한 명은 앉아있고 다른 하나는 서 있었다.
그 외에는 각자 잠을 청하거나 혹은 개인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정도가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이렇게 마치 직업병처럼 사람을 관찰하고 있자 느긋하게 두리번거리던 내 시선에 창밖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을 헤집으면서 달리는 기관차와 어둠 속을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무엇보다 이 속에서도 모습을 잃지 않는 하늘색 구름까지, 절경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을 끌어들이는 광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본다.
창문 너머로가 아니라 직접 보면 더 절경이지 않을까?
잠시 서 있는 기사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어 밖을 구경하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는 별은 무척 아름다울 테니까.
그러니…
털썩
책이나 읽을까?
가볍게 결론을 내린 나는 몸을 의자에 기대며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뒤척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도 대비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해온 책이 여기 안에…
“어, 방금 밖으로 나가려고 하신 것 아니야?”
순간 들려온 말에 책을 꺼내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옆으로 돌리자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색이 약간 탁하다는 것만 때면 금발의 청안이라는 이 대륙에서는 흔하디 흔단 색조이지만 살짝 봐도 미남이라고 생각되는 외형은 쉽게 누군가의 시선을 끌어당길만한 외모였다.
"무슨 말이에요?”
“방금 전까지 창밖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시기에 밖으로 나가려나 했지.”
“그럴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했는데?”
“그냥 책이나 읽으려고요.”
멈춘 손을 움직여 다시 가방을 뒤적인 끝에 찾아낸 책을 꺼내든 내가 말하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띠운다.
“그럼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긴 했다는 거네.”
“굳이 말한다면 그렇죠.”
“잘 됐네. 저도 잠깐 밖에 나갈까 했는데 같이 바람이라도 쐬러 갈래?”
…솔직히 말해서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 아니냐는 말로 시작해서 같이 밖에 바람 쐬러 나가자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사실보다 더 중요한건…
“나가기 귀찮아서요.”
여기서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하, 대번에 거절하는 건가? 그건 거절의 방법이 너무 서툰 것 같은데.”
“아니, 진짜 귀찮은 것뿐이니까… 이 자리 나갔다 들어오기 너무 불편해서요.”
그와 동시에 통로로 나가는 옆자리를 흘끔 본다. 나와 스텐씨가 낮에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았던 가방들이 아까의 보복이라도 하듯 늘어져서 나가는 길을 막고 있다. 게다가 방금 전 책을 찾겠다고 뒤척여서 완벽하게 아웃.
이걸 치운다고 힘겹게 움직이느니 차라리 나중에 스텐씨가 일어났을 때 잠깐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 훨씬 편하겠지.
“그럼 그것만 해결한다면 같이 밖에 나갈 의향은 있다는 거야?”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기관차 여행이 처음이라 이렇게 지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덕분에 챙겨온 것이 아무것도 없다해야하나?”
곤란하다는 듯 말하며 동시에 가지고 있던 가방을 슬쩍 열며 내게 보인다. 정말 간단한 먹을거리 정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방이다.
예상외의 모습에 말이 나오지 않아 잠시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내 행동을 이상하게 이해한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슬쩍 내 쪽으로 다가온다. 마치 장벽처럼 놓여있는 가방을 치우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만히 그의 행동을 보고 있자 그는 손을 내 쪽으로 뻗어 양 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았다.
“잠깐 실례할게.”
“실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순간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가방을 치워주려 했다고 생각한 남자는 대신에 허리 속으로 양 손을 집어넣어 나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옮겨주면 되는 거지?”
아니, 날 말고 가방을 치워주면 되잖아.
순간 목 끝까지 차올라 내뱉어버릴 것 같은 소리를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가는 이 칸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깨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대신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땅에 내려놓은 사내를 잠시 쳐다본 후 그의 팔을 붙잡고서는 재빨리 칸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 모습을 잠시 반쯤 조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기사가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주었는데 그 기세를 타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쾅!
칸의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강한 바람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겨울이 아니기에 차가운 바람은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관차 위이기에 강한 바람이라는 느낌은 충분히 든다.
“후우, 바람이 시원하네, 경치도 좋고, 나오길 잘했지?”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다 답하였다.
“구, 굳이”
“굳이?”
“절 들어 올릴 필요는 없었잖아요? 차라리 가방을 치워줬으면 됐을 것을…”
“아, 그거? 별 뜻은 없었는데 함부로 네 물건을 만지면 싫어할 것 같아서 그랬지.”
“함부로 제 몸을 만지는 것도 싫어하는데요.”
약간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 일부러 인상을 찌푸린 채 말하자 그는 의외로 정상적이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그건 미안해. 별 뜻은 없었는데 그런 특별한 물건들을 꽉 담은 가방을 만지면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겠어?”
“네?”
“가방 안에 있는 것들, 모두 연금술로 만든 물건들이잖아? 아닌 것들도 꽤 희귀해 보이는 물건뿐이고.”
어느새 내 가방을 본거지?
“제 가방을 언제 그렇게 본거죠?”
“언제라고해도 계속 보고 있었는데, 꽤나 희귀해 보이는 물건들이 모여 있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그를 빤히 바라본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눈을 둘 곳이 없어서 그를 바라본 것이지만 그는 괜히 찔리는 것이 있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말을 덧붙인다.
“단언컨대 좋지 않은 뜻은 없었어. 그저 내가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던 것뿐이죠.”
“직업?”
남의 가방에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직업이라니 딱히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다.
“도둑? 산적? 아니면 강도?”
“아니 아니 아니, 셋 다 아니야. 도둑 산적 강도라니… 너무 한 것 아냐? 난 그저 상인일 뿐이야.”
“아, 상인이구나.”
“뭐야 그 반응은, 결국 내가 하려는 말은 이런 흉흉한 소문이 도는 사이에 기관차를 타는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정말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 혹은 모험가 같은 사람 정도라고 생각되잖아? 그 중에서 너처럼 큰 가방을 들고 타는 사람은 모험가 쪽이라고 생각했어.”
그 말에 나는 특별한 의미도 없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진위여부 따위는 떠나서 내가 들어도 무척 자연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번 흘끔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래도 의외네, 모험가가 아니라 연금술사라니.”
“그런 것도 알아차릴 수 있는 건가요?”
“뭐 쉬운 일이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연금술로 만들어낸 물건이나 재료인 것도 그렇고, 조합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중간 단계의 물건들도 있으니까 고민할 것도 없잖아?”
“그러네.”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흘끔 옆을 바라보자 기관차 안에서 보았던 하늘색 연기가 보인다. 나오기 귀찮았지만 막상 나오니 나쁘지 않은 느낌이려나. 아니 오히려 장기간 안에 있어서 답답해진 마음이 뻥 뚫려서 좋은 기분이다.
“저기, 의문이 모두 해소되었으면 나도 좀 질문을 해도 좋을까?”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좋아요.”
어차피 이 기관차 안에서는 공평하게 남는 것이 시간이니까.
“대단한 건 아닌데 말이야. 우선 어째서 지금 기관차에 탄 거야?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좋잖아?”
“아, 그거라면 굳이 지금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탄 것뿐이에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목숨을 걸 정도의 중요한 일이 있어?”
“아니 기관차에 타는 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어도 중요한 일이 있는 건 사실이고요.”
내 말에 흥미를 느낀 것일까? 그는 재빨리 내게 얼굴을 들이댄다.
“중요한 일? 그게 뭔지 알 수 있을 까?”
“블랑드 영지에 가야하거든요.”
“블랑드 영지? 거기에 연금술사가 갈 일이 따로 있나? 별로 상업적으로 발전을 한 곳이 아니어서 물건을 팔거나 할 것도 없을 텐데.”
“뭐, 정확히는 블랑드 영지 뒤에 있는 오지를 탐험할 계획이지만요.”
그 말에 순간 그의 눈이 미묘하게 빛난다.
“오지 탐험? 아, 연금술 재료를 구하러 가는 거구나?”
“그렇죠.”
“근데 오늘일 필요가 있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을 이은다.
“시간이 좀 촉박한 일이라 서요. 기간이 있다고 해야 하나?”
“어느 정도인데?”
“1년이요.”
“…1년이면 충분히 긴 것 아니야?”
어지간히 궁금한 것이 많은 것인지 계속해서 묻는 그를 잠시 보며 고민한다. 말해도 되려나? 아니 딱히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 해도 되겠지.
“뭐 보통이라면 그렇지만 전 지금 공인 연금술사 시험 때문에 가는 길이라 1년으로 될지 모르겠거든요.”
“공인 연금술사 시험이라… 그럼 충분히 그럴만하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는 순간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사람처럼 놀라며 말한다.
“잠깐 그럼 아가씨가 이번에 3차 시험을 통과해서 최종 시험을 보러 간다는 공인 연금술사 후보생?”
“뭐 이번에 통과한 것인지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맞아요.”
공인 연금술사의 마지막 시험은 어렵기로 악랄하다. 3차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 자체가 시험이 치러 질 때마다 기껏해야 한 두 명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시험에 도달한 뒤 최종과제를 내지 못해 공인 연금술사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더 많다는 것이다.
그 난이도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1년 안에 여태까지 없었던 물건을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3차 시험을 합격한 사람 중에 공인 연금술사가 되는 사람보다 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다. 일간에서는 공인 연금술사가 되지 못해도 마지막 시험까지 갔다는 타이틀 만으로도 잘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출발한 도시가 엘드랑이니까 어림짐작 한 거야. 그보다 공인 연금술사 후보라…”
“왜 그러죠?”
“별 건 아닌데 상인의 본능이 피어올랐다고 해야 하나?”
“상인의 본능?”
“아, 내 소개가 너무 늦었나? 나는 이슐란이라고 해, 직업은 일단 상인이지.”
“일단 상인은 뭔데요?”
황당함에 묻자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답한다.
“음 부업이 있긴 한데 아마 주업은 상인이거든.”
“정말 수상하게 이야기하네요. 그보다 상인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응? 그냥 팔만한 좋은 물건이 있나 해서. 공인 연금술사 후보라면 실력도 좋을 것 아냐.”
단언하듯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단언하는 것 아닌가요?”
“단언이라니… 최종 시험은 조합 실력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잖아.”
“잘 아시나 봐요?”
“뭐, 다들 아는 이야기 정도는? 그래서 혹시 좋은 물건 있나? 있으면 적당히 사줄게.”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그를 보며 진짜 상인이 맞긴 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든 것이 있었다.
“근데 그리 말하는 이슐란씨도 중요한 일이 있나 봐요? 이런 시기에 기관차를 타다니.”
“뭐, 중요하다면 중요하려나?”
“어디 물건을 구하러 가는 거예요?”
비어있는 가방을 생각하며 묻자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구하러 가는 게 아니라 계약하러 가는 거지. 꽤 손이 큰 상인이거든. 난.”
“손이 크다라… 그런 사람이 우연히 만난 연금술사의 가방에서 물건을 사가려고 하나요?”
“저도 아무 물건이나 사진 않는다고? 희귀하거나 비싼 물건을 사려는 것뿐이야. 뭐 혹시라도 팔 마음이 있으면 이야기 하도록 해.”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란 모양을 해 동전 모양을 만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보인다.
“들어가서 생각은 해보도록 하죠.”
겨울은 아니어서 엄청 춥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약간 쌀쌀한 느낌은 들어 그에게 말하자 그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열차여행 중 밖으로 나와 본 밤의 경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칸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