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우 (3)
카터를 뒤따라 걷기를 한참. 리버풀에 도착했다. 현재로서는 어딜 가든 비슷하겠지만 이곳 역시 절반 이상이 무너진 건물이다. 자잘한 크레이터만 있을 뿐 거대한 크레이터는 없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이런 곳이라면 생존자가 많이 있지 않을까?
거처는 성당이었다. 거처로 들어가기 전, 근처에 있는 리버풀 병원에서 소독약을 챙겼다. 그리고 쇼핑몰에 들려 옷가지를 구했다.
연규도 너덜거리는 워커를 대신할 신발을 하나 챙겼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점은 카터가 여성복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 의문은 성당으로 들어가자 바로 해결되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각종 잔해더미로 막혀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바리케이드. 상당히 높게 쌓여있다.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자니 뾰족하게 튀어나온 잔해가 위험해 보였다. 한 사람의 힘으로 쌓아 올릴 수 없어 보인다.
잔해더미 아래 개구멍으로 조그맣게 만들어진 입구가 보였다. 기어들어 가야 할 정도로 작은 입구다.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 올 수 없는 구조다.
하지만, 이걸로 튼튼한 변이체를 막기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그들의 신체 능력이라면 바리케이드쯤은 부수며 들어올 수 있기 때문. 고로 바리케이드는 변이체가 아닌 다른 것에 대비해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연규는 그게 생존자일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한다.
현재 세상은 혼돈 그 자체다. 아직 처음 마주하는 생존자지만, 다른 이들까지 카터처럼 상냥하진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대부분이 절박한 상황에 이기적이고 악의로 똘똘 뭉쳐지겠지.
어떻게 보면 카터를 만난 건 연규의 일생일대의 행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본인만 해도 호텔 지하실에서 저 살고자 살인을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가장 절박한 상황에 본성이 나온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런데도 사회를 결성하고, 그 사회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모순된 존재.
카터가 먼저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연규도 주변을 살피고 황급히 뒤따라 들어갔다. 변이체가 많은 도심지에 홀로 서 있다는 건 상당한 부담이다.
낮은 포복으로 한참을 기어가야 성당이 나왔다. 바리케이드에서 나와 일어서자 카터를 제외한 3명의 사람이 보였다. 예상보다 적은 숫자에 놀랐다. 별 피해 없는 도심지에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사람이 고작 4명이라니. 그중 2명은 여성이다.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근력이 적은 여성이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편견이라기보다 왜소한 체구가 힘이 없다는 걸 말해준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성당 안에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됐다. 비록 비현실 같은 현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남성 2명이 만들기는 벅차 보이는 바리케이드니까.
적은 수라도 사람들을 보니 흥분과 긴장감이 적당히 섞여들었다.
그때 어깨에 본인의 상체만 한 까마귀를 달고 있는 작은 키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양쪽 뺨에 보조개가 매력적인 소녀다. 연규가 기분이 한껏 높아져 말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버풀에 오신 걸 환영해요. 서. 영. 구. 맞죠?"
소녀에게 다가가던 연규의 몸이 굳어졌다.
외국인들이 자신을 부를 때 흔하게 보이는 해프닝. 그보다 중요한 건 소녀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냐는 거다. 하늘이 붉어진 이후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사람은 카터뿐이다. 카터는 오는 내내 자신과 함께했다. 고로 소녀가 연규의 이름을 알 방법이 없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 들었다.
소녀도 연규의 변화를 느꼈는지 손바닥을 내밀며 말한다.
"아! 제가 영구를 놀라게 했나요? 걱정 마요. 저희는 당신을 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연규가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봤다. 무표정한 얼굴의 카터가 보인다. 다른 남녀도 표정 변화가 없는 모습이다. 닮은 데 하나 없는 세쌍둥이를 보는 기분이다. 어떠한 감정,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표정.
연규가 뒷걸음친다. 하지만 빠져나갈 곳이 마땅치 않다. 개구멍은 너무나 좁아 빠르게 빠져나갈 수 없다. 긴장감에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애써 기색을 감추기 위해 클리버 나이프를 번쩍 내밀며 외쳤다.
"무슨 개수작이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카터! 이러려고 날 데리고 왔냐?"
연규가 클리버 나이프를 허공에 휘두르며 위협했다. 소녀를 제외한 사람들은 연규의 위협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킬 뿐이다. 마치 인형처럼.
소녀가 한걸음 물러섰다.
"진정하세요, 영구. 다 설명해 드릴게요. 진정해요."
"진정은 무슨! 그럼 내가, 씨발. 이 상황에 진정하게 생겼어? 뭘 어쩌려고 날 데려온 거야!"
어찌나 흥분했는지 한국 욕이 튀어나왔다. 연규의 고함에 놀란 까마귀가 날아올라 울음을 내뱉는다.
-까악. 까악.
소녀는 여전히 손바닥을 보인 상태로 물러났던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진정해요, 영구. 우린 결단코 당신을 해할 생각 없어요. 아 참. 제 소개를 먼저 해야겠네요. 제 이름은 에스더. 에스더라고 해요."
"에스더? 씨발! 그딴 거보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잖아!"
"제 능력으로 알 수 있었어요. 영구는 이벤트 호라이즌 이후 꿈을 꾼 적이 없나요?"
"이벤트 호라이즌? 그게 뭔데! 꿈이랑 무슨 상관이야!"
이벤트 호라이즌이 무엇을 칭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꿈은 꾼 적이 있다. 괴물 캥거루와 싸움이 있던 날. 아주 지독한 악몽이었다. 눈앞에서 부모님이 조각나는 장면을 맨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소녀가 아픈 기억을 들춰낸다. 가증스럽게도 꿈을 말하자 얼굴이 환해진다.
"꿈을 꾼 적이 있군요! 다 설명할 테니 일단 칼 좀 거둬주세요. 불안해서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고민된다. 확실히 소녀는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일어나 보니 알 수 없는 일들이 천지인 이 세상이다. 홀로 돌아다닌 자신이 뭔가 안다면 얼마나 알까.
소녀의 말이 모두 진심일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한편으로 걱정도 든다.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건 어떠한 의도나 이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카터 정도의 능력이라면 연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시체가 되었을 거다. 죽일 의도가 있다면 진작에 죽였을 거란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이들의 속셈을 알 방법이 없다.
"날 데려온 이유를 말해."
연규는 직진했다.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골머리 싸며 심적 소모를 늘릴 바에 정면 승부를 보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장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주변에 서 있는 3명과는 다르게 표정이 풍부한 소녀다.
"궁금하지 않아요? 이벤트 호라이즌, 꿈, 스칼렛쿼츠, 변이체, 능력…. 이런 것들. 영구를 데려온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제 이상형이랑 닮았거든요. 뭐, 조금 어려진 이상형이긴 하지만. 그리고 당신, 여기가 아니면 딱히 갈 데가 없지 않아요? 카터를 통해 본 거로는 생존자를 처음 만난 거 같은데? 후후후. 누나가 이뻐해 줄게요."
소녀가 입술을 내밀며 찡긋거린다. 본색을 드러낸 소녀의 의도는 매우 불순했다.
연규가 클리버 나이프를 고쳐잡으며 생각했다.
소녀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나쁠 건 없다. 변해버린 세상에서 정보는 엄청난 비중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곳을 박차고 나간다 한들 어슬렁거리는 변이체로부터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연규의 최우선 목표는 가족들의 생사 확인이다. 악몽이 보여준 처참한 광경이 그리움이라는 집착을 만들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다.
보다 많은 정보를 얻고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했다. 소녀는 어떨지 몰라도 카터의 전투 능력은 대단했으니까. 적어도 객사 당할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이 갔다.
그렇다고 마냥 숙이고 들어가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의 가치를 낮춰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의 행동으로 정해지는 법이다. 내가 어려운 사람이다. 이런저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표현하지 않는 이상 타인이 알 방법이 없다.
중간에 카터를 통해 봤다는 건 능력이라는 걸 사용한 걸까? 능력이라….
순간 괴물 캥거루와의 전투가 기억났다. 시간이 느려지는 마법 같은 상황. 어째서인지 시간이 느려지는 능력은 다시 발동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의도대로 느려지던 시간이었다. 소녀와 함께한다면 능력의 사용법 또한 알 수 있지 않을까.
"영구, 제발…."
소녀의 발음이 골똘히 고민하던 연규의 상념을 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거슬리던 참이다.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된다면 저 발음을 고쳐놔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영구, 영구거리지 마! 내 이름은 연규야!"
-까악.
머릿속에 든 생각이 필터링조차 되지 않고 튀어나왔다. 소녀의 어깨를 탈출한 까마귀의 울음만이 정적 속에 울렸다. 존재 가치를 증명해도 모자랄 판에 되지도 않는 말을 하며 성내버렸다.
연규가 자괴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소녀가 휘파람을 분다.
"엘런 이리 와!"
엘런이라 불린 까마귀가 소녀의 말에 대답하듯 까악거린다. 그리고 연규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머리 위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져 빈손을 허우적댔다. 엘런이 연규의 손짓을 가볍게 피하며 머리 위를 떠나지 않는다.
소녀가 피식 웃는다. 포동포동한 볼에 보조개를 깊게 패며 말한다.
"엘런도 영구가 좋은가 봐요. 아! 여, 영구… 너무 어려운 발음이에요. 그냥 영구로 개명하는 건 어때요?"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다가와 불쑥 손을 내민다.
쭉 뻗어 내민 손이 겨우 연규의 머리끝을 가리킨다. 150cm 중반 정도. 이제 16세쯤 되었으려나?
뭐 하는 건가 싶어 약간 뒷걸음칠 찰나에 머리 위 묵직한 무게가 앞으로 기운다. 엘런이 소녀가 내민 손을 부리로 받았다. 푸드득거리며 중심을 잡은 엘런은 연규의 머리 위를 떠나지 않았다.
목에 디스크가 걸릴 지경이다.
연규가 어정쩡한 경계를 계속하자 소녀가 한숨을 내쉰다.
"영구, 다리 다쳤죠?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제대로 된 치료 먼저 하고 얘기해요."
"내가 뭘 믿고 거길 들어가!"
"못 믿을 건 또 뭔데요? 어서 오세요. 서로 할 게 많은데 밤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고요."
소녀가 뒤돌아 걷는다. 소녀의 뒤를 따라 카터와 2명의 남녀가 따라 움직인다. 그들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지금 당장 어떤 위화감에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성당으로 들어갔다. 공터에 홀로 남은 연규는 손에 든 클리버 나이프를 맥없이 내려놨다.
무언가 된통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연규가 분한 마음에 소리쳤다.
"내 이름은 서. 연. 규. 라고!!"
"그래요, 서. 영. 구."
성당 안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대답하는 에스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