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한은 딱 일주일을 더 머물고 절을 떠나려는 참이다. 광목은 가르쳐 줄 것이 없다지만 그래도 뭔가 비벼볼 구석이 없나 하는 기대와 자신이 탈출한 뒤 궁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기에 조금 더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두 가지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
광목은 정말 특출난 능력이 있는 듯, 없는 듯 하며 아무것도 가르쳐 줄 것이 없다고만 했다. 불길을 일으키는 것까지 바라지도 않는 몽한이 졸라 대자 읽어보라며 책이나 던져 줄 뿐이었다.
그사이 궁에서는 뒤주에 갇힌 지 9일째에 내가 죽었다고 밖으로 알렸다.
‘나는 멀쩡히 살아 있건만 이미 죽은 이가 되었구나’
탈출이 발각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여겼으나 공식적으로 사망한 인물이 되자 몽한은 그간 느꼈던 씁쓸함이 배가 됨을 느꼈다.
그런 그의 기분을 그나마 달래 주었던 것은 동자승이었다. 광목이 던져준 책을 읽다 지칠 때나, 두고온 처자 생각에 멍하니 있을 때면 와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책 읽기는 수월하신가요?"
"고서들 같은데 드문드문 요괴들도 나오고 허무맹랑하다만 읽기가 나쁘지는 않구나."
동자승은 깜찍하게 받아쳤다.
"헛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하나 잘 살펴보세요. 언제 어디서 요긴하게 쓰일지 모르잖아요."
"하하- 그래, 헌데 넌 이름이 뭐냐?"
"출가전 이름은 승호에요. 주지스님은 그냥 편하게 호야라고 불러요."
똘망똘망하게 답도 잘하는 것이 영리해 보인다. 이제 보니 키는 작지만 상당히 귀여운 것이 어딘가 귀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나저나 내가 정녕 이런 것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도깨비니 구미호니 손각시니 나 원참."
잘 듣던 승호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일장 연설을 늘어 논다.
"이런 것들이라뇨? 아마 전부 다 아저씨 보다 오래 살았을걸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이런 분들이라 해야죠."
‘그래도 전 세자인데 아저씨가 뭐냐......’
몽한은 말을 안으로 삼켰다. 광목을 제외하고 이 산중에 유일한 말동무를 실망 시키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경계 없이 대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이러 저러한 날이 흘러 이제는 정녕 길을 떠나는 아침이 되어 광목대사와 승호가 마중인사를 나왔다.
"주상께서 사도세자라 시호를 내리셨다지요."
몽한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
"그런가요. 잘 몰랐습니다."
"사도(思悼)..... 슬피 생각한다는 뜻이니 애닳은 주상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승호가 빠지지 않고 끼어들었다.
"제가 보기엔 그 사도가 아니라 그 뭐더라, 정의의 사도 같은 멋있는 영웅 같아요!"
광목대사가 크게 웃어젖혔다.
"호야 네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구나. 세자께서 가려는 길이 꼭 그러하니 거룩한 일을 위해 헌신 하는 사도(使徒)라 하면 되겠다!"
사도(思悼)세자가 아닌 사도(使徒)세자라... 기왕 이리 된 것 슬픈 것보다 씩씩한 것이 낫지 않겠는가? 혹, 글에 밝으신 아버지께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중의적으로 만드신 건 아닐까?
몽한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며 긴 여정의 첫걸음을 땠다.
하루 뒤
어차피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요, 누가 오라는 것도 아니니 그저 터벅터벅, 간간히 보는 아낙네들은 그저 한가로워 보이는데 어딜 가야 요괴들을 만나고 어떻게 해야 백성들의 혼을 달랜단 말인가? 하염없이 걸으니 비까지 오고 꼴 좋다.
험한 산길을 내려오느라 하루 종일 걸었음에도 수원도 채 벗어나지 못한 몽한은 급한 대로 비를 피해 외딴 농가로 들어갔다.
"이보시오! 아무도 없소?"
몇 번을 소리쳐도 아무도 나와 볼 기색이 없다. 보아하니 먼지 깨나 쌓인 농기구며 퀘퀘한 집 꼴이 누가 살다 버리고 간 집 인 듯하다.
‘에라이 일단 비나 피하자!’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 젖은 옷가지며, 보따리며 풀어 헤쳐 말리고 누웠다. 전 주인이 누군지도 모를 집에서 고의(속옷)만 입고 있으려니 민망하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떠랴.
사람이 고귀해 지는 것은 어려워도 천해지는 것은 쉽다더니 일주일새 아무데서나 잘 벗고 잘 드러눕는 자신을 보며 몽한은 재밌어했다.
‘난 천성이 왕은 아닌가봐’
몽한이 둘러보니 버리고 간 집이라 해도 실내는 별 풍파를 겪지 않았는지 깔끔했다. 방구석에 초는 있되 불이 없어 켜지는 못했다. 원체 더운날인지라 젖은 몸에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
한참을 자 밤이 되었음에도 몽한은 피곤함이 채 가시지 않아 눈을 감은 채였다.
‘옷은 다 말랐으려나, 덮을 것이 없으니 말랐으면 그거라도 입으면 좋겠다’
밤이 되니 찬기운이 드는 듯해서 이래저래 고민중이던 몽한의 감은 눈앞으로 밝은 것이 휙 지나가 눈을 떴다.
뭐지? 사람들이 왔나?
눈을 뜬 몽한은 컴컴한 방안에 그대로 있었다. 자던 중에 추웠는지 새우처럼 꼬부라져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만 껌뻑이는데 구멍이 숭숭 뚫린 창호지 문 앞으로 다시 한번 밝은 것이 휙 지나갔다.
화들짝 놀란 몽한은 몸을 일으켜 앉아 옷부터 찾았다. 정말 누가 온 거라면 속옷만 입고 있을순 없어 재빨리 옷을 찾았다.
다시 한 번 문 밖으로 밝은 것이 휙 지나갔다. 딱 횃불만한 것이 정말 누가 온 듯 했다.
마저 옷을 입던 몽한은 이상함을 느꼈다.
‘저렇게 빠르게 지나간다는 건 뛰어 다닌다는 것인데 발자국 소리가 전혀 들리지가 않는구나. 게다가 이 야심한 시간에 빈 집 마당에서 횃불을 들고 뛸 리도 없고......’
가만히 앉아 문 밖의 불이 노니는 걸 보니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누가 들고 뛰는 게 아니라 날아 다니는듯 했다. 멀어지는가 싶던 불빛은 어느새 문 바로 앞에서 꺼져 버렸다.
아니, 불이 꺼진 문 앞에 사람이 서 있다.
창호지 구멍으로 새어드는 옅은 달빛에 거친 숨소리도 들려온다. 몽한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라지 않던 문이 삐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족히 7척 (약 2미터10센티)은 되보이는 거한이 문을 가득 막고 서 있다. 밤이라 분간은 안가도 거무죽죽한 피부색에 짧은 바지만 입고 숨을 거세게 내몰아 쉬고 있다.
마치 짐승의 숨소리 같다.
거한은 고개를 숙여 아니, 허리를 숙여 방안으로 들어와 몽한의 옆에 털썩 앉았다. 좁은 방안에 괴수 같은 거한과 몽한.
‘사람이 아니다. 필경 이것이 요괴중의 하나로구나......’
팔다리가 파리 날갯짓처럼 떨리는 와중에도 몽한은 정신을 차렸다. 거한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그저 그 산짐승 같은 숨만 내몰아 쉴 뿐이다.
차마 고개를 돌려 볼 용기는 없지만 말을 걸어 보았다.
"누구시오?"
거한이 대답을 안하고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어 더욱 긴장하던 차에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터졌다.
"이름을 묻는거냐, 정체를 묻는거냐?"
"이름은 무엇이요?"
"우골."
거한은 놀랍도록 굵은 목소리에 딱 어울리도록 아주 느리고 굉장히 특이한 억양이었다. 그래도 거한이 순순히 답을 하자 몽한은 다소 긴장이 완화 되었다.
"그럼 우골선생의 정체는 무엇이오?"
"도째비."
예감했던, 하지만 아니길 바랐던 답이 나왔다. 그런데 도깨비가 아니라 도째비라고?
"내 도깨비는 알겠소만 도째비는 모르겠소. 같은 종자요?"
"나 사는데 서는 도째비라 한다."
어디서부터 왔길래..... 아무튼 답도 잘하고 해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소?"
도째비는 여전히 앞만 보면 말했고 마지막 답변은 몽한의 침을 마르게 했다.
"이몽한이라는 놈 찾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