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존
눈가에 간지럼이 느껴진다. 연규가 미간을 찌푸리며 실눈을 떴다. 찌그러져 완전히 닫히지 않는 문틈으로 붉은빛이 새어 들어온다.
"크으…."
연규가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슬며시 몸을 일으켜본다.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뱃가죽이 등골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아… 지하 창고…."
이제야 자신이 어디서 정신을 잃었는지 깨달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괴물들의 향연. 그것은 이미 잠잠해졌는지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하다. 어젯밤과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에 그저 생생한 악몽을 꾼 것 같다. 창고에서 일어난 걸 보면 꿈은 아니겠지. 연규가 찌그러진 문을 당겨보았다. 관절에서 몇 달은 기름칠하지 않은 듯한 뻐근함이 몰려왔다.
-끼이이익.
창고 문 역시 관리가 안 됐던 건지, 어젯밤 일로 망가진 건지. 거북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콜록. 콜록. 콜록."
약간의 틈이 벌어졌을 뿐인데 뿌연 먼지가 쏟아져 내린다. 연규는 갑자기 들이닥치는 먼지에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움직일 때마다 뻐근함이 느껴진다. 적어도 하루 이틀은 내내 누워있었을 법한 뻐근함이다. 창고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벌어진 문틈으로 보이는 붉은 빛에 먼지가 나부낀다. 멍하니 앉아 먼지 입자의 느긋한 춤을 구경했다. 그러곤 무릎을 감싸 안아 고개를 파묻었다. 혼란스럽다. 눈을 질끈 감고 무릎이 부서 저라 껴안는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리가…?
위화감의 원인을 알아채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두 팔로 정신없이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뻐근함 말고는 어떠한 통증도 없다. 잔뜩 굳어버린 피딱지가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그 피딱지가 자신의 몸에서 흘러 굳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멀쩡한 몸이다.
연규는 지하 창고를 내리쬐는 붉은 빛에도 위화감을 느낀다. 이곳은 체육관 안에 있는 지하창고이다. 상식적으로 어떠한 조명이 켜져 있지 않은 이상 빛이 들어올 수가 없다. 연규가 멍하니 찌그러진 문을 열었다. 뻑뻑한 창고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문의 움직임에 맞춰 먼지가 인다. 마주하는 붉은빛에 흩날리는 먼지를 거둬낼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계단을 뒤덮은 너저분한 잔해더미가 보인다. 그 위로 보이는 붉은 하늘. 연규가 손을 뻗어 내민다. 붉은빛을 받은 손도 붉게 보인다. 마치 선셋필터를 망막에 덮어씌운 모습이다. 순간 눈에 이상이 있는가 싶어 눈을 비벼본다. 하지만, 온 세상이 붉다. 연규가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널브러진 잔해더미를 밟아 올라 지하 창고를 빠져나왔다.
"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악몽이 아니었다. 분명 해는 중천에 떠 있는데, 노을지는 듯 붉은색 하늘이 연규를 맞이한다. 그리고 발아래 보이는 뭉개진 지반. 계단 초입부터 펼쳐진 넓은 크레이터가 보인다. 자신이 생매장당하지 않고 살아 있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이 여태 자신이 살던 지구가 맞는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
아마도 세상 어느 곳을 찾아가 본들 이러한 광경을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반쯤 무너져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학교와 붉은 하늘, 그리고 크레이터는 어쩐지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얼핏 뉴스에서 유성우가 쏟아질 거란 말을 들은 거 같다. 맞나? 지금은 그 기억조차 의심스럽다. 한창 시험을 준비하느라 관심을 두지 않은 게 문제였을까? 혼란스럽다.
"집은…? 가족들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한국도?"
문득 한국에 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 연규가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인다.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 까봐도 나오는 건 먼지뿐이다. 허탈감이 몰려온다. 하숙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발걸음을 뗄 때였다.
-꼬르륵.
이미 등골에 달라붙은 뱃가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일단 뭐라도 좀 먹어야겠는데…."
연규가 배고픔을 느끼고 반쯤 무너져 내린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발걸음에 힘이 없다.
매점이 위치한 곳은 완전히 무너져 있다. 엉망진창 널브러진 콘크리트 더미에 질려 다가갈 엄두가 안 난다. 거의 모든 곳이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는 곳 역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에 다가갈 수 없었다. 한참을 걸려 본관을 한 바퀴 둘러 본 연규는 고개를 저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후두둑 떨어지는 콘크리트가 접근을 거부한다.
결국, 본관에 위치한 매점을 포기하고 별관을 바라봤다. 본관과 별관 사이에 있던 공원과 분수대를 대신해 작은 크레이터가 자리 잡았다. 연규는 조심스럽게 크레이터를 가로질러 별관으로 움직였다.
크레이터가 생겼다면, 지반을 뭉개 놓을 정도의 충격이 있었다는 건데 전혀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히 충돌로 열에너지가 생겼을 텐데…. 의야함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게 다시금 이상했다.
크레이터의 흔적은 지하창고 바로 앞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충격의 진동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다는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은 세상을 마주한 충격에 정신이 없어 자세한 상황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면,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어떻게 자신은 크레이터 주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허기가 두뇌 회전을 방해한다. 지금으로선 아무리 생각해 본들 알 수가 없다.
별관 역시 본관과 마찬가지로 건물이 맞긴 한 것인지 의심 든다. 본관보다 규모가 작은 별관이지만, 본관에 비해 작을 뿐이지 세 학부가 수업을 받는 곳이다. 웬만한 대형 병원만큼의 규모를 지니고 있는 별관이다. 그런 웅장한 건물 벽면이 뭉개진 모습에 작은 한숨을 내쉬고 별관을 둘러 본다.
별관을 빙 돌아 반대편으로 가자 연규의 우중충한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별관 뒤편은 실금이 잔뜩 그어져 있지만, 어느 정도 건물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에 치이는 작은 콘크리트 조각을 조심스레 밟으며 별관으로 들어갔다.
연규는 본관에서 수업을 받다 보니 별관에 들어갈 일이 없었다. 별관 어디에 매점이 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1층에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복도를 거닐었다.
한 발자국 거닐 때마다 잘게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 밟히는 소리가 섬뜩하다. 후문 오른쪽은 강의실과 연구실, 그리고 사이버 열람실이 있었다. 이후로도 호실이 존재했지만, 무너져있어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연규는 무너진 너머에 매점이 없었길 바라며 뒤돌아 움직였다. 다시 사이버 열람실, 연구실, 강의실을 지나 후문 왼쪽으로 가니 강당과 강의실이 있었다. 매점으로 보이는 공간은 없다.
복도 끝으로 나가자 흡연실로 이어지는 공간이 나왔다. 흡연실 옆에 음료 자판기와 과자 자판기가 서 있다. 과자 자판기 안에 초코바가 보인다. 연규는 눈앞에 먹을 것을 보고 어깨를 내밀어 자판기를 들이받았다.
몇 차례 쿵쿵거렸지만, 미동도 없다. 오히려 건물에 그어진 실금이 더 늘어나 보인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연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쓸만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발견했다.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
양손으로 콘크리트 덩어리를 주워 자판기에 힘껏 던졌다. 꿈쩍도 안 한다.
이것도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이번엔 콘크리트 덩어리를 고쳐 쥐고 자물쇠를 찍는다.
-쿵. 쿵. 쿵. 캉.
조준을 잘못해서 앞면을 내리찍으며 콘크리트 덩어리를 놓쳤다. 부서지라는 자물쇠는 부서지지 않고 엉뚱하게 앞면이 부서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소득. 비록 원하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조금 더 부수다 보면 내용물을 꺼낼 수 있겠다. 떨어트린 콘크리트를 잡고 약간 구멍이 생긴 앞면을 내리찍었다.
쩌저적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 덩어리가 자판기 안으로 들어간다. 연규는 지체없이 구멍으로 왼손을 집어넣었다. 눈앞에 초코바를 향한 연규의 몸부림이 과격했던 걸까? 허우적대던 도중 자물쇠가 드득거리며 뜯겨나간다. 자판기 문이 열렸다. 허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뭐 어떤가? 이제 초코바를 먹을 수 있는데.
허겁지겁 자판기에 넣은 손을 빼내고 초코바를 집어 봉지 체로 입에 가져갔다. 왼손에서 따듯한 액체가 흐르는 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연규의 신경은 오직 먹는데 빠져있다. 그 자리에서 4개를 해치우고 나서야 목이 메는 걸 느낀다.
자판기를 부수는데 일등공신인 콘크리트 덩어리를 잡아 음료 자판기도 부순다. 자판기가 캔 음료를 토해낸다. 허겁지겁 캔을 따 입으로 들이붓는다. 음료가 주는 밍밍함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어젯밤 마신 미지근한 물이 생각나 기분이 찝찝하다. 연규는 반쯤 남아있는 음료를 집어 던졌다.
"하아… 이제 어쩌지?"
연규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뭘 해야 할지가 막막하다. 우선은 하숙집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찾아야겠지. 그리고 하숙집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도 알아봐야겠고. 생각을 마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걸음을 놀렸다. 여전히 왼손에서 피가 흐른다.
거리 곳곳이 쓰레기장처럼 보였다.
고요하다. 이동하는 동안 들리는 거라곤 자신의 발걸음 소리뿐이었고, 보이는 건 무너진 건물과 크레이터로 인해 중간중간 끊겨있는 도로뿐이다. 하늘은 여전히 붉은색이다. 모든 게 어색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곳을 오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변해버렸다. 이 모든 게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세상이 종말하고 있는 걸까? 호주에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해가 안 되는 것들 천지지만 그중에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무너진 건물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무너지며 불타고,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오래전에 일이라도 된 듯 연기 하나 없다. 수중에 휴대폰도 없고, 정보를 수집할 수단이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이런저런 답 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하숙집 앞에 도착했다.
아니,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맞나?
분명 맞은편 무너진 건물의 간판은 하숙집 앞에 있는 편의점이 맞다. 하지만, 편의점 맞은편에 있어야 할 하숙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숙집 건물 대신 보이는 것은 깊게 파여있는 구멍과 그 구멍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크레이터가 있다.
만약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물들의 비명에 잠에서 깨지 않았다면… 전날 마지막 시험이라는 기분에 취해 조금 더 술을 먹고 완전히 뻗어버렸다면… 과연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에 한기가 돌고 닭살이 올라온다. 너무 놀라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연규는 혹시라도 건질만 한 물건이 있을지 찾아보기 위해 후들거리는 다리로 하숙집이 있었던… 넓게 펼쳐진 크레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완벽하게 연소했는지 뭉개진 지반만 보인다. 어딘가에 연락할 수단이 사라지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떠올린 대피소가 생각났다. 우선 학교는 안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벙커? 아쉽지만 위치를 모른다. 산이라면 대피소가 있을 텐데… 도심지인 이곳과 거리가 너무 멀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다. 문득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렵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연규가 머릿속을 헤집는 불안한 생각들을 떨치려 고개를 흔든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보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얼굴에 그늘이 짙어진다. 잡생각을 떨치려면 몸을 혹사시켜야 한다. 부들거리는 다리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규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무너진 편의점을 살폈다. 앞으로 얼마나 혼자 돌아다녀야 할지 모르는 일인데 충분한 식량을 챙겨야 했다. 건물 잔해를 치워내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학교에서부터 거친 물건을 잡았더니 손바닥이 쓰라리다. 확실히 고통은 잡생각을 떨치는 데 효과적이었다. 연규는 고통을 참으며 잔해를 치워냈다.
손전등이 보인다. 스위치를 눌러보지만 켜지지 않는다. 흔들어보니 건전지는 들어있다. 망가진 건가? 그 뒤로 몇 개의 손전등을 찾아 켜봤지만 모두 작동이 안 됐다. 쓸모없는 망가진 손전등을 던지고 지포 라이터를 주워들었다. 찰칵. 찰칵. 불꽃이 튄다. 기름만 있으면 어둠을 밝힐 중요한 물건이 되겠다. 연규는 라이터를 기름을 가득 담아 두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발견한 코팅된 종이가방. 손잡이도 플라스틱 재질이라 튼튼해 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크기가 작았다. 기껏해야 클러치백 수준이랄까? 한 가지 단점이 치명적이긴 하다. 들고 다니다 찢어지는 난감한 상황이 오는 것보단 좋겠지. 라고 위안하며 종이가방에 마른 음식을 쓸어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