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존 (3)
-깡.
의욕만 앞섰던 걸까? 연규의 쇠파이프는 목표를 잃고 바닥을 내리쳤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찌릿함에 쇠파이프를 놓쳐버린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인형을 바라봤다. 문 너머에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망할 역광 때문에 식별이 안 된다.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앞서 온 사내와 일행인가? 잘만 걸어오다 왜 멈춰 섰지? 어떻게 피한 거야? 타이밍은 정확했는데?
사내가 다가온다. 바로 앞에 무기를 휘둘러도 놀란 기색 하나 없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사내의 눈빛이 느껴진다. 무섭다. 이빨이 다다닥 소리를 낸다.
-처벅. 처벅.
사내의 발소리가 오싹하다. 그의 기운에 압도당해 뒷걸음친다.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도리어 놀라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으아아!!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휘두른 주먹엔 걸리는 느낌이 없다. 앞이 안 보여 그런지 공포심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먹질을 멈추고 슬며시 눈을 떴다. 사내는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시체와 자신을 번갈아 쳐다본다.
"오… 오지 마…."
자신조차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목소리가 떨렸다. 여전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한심한 놈…."
공포가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을 때 사내가 중얼거렸다. 머리를 해머로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사내가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
무척이나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것도 한국어로 말한다. 그리고 전혀 상상도 못 한 한국어에 놀라 어안이 벙벙하다.
사내가 초점 잃은 시선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연규에게 다가온다. 뜻밖의 한국어에 잠시 사라졌던 공포심이 몰려온다. 연규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벌리자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에 틀어막혔다.
입안에서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게 느껴진다. 무엇인지 모를 위화감에 입안에 든 물건을 뱉어내려고 발악했다.
"읍! 으읍!!"
그런 노력에도 사내는 아주 능숙하게 연규의 입을 막고 목울대를 움켜쥔다. 그리고는 연규를 가만히 응시한다. 뜬금 없이 그의 갈색 홍채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입에 든 물건이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와 위벽을 감싸는 게 느껴진다. 도수 높은 술을 마신 것 같은 느낌이다.
사내가 연규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거두고 뒤돌아 간다.
"헉… 허억…. 누… 누구세요? 크윽…."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복통이 몰려왔다. 복통은 금세 머리로 옮겨갔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 연규는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야!!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잠시나마, 아주 잠시나마 같은 한국인으로서 도움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실수였다. 자신은 사내에게 죽일 기세로 무기를 휘둘렀고, 그의 행동거지는 위압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라니.
팽팽히 부푸른 풍선마냥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사내가 사라진 문 너머를 봤다. 그는 연규의 상욕에도 발걸음을 놀려 지하실을 벗어날 뿐이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그의 뒷모습을 담아뒀다. 문득 자신과 비슷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번쩍 뜨인다. 얼굴 옆면을 적신 흥건한 피가 찝찝하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 맛본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 시체가 때린 얼굴도 멀쩡하다. 쇠파이프에 맞은 어깨도 통증이 없다. 자판기를 부수다 생긴 상처까지도.
눈에는 아직도 자신과 비슷한 체격을 가진 사내의 뒷모습이 남아있다. 그는 누구지? 나는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걸까? 시체가 멀쩡한 걸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다.
도대체 자신에게 뭘 먹인 걸까? 도리어 멀쩡해진 몸은 전보다 움직이기 편했다. 한창 편해진 몸 상태를 점검하고 있을 때 악취가 코끝을 자극해왔다. 피비린내는 아니었다.
악취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니 시체가 있다. 자신이 죽인 사내. 그의 몸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나오는 가스인가? 이상하다. 본래 시체는 가스가 눈에 보이게 풍겨 나올 정도로 부패가 빠른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막 일어날 때는 악취가 나지 않았다.
결론은 시체는 갑작스럽게 부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 아픈 악취가 풍겨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패 속도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시체는 상식을 파괴한다는 듯이 맹렬히 연기를 피워 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매서운 속도로 부패가 진행될수록 더욱 심하게 악취가 풍겨 나와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비어 있는 위가 들썩인다.
"우읍!!"
연규는 시체에서 떨어져 코를 막았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시체는 완벽하게 녹아내렸다. 언제 있기라도 했었냐는 듯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구토를 유발하던 악취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지하실에는 어느새 익숙해진 피비린내만 가득했다.
시체에서 일어난 일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규는 이미 다 녹아내린 시체 위에 이전에 없던 유리 조각을 발견했다. 피 웅덩이 위에 둥둥 떠다니는 조그만 물건을 보지 않으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연규는 유리 조각을 주워들었다. 생소한 기분이 든다.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실 이것만 선명하게 보인다. 반투명한 유리 조각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길가에 흔한 돌멩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름답다.
멍하니 유리 조각을 바라보던 연규가 피식 웃는다.
연규가 지하실을 훑어본다. 온통 검붉은색 피가 가득하다. 연규가 철제문 너머를 바라본다. 햇빛조차 붉다. 연규가 다시 유리 조각을 본다. 이것마저도 붉은색이다. 이놈의 붉은색은 하늘에서 돌덩이가 떨어진 이후 계속 보인다.
연규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유리 조각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종이가방을 주워들었다. 종이가방은 찐득한 피가 가득하다. 한숨을 내쉬고 뒤집어 피를 따라낸다. 바닥을 더듬어 지포 라이터를 찾았다. 피가 흥건히 묻어 켜지지 않는다. 또다시 한숨을 나온다.
대충 짐을 챙긴 연규가 지하실을 나온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이동해 뒤돌아 건물을 바라본다. 큼지막한 호텔 간판이 삐걱거린다. 옆으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인다. 붉었던 하늘이 피처럼 검붉다.
깨진 창을 통해 아침 햇살이 내리쬔다. 쌀쌀한 겨울 날씨에도 햇볕은 따사롭다. 연규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으라라랏차!!"
한껏 웅크려 자던 연규가 양 팔 벌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창밖을 본다. 깨진 창 너머에 붉은 하늘은 현실을 자각시킨다. 세상이 변했다.
전과 같은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의 수는 줄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 처음 만난 사람이 준 공포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제아무리 착한 사람이 다가 온다 한들 이 적개심을 오래 남을 것이다. 모든 첫 경험은 아주 강렬한 법이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돌덩이는 호주에서만 일어난 일인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일인지 알 방법이 없다. 전기는 끊겼고 길 헤매다 주운 휴대폰은 켜지지도 않았다. 전기가 끊기니 TV나 컴퓨터를 켜고 정보를 확인할 수도 없다.
거리엔 시체가 없다. 지하실에서 시체가 사라지던 모습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연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실의 피는 시체들이 녹아 사라지고 남은 것 아닐까? 아직 한 구의 시체만 봤을 뿐이니 단정해선 안 된다. 시체가 남긴 유리 조각이 생각났다.
가죽 주머니에서 붉은 유리 조각을 꺼내 본다. 아름답다. 평소 보석엔 관심 없던 연규지만, 틈 날 때마다 꺼내 보게 된다. 이상한 매력을 가진 유리 조각이다. 다시 가죽 주머니에 고이 집어넣고 화장실로 향한다.
깨진 거울이 연규를 맞이한다. 그제야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옷은 넝마나 다름없다. 온몸에 굳은 피딱지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머리도 피떡이 묻어 산발 되어있다. 생소한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세면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돌렸다. 수압 상태가 썩 좋지 않다. 몇 차례 울컥울컥대더니 당장 끊겨도 이상할 게 없다는 듯이 졸졸 떨어진다.
아쉬운 맘에 졸졸 떨어지는 물을 대야로 받는다. 1L도 채 못 채우고 물이 끊겼다. 한숨이 나온다. 이 정도 물로 거지 몰골을 벗어날 순 없다. 아쉬운 맘에 고양이 세수를 한다. 땟국물이 시커멓게 흘러나온다.
"캬! 이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자신이 만들어낸 흔적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저 얼굴만 씻어냈을 뿐인데 받아둔 물이 시커멓다. 찝찝하긴 하지만 시커먼 물로 몸에 붙은 피딱지를 떨어트렸다. 완전히 말라붙었는지 떨어지는 피딱지가 따갑다. 오만상을 쓰며 피딱지를 떼낸다.
"짐승도 단장하는데, 난 이게 뭐냐…."
굳이 짐승과 비교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상처만 남은 비교였다. 피딱지를 모두 떨궈내니 받아둔 물이 말라버렸다.
연규가 울상을 짓고 집안을 둘러봤다. 먼지가 가득한 집이다. 집주인이 평소 청소를 안 했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자국이 남는다. 도대체 얼마나 청소를 안 하면 먼지 때문에 발자국이 남을까? 옷장을 열어봤다. 몇 벌의 옷가지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다. 주인의 독특한 성격이 드러났다. 방 청소는 안 하면서 옷은 가지런히 개어놓다니. 연규가 실소를 흘리며 옷가지를 들어 올렸다.
"와우!!"
캄탄이 절로 나온다. 족히 두 배는 될 듯 크다. 집주인의 건강상태가 심히 걱정된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겠지만…. 이미 모든 시체는 죽으면 녹아내린다고 확정 지은 연규였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이상 받아들이는 건 빨랐다.
연규는 상의를 탈의하고 집주인의 스웨트셔츠를 입었다. 밑단이 무릎 언저리를 겉돈다.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아 소매를 접어 올렸다. 너덜너덜한 바지도 갈아입고 싶지만, 도저히 입을 수가 없다. 겉옷으로 역시나 빅사이즈의 항공점퍼를 걸쳤다.
이렇게 통풍 잘되는 복장으로 돌아다니기에는 쌀쌀하다 못해 추웠지만, 어쩌겠는가. 집주인의 체형이 이런걸.
조금 더 둘러보자 전화기가 보였다. 혹시나 하고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져다 대보았지만, 역시나 신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분명 자신을 제외한 생존자가 있을 텐데, 통신망 하나 재건되지 않다니. 연규가 엄한 정부를 향해 구시렁거린다.
"하아…."
아쉬운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 아쉬운 생각을 할수록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애써 전화기에 미련을 버리고 다른 곳을 봤다.
옷장 옆에 놓인 가방들이 보인다. 그중에 튼튼해 보이는 더플백을 집어 들었다. 연규는 더플백 안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여러 장의 파일과 종이 쪼가리가 떨어진다. 문득 비대한 집주인의 생전 직업이 궁금해졌다. 방바닥에 떨어진 파일과 종이 쪼가리를 훑어봤다.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 그중에 알아볼 수 있는 글자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변이], [보상], [능력자], [위험]
"뭐지? 게임회사 직원이라도 되나?"
별다른 연관 없는 단어를 조합해서 나온 최선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연규가 손에든 종이쪼가리를 내던지고 빈 더플백을 챙겼다. 이번엔 먹을 만한 게 있나 주방을 살폈다. 주방을 보니 집주인의 큰 덩치가 이해된다. 딱히 식료품이 많다기보다는 일회용 식품들로 가득하다.
덕분에 한동안 먹을 것을 걱정하진 않아도 될 생각에 기분이 들뜬다. 기쁜 맘으로 슬쩍 열어 본 식품들은 심각했다. 죄다 곰팡이가 슬고 쉰내가 난다. 귀까지 걸렸던 입꼬리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간다.
무언가 다른 쓸만한 게 있나 뒤져봐도 건질만 한 게 보이지 않았다. 짧게 혀를 찬 연규는 편의점에서 구한 마른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집을 나섰다.
여전히 하늘은 붉다. 깨어나고 온종일 붉은 하늘과 무너진 건물을 보며 돌아다녔어도 적응이 안 된다. 마치 누군가 지산에게 스케일 커다란 몰래카메라를 하는 것 같은 기분. 변한 세상은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하루뿐이었지만, 최악의 하루였고, 앞으로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하루였다. 하지만…. 정말로 세상이 변한 게 사실이라면, 어제와 같은 일을 다시 겪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지하실의 일이 생각 날 때면 아직도 손끝이 떨려온다. 쇠붙이가 사람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감촉. 첫 살인의 기억은 끔찍했다.
한참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 이제는 죽어 사라진 지하실 사내의 유품인 쇠파이프로 가벼운 잔해를 치워가며 움직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대인 기억이 있지만, 사람이 그립다. 제대로 터놓고 얘길 나눌 사람이.
고요한 거리를 이동하다 보니 오만 잡생각이 든다. 마치 [나는 전설이다]에 주인공이 된 느낌이랄까?
"후후후."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처구니가 없어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그렇지만 전혀 즐겁지 않다. 그때 고요한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대로 규칙적인 소리.
-쉬익. 쿵. 쉭. 쿵.
연규는 황급히 자세를 낮추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움직였다. 무엇일까? 인위적이지만 규칙적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오른손에 든 쇠파이프에 힘이 들어간다. 사람일까? 무너진 담벼락에 몸을 숨긴 채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리의 근원이 보인다.
"캥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