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필버트 공작이 기다리신 답니다. 어찌할까요?"
후우
"곧 간다고 전하시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들어 부쩍 피곤에 쌓였다.
황제에 올라가고 나서부터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물론 한 나라의 황제가 하는 일은 중요한 약속도 많고 혼자서는 힘에 부칠만큼 큰 일이 있기 마련이지만 가식에 가면뿐인 여자들과 교묘하고 언제 등을 돌려 배신을 할지 모르는 가신들을 볼때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번 건국제 검술대회에서는 저도 참여하기로 한지라 서둘러야했다.
시합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이를 악물고 검술연습을 했다.
단순히 검을 50번 휘두르는 것도 힘에 부쳤다.
마나를 쓰지 않아서인지, 아직 단련되지 않은 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것이라는..
수돗가에 가 목을 축이고 세수를 여러 번 하니 좀 살 것 같았다.
이마에 흐르는 물을 손으로 문질러 닦을 때였다.
"아이리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완전히 보기도 전에 상큼한 레몬 빛깔의 노란 머리카락이 덮쳤다.
"아이리스, 보고 싶었어
여태껏 뭐 하고 지낸 거야?"
"애, 앨런 베네딕트?"
어색하게 먼 친척의 이름을 불렀다.
앨런이 몸을 떼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리스,너무한 거 아니야?
그새 못 봤다고 왜 이렇게 어색하게 불러? 다시 불러봐."
"앨런.."
짐짓 억압적인 목소리에 다시 불렀다.
그러자 비죽 웃으면서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저기..앨런, 보는 눈이 많은데..그만 놔.."
"싫은데?"
이익..
그러더니 가까이서 눈을 마주쳤다.
황금빛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슬쩍 피하자 앨런의 고운 미간이 잠깐 찡그려졌다.
마지막으로 사촌을 본 건 언제였더라?
워낙 먼 친척이라 별로 볼 기회도 없었지만 어렸을 땐 다른 사촌들과 한 번 모이면 같이 잘 어울려 놀았었다.
그런데 왜 앨런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걸까?
과거에 이런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한창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낮고 싸늘한 목소리가 방해했다.
"여기가 연애하는 데이트장소인 줄 아나?
그리고 싫다고 하면 놔줘야 할 것 아닌가."
나는 갑작스레 나타난 하늘빛 머리카락에 하얀 제복을 입고 있는 황제에게서 시선을 뺏겼다.
그러다 아차하며 어느새 멀리 떨어져 있는 앨런을 따라 인사를 올렸다.
"프리지아 제 1국 황제폐하께 예를 갖춥니다.."
황제가 땀 냄새 풍기는 이런 곳엔 왜 온 걸까?
두 사람의 생각이 하나로 통했다.
"그대들도 기사로서 수련을 하러 온 것인가"
"예.."
딱딱하게 내뱉고 아이리스를 잠시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 로라 멜리사..그대는 검술시합 때 나와 대련상대가 될 것이니 열심히 해 보도록.
..그럼 이만"
아이리스가 뒤돌아 저벅저벅 걸어 사라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멀뚱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