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꺠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고 식은땀이 흘렀다.
"저...일..세요.."
응? 뭐라는 거야.. 난 천국에 있다고..이제 날 좀 내버려둬..
"좀 일어나 보세요!"
"시끄러.."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예?'
"아, 자꾸 누군데. . "
그만 말을 하다 목이 막혀 버렸다.
힘들게 눈을 뜨니 다나와 에마가 걱정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했잖아요!, 아가씨.. 흑.."
에마가 훌쩍이는 다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막 식은땀 흘리시고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셨어요..
찬물 좀 갔다 드릴까요?"
"..다나?, 에마?
..너희 살아있었어? ....아..나는 살아있어?"
두 하녀의 눈이 황당함으로 흔들렸다.
"아, 아무래도 아직 정신이 안 돌아오셨나봐요..제가 얼른 물 갔다 드릴게요..:
..다나, 아가씨 좀 닦아드리고 있어"
"네..!"
뭐..뭐지
나..죽은 거 아니었어?
아이리스는 한때 부유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몰락하고 남편에게도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마을 내에 돌았다.
부유하고 잘 나가던 집안이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 치듯 무너져내렸으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아이리스는 이혼했는데도 자꾸 찾아와 남은 전재산을 제 수중에 넣으려는 매튜와 검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후후..이제 그만 순순히 금고를 내놓으시지..?"
매튜가 입꼬리에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왜..! ..너 같은 거한테 내 돈을 줘야 하지?
절대 그럴 순 없어..그러니까 포기하고 나가라고..그만 꺼져버리라고!"
"하..그래..?
이건 니가 자초지종한 일이야.."
순간 여태껏 막은 검과는 달리 빠르게 아이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막지 못하고 아이리스의 가슴에 칼이 꽃혓다.
"콜록! 콜록..크읏.."
하지만 매튜는 바닥에 침을 탁 뱉고 나갈 뿐이었다.
피가 번지는 가슴 부위를 손으로 움켜쥐고 흐느꼈다.
그대로 주저앉아 스쳐가듯 과거를 회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이라도 제대로 익혀 둘걸..
그를 위한 삶을 살지 말걸..
..나만을 위해 했던 게 뭐가 있지..?
"하하하..."
마지막 숨결이 맴돌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으음..."
"아가씨..아가씨!"
힘겹게 눈을 뜨려고 하자 흰자위만 보였다.
"다나.., 의사를 불러야 할 것 같.."
"아냐..난 괜찮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하, 하지만 열이 높은데.."
침대 옆에서 다나가 아이리스의 손을 꼭 잡은 채 웅얼거렸다.
"아냐..에마, 나 얼마나 잔 거니?"
"4일은 계속 누워계셨어요..의사도 몇 번 왔다갔고요."
꼬박 4일동안 않아 누워서 악몽을 꾼 건가..
내가 겪었던 일들이 다 꿈이란 건가..
짐이 가난해지고 매튜가 날 배신하고 죽인 것도 전부..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대체 어느 게 현실인 건지?
만약 이게 꿈이라면 다시는 깨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영원히 갇혀 살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속을 지배했다.
"에마, 오늘이 몇 일이야?"
"네? 아, 오늘은 5월 15일인데.."
달력을 보니 놀랍게도 8년 전이었다.
8년전..? 5월 15일이 무슨 날이었지?
갑자기 가벼운 노키소리가 들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오..! 아가씨, 드디어 일어나셨군요..이걸 보십쇼."
낯 익은 연갈색 눈동자..
집사 윌리엄, 이렇게 반가운 얼굴들이 나타나는데 꿈이라도 아무렴 어떨까..
멍한 표정으로 윌리엄이 내미는 편지봉투를 받았다.
"이건.."
아카데미에서 기사단장이 보낸 편지였다.
'제 56회 검술대회가 열립니다.
평소 검에 관심이 있거나 검술이 능한 학생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 볼 좋은 시험입니다.
시험날짜:한 달 후, 이카데미 본관'
8년전쯤, 아카데미에서 그녀는 성적도 우수하고 검실력도 나쁘지 않아 시험을 치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뭐에요, 아가씨?"
다나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나!, 이리와."
에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힝..어머, 아니..!세상에..!
아가씨, 기사단입학 시험이 벌써 코앞이라고..읍..!"
에마가 손으로 다나의 입을 막고 끌고 나갔다.
그 모습에 모처럼 기문좋은 한숨소리가 나왔다.
윌리엄도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생기자 턱을 괴고, 이맛살을 찌뿌렸다.
그래, 이 날은 내가 시험치르기를 거부한 날이었다.
기사단에 입학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시험이였지만 그 때의 아이리스는 매튜와 데이트 하기에 바빴다.
매튜의 사탕발림에 홀딱 반해 속고 살아왔다니..그는 그저 내 재산이 탐나서 그랬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
아니다..실은 투명한 그의 눈빛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안함이 경고를 울렸지만 애써 무시해왔다.
처음으로 매튜와 싸우기 전 날, 파티장에서 다른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것을 본 나는 이미 짐작은 했지만.., 너무 큰 충격에 한 번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래..이게 어자피 꿈이건 환생을 했던..난 절대 남의 인생에 끼여들지 않을 거야..그 누구와도 말이지.
오늘따라 아쳄에 저택 안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이런 편안한 느낌..
거울 앞에 비춰진 제 모습은 보고 깜짝 놀랐다.
축 처진 피부에 잠을 못 자서 생긴 퉁퉁 부은 눈덩이는 없고 뽀얗고 탱탱한 피부에 은발은 흘러 넘치게 길고 윤기가 흘렀다.
선홍색 눈은 선명한 피색깔처럼 빨갛게 반짝였다.
생기를 잃지 않은 빨간 입술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거 좋은데..?
생각지 못한 이득이였다.
아아...아니지.., 난 기사가 될 생각인데..굳이 필요 없으려나..
중요한 건 마나인데..
"아가씨, 이 머리카락은 절대 자르시면 안 돼요! 절대!
아..너무 예뻐요..!"
생각에 빠져 인형처럼 앉아 있다가 우렁찬 다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다나가 빗으로 잘 정돈 된 머리를 또 쓸었다.
"저기..다나..?"
'네?"
"나..늦겠어.."
내가 곤란해하며 묻자 퍼뜩 생각난 듯 다나가 쩔쩔맸다.
"아..,죄송해요..빨리 마저 해드릴게요"
다나는 묵묵히 치장을 마치고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배웅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다나, 계속 그렇게 풀 죽어있을거야?
내가 이따가 선물 사오려고 했는데..?"
"아가씨.., 정말요?"
"응"
"아, 아니에요..저 같은 게 어떻게.."
"그럼 안 받을 거야? 에마도 줄 생각인데.."
짐짓 서운한 말투로 묻자 다나가 볼이 발그레지며 웃었다.
"아, 아녜요..주신다면 감사해요, 아가씨.."
"갔다 올게!"
급히 마차를 출발시키고 도착한 곳은 수련관이었다.
시험일이 한 달밖에 안 남은 지라, 검은 계속 수련을 거듭해 나는 성과였으니, 시간이 없었다.
간편한 기사복장을입은 그녀는 잘 어울리면서 남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숨겨진 그녀의 재능을 아는 사람을 환생 전에도 없었다.
검을 쥐어 본 적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해보지 않고 묵혀두면 점점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죽고 후회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검을 쥔 감각이 새로웠다.
언젠가 몰락할 가문을 일으킬 때 지금 이것이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족히 일주일은 검 연습을 했다.
때로는 같이 수련하러 온 사람들과 대련을 하기도 하였다.
저택으로 돌아올 때변 녹초가 되어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다나는 몇 일 전에 준 루비가 박혀있는 머리핀을 자랑하고 다니며 기뻐했다.
그래, 그거면 됐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웃는다면..
피곤한 몸이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따뜻한 물에 사르르 녹았다.
조근조근 말하는 다나가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잠이 들었을 것이다.
시험일로부터 12일이 남았다.
아이리스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련관을 오갔다.
그만큼 아이리스의 검 실력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게 부담스러워 일부러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귀한 여식인 것 같은데 검술을 눙숙하게 다루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신선했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은발머리는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