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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류하 시리즈
작가 : 루날
작품등록일 : 20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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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소녀와 홍차는 어울리지 않는다
작성일 : 17-07-09     조회 : 27     추천 : 0     분량 : 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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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매일 아침마다 욕을 거르는 날이 없다. 눈을 뜨기도 전에 입에서 상소리부터 튀어나왔다.

 

 

 대가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니다, 이미 반쯤 깨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제 얼마나 술을 처 퍼마신 거야? 일어나려하자마자 두통과 함께 현기증, 구역질이 복합으로 몰려왔다.

 

 

 일어나다가 머리를 모서리에 부딪혔다. 아파서 뒷걸음질치다가 또 뒤통수를 벽에다가 부딪혔다. 세상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가까스로 변기를 붙잡고 속에서 뭔가를 게워냈다. 보통 토사물이 아니라 누리끼리하고 희여멀건 뭔가 이상한 게 튀어나왔다. 쓸개즙인가?

 

 

 여기가 화장실이라는 걸 깨닫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잠깐만, 왜 내가 멀쩡한 침대 내버려두고 화장실에서 자고 있었던 거야? 필름이 끊어져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바라건대 제발 얌전히 있었기를.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빠져나오다 권총이 발에 채여서 깜짝 놀랐다. 총 이름이 토카레프랬나, 인터넷에 쳐 봤더니 안전장치도 안 달린 권총이랬다. 소중히 다뤄야 한다. 가끔 막 다루다 실수로 몸에 총알을 맞는 상황을 매번 상상하고는 하는데, 한 방에 가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상한 데 맞아서 죽지도 못하고 불구가 되면 어쩌나 생각한다.

 

 

 원래는 오빠 총이었는데. 대체 오빠는 이런 권총을 어떻게 관리한 걸까? 분명히 안전하게 다루는 방법이 있을 텐데,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오는 자료는 영 미덥지 않은데다 총알이 세 발밖에 없는 게 아까워서 어쩔 수도 없었다.

 

 

 그나마 생각해 낸 방법이 탄창을 비워놓는 방법이었는데, 분명히 탄창을 빼 놓은 상태였는데도 총알이 나가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미리 장전된 총알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총알이 네 발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확실히 세 발밖에 남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 반이었다. 열 시까지 방을 빼야한다. 정말 대체 얼마나 퍼 마신 거야? 망했다. 지금 당장 총을 장전해서 머리에다 대고 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열 시가 되면 분명 집주인이 쳐들어올테니 그 전에 챙길 거 다 챙겨서 빠져나가야 한다. 뭘 챙기지. 일단 트렁크 가방부터 열었다. 일단 평소에 입던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권총은 당연히 챙기고. 이제 뭘 챙겨야 하지?

 

 

 이런 저런 쓸모없는 것을 뒤지는 데 오 분이나 지났다. 변기 주변에 흩뿌려진 토사물들은 주인아줌마가 보면 욕하겠지만 지금 이걸 치우고 방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몰래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나마 옷들은 다 멀쩡해서 다행이다. 물론 술에 쩐 내에다 토사물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짜 눈 딱 감고 입을 수는 있는 수준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 샤워는커녕 머리조차 감지 않았다. 완전 떡졌군. 나는 거울을 보며 대충 머리를 묶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제대로 묶이질 않았다. 까치집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급하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벽 한 쪽에 세워 놓은 베이스 기타 케이스를 쳐다보았다. 먼지가 팍 쌓여 몇 달 째 건드리지도 않은 티가 났다. 안에는 워윅 사의 베이스 기타가 들어있다.

 

 

 꽤 아끼는 베이스 기타였다. 사실, 십 만원에 중고로 건진 베이스 기타를 오래 쓰다가 생활비를 잘라가며 겨우 모은 돈으로 산 베이스였기 때문이다. 돈 값을 톡톡히 하는 베이스였다. 무게감이 큰 베이스였다. 음색이나, 실제 악기 무게나, 여러모로.

 

 

 한창 잘 나갈 때는 워윅 들고 다니는 여자애 하면 다 알아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이제는 부산 밴드 씬에서 그 애는 ‘언급해서는 안되는 그 애’가 되었다.

 

 

 그래서, 이걸 버려야 하느냐 마느냐인데.

 

 

 저걸 팔아서 돈으로 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다가 지금은 그런 고민조차 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별 수가 없었다. 버리고 가는 수밖에는. 좋아.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저 베이스도 과거와 함께 청산해버려야지.

 

 

 정말 버려야 하나?

 

 

 진짜로?

 

 

 저게 얼마짜린데?

 

 

 

 

 10억이 없다는 걸 들킨 이유를 깨달았다.

 

 

 

 

 베이스 가방을 들쳐 매고, 후드를 덮어쓰고 트렁크를 질질 끌며 방을 나왔다. 최대한 주인 아줌마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나왔다. 전출신고야 아줌마가 알아서 하던가 말던가 하겠지. 어차피 나는 그 인간 앞에서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층간소음의 원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솔직히 내 잘못이긴 하지. 그 좁은 방에서 앰프 켜놓고 베이스 연습 한다고 쳐댔으니. 그래도 요샌 조용히 지냈는데도 한 번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는지 아직도 눈을 부라린다.

 

 

 대학가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사람들이 다들 바쁘게 움직인다. 학교에 올라가는 학생들, 오픈을 준비하는 가게들. 나는 최대한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마주하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고개를 숙인 채 헤드폰을 끼고 걷는다. 비록 베이스를 매고 걷는 중이긴 하지만, 밴드 음악을 틀고 싶지는 않았다. 밴드 음악을 생각할 때마다 밴드 씬에서의 그 트라우마가 여전히 지독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최근엔 힙합을 들었다. 아는 래퍼는 별로 없다. 그나마 최근에 켄드릭 라마라는 래퍼가 좀 잘 팔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확실히 그래도 밴드 음악보다는 들을 만 했다. 트라우마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늘은 구름이 끼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건물들은 죄다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고. 칙칙해서 딱 좋다.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보호색과 같은 느낌이었다. 눈에 안 띄는, 회색 표면에 떨어진 먼지가 된 느낌. 그런 하찮아진 느낌이 나는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자존심이 없는 데에서 자존감을 느끼는 걸까.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지금 당장 딱히 갈 곳은 없으니 한현의 사무실로 가면 되겠지. 한현의 사무실은 서면에 있었다. 지하철을 타면 금방이다.

 

 

 핸드폰 가게에서 틀어놓은 커다란 음악 소리가 내 헤드폰에서 나오는 래퍼의 라임을 무너뜨렸다. 게다가 소리가 지나치게 큰 나머지 겨우 가라앉힌 숙취마저 다시 올라올 지경이었다. 젠장. 맨날 쓸데없이 싸구려 앰프에다가 볼륨만 더럽게 높여서 음악을 틀어놓는 가게들은 항상 핸드폰 가게인 걸까. 양심도 없는 녀석들이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일정 데시벨 이상 소리를 내는 가게들은 법적으로 처벌하는 법안 같은 걸 내면 안되는 걸까. 내 귀는 굉장히 예민하다. 그리고 숙취 때문에 더욱 더 예민해져 있다.

 

 

 에잇. 내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양심도 없이 볼륨을 처 키워놓은 알바생인지 사장인지의 잘못인 것이다. 나는 핸드폰 가게의 커다란 앰프를 발로 깠다. 바퀴가 달린 앰프는 미끄러지더니 전선이 끊어졌다. 전선이 끊어진 반동으로 앰프가 넘어졌다. 소리는 멈췄다. 누가 반응할 새도 없이 나는 아무 짓도 안한 척 태연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이지만, 노포역에서 교대역 사이는 지상을 지난다. 지하철 창문 너머로 금정구, 동래구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흐린 하늘 아래 콘크리트 빌딩이 서 있는 모습이 삭막하기 그지없다. 콘크리트 건물이라고 해도 색은 입혀져 있지만, 흐린 하늘 아래서 그 모습은 그저 빛바래고 촌스러운 무언가로 보일 뻔이다. 마치 어릴 적의 꿈이나 로망 같은 기분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지하로 들어가고, 어둠만이 남는다. 죽음. 그 한 순간이 죽음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념을 깨버리듯 객실 안에서 누군가 쪽지를 돌린다. 돈을 구걸하는 거지다. 아침부터 앵벌이라니, 거지마저 부지런하구나.

 

 

 갑자기 서면역에 내리니 방향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네 더듬이는 어디 있어, 네가 말하는 방향감각은 어디 있는데?1) 출구를 헷갈리고 있었다. 근래 서면에 자주 온 적이 없으니 지하상가다, 2호선 쪽 출구다 복잡하다. 어제 와 놓고도 길을 잃고 헤메고 있는 꼴이라니.

 

 

 지하철역을 나서서도 한참을 헤메다 겨우 한현의 사무실을 찾았다.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요약해보자. 아홉시 반에 술에 쩔어서 일어나서 당장 머리도 안 감고 다 해진 후드 집업 입고, 여기저기 헤매느라 땀 흘려가며 체력을 다 빼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차마 멀쩡한 사람의 모습은 아닐 것 같다. 게다가 커다란 베이스까지 들고 있어. 혹시 이 사람 악기 연주하면서 구걸하는 사람인가?

 

 

 “꼴이 왜 그래요?”

 

 

 “신경 끄세요.”

 

 

 한현이 내 모습을 보자마자 눈치를 주었다. 내가 봐도 완전히 엉망인 게 맞기는 한데, 정작 다른 사람한테 지적을 당하니까 기분이 나빠졌다.

 

 

 “혹시 씻으려면 사무실 화장실 한에 샤워기 있어요.”

 

 

 “아뇨, 됐어요. 민폐잖아요.”

 

 

 민폐는 이만하면 됐다. 나도 양심은 있다.

 

 

 “그 꼴로 가만히 있는 게 더 민폐 같은데.”

 

 

 어쩌라는거야. 나는 별 생각 않고 소파에 누웠다. 한현은 홍차를 타고 있었다. 홍차를 만드는 과정이 이렇게 복잡했나? 한현은 먼저 한 쪽에는 홍차 잎을 우렸다. 다른 한 쪽에서는 우유를 끓여, 거품기로 거품을 냈다. 그리고 우리던 홍차를 따라내고, 설탕을 탄 다음 그 위에 거품 낸 우유를 붓는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나는 말없이 한현의 손을 감상했다. 사람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보기 좋다. 손이 곱든, 아니면 울퉁불퉁한 손이든. 한현의 손은 고운 축에 속했다. 그럼에도 직업상 탐정답게 다부진 면이 있었다.

 

 

 제길. 왜 내가 손 따위에 집중하고 있는 거지. 직업병이다. 밴드에서 악기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손에 페티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홍차 타는 거 원래 그렇게 복잡한 건가요?”

 

 

 “아니, 그냥 이 홍차가 특별할 뿐.”

 

 

 “홍차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런던 포그.”

 

 

 런던 포그라. 어제 마셨던 거였지, 아마?

 

 

 “왜 이름이 런던 포그에요?”

 

 

 “글쎄, 맛이 스모그같아서 그럴 걸요?”

 

 

 “맛에다가 스모그라는 말은 좀 더럽잖아요. 그 전에, 진짜 그게 단가요? 뭔가 역사적인 거 없어요?”

 

 

 “위키 찾아봐도 안 나오더라고.”

 

 

 “실체가 없네요.”

 

 

 한현은 런던 포그를 유리 잔에 담아 내밀었다. 어제는 머그컵에 담아 주더니. 런던 포그 특유의 희여멀건 모습이 더더욱 잘 보였다. 베이지 색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하얀 색으로. 거품이 가득하고 희미하다. 그 맛은 또 기가 막힌다. 우유의 포근함과 거품의 희미함 사이로 홍차의 향기와 단 맛이 파고든다.

 

 

 마치 추웠다 이유 없이 따뜻했다를 반복하는 요새 날씨 같다. 겨울이면서도 겨울 아닌 듯한.

 

 

 “고마워요.”

 

 

 “별 말씀을. 어제랑은 달리 덥썩덥썩 잘 받아 드시네요.”

 

 

 그러고 보니까 어젠 이런 저런 의심 다 하고 마셨지. 윽. 하고 뭔가가 속에서 찔렸다.

 

 

 “신경 꺼요. 사람이 왔다갔다 하니까 사람이죠.”

 

 

 “밥은 드셨습니까.”

 

 

 한현과 눈이 마주쳤다. 사소한 눈싸움 와중에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애써 아무 소리도 안 난 척,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했다.

 

 

 “먹었어요.”

 

 

 거짓말. 한현은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쿠키 있는데 간식은 어떤가요?”

 

 

 “죄송해요. 지금은 단 게 안 땡기네요.”

 

 

 “런던 포그도 충분히 단 것 같은데.”

 

 

 “지금 사람 심문해요?”

 

 

 “워워, 안 건드릴게요.”

 

 

 한현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마저도 괜히 짜증이 났다. 어쩌라고. 나는 CD라도 틀기 위해 CD 진열장을 뒤졌다. 여전히 죄다 재즈 아니면 록뿐이었다. 그나마 올해 나온 고릴라즈 새 앨범이 있어서 그걸 집어넣었다. 애들은 록인지 힙합인지 애매하니까. 그러면 배경음악도 깔았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결정했어요?”

 

 

 “뭘?”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참 능청스럽기가 그지없다.

 

 

 “복수를 도울지, 아니면 제 유서 쓰는 거 도와주실지.”

 

 

 “아, 까먹고 있었군.”

 

 

 한현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차를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뭐, 제가 당신 복수를 도와줘봤자 저한테 돌아올 건 하나도 없겠죠.”

 

 

 “그럼 이걸로 끝인가요?”

 

 

 “성격 한번 급하시네, 문제는 당신이지.”

 

 

 나는 일어서려다가 도로 앉았다. 한현도 초콜릿 쿠키를 들고와 자리에 앉았다. 아까 분명히 쿠키 안 먹는다고 했는데도. 그런데 그 말을 한 나도 배가 고프다. 결국 나는 쿠키에 손을 내밀었다.

 

 

 “이 복수가 끝나면, 당신은 어떻게 할 예정이죠?”

 

 

 “어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에 쿠키가 잔뜩 들어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추태를 보였다. 차 한 잔으로, 입을 비우며 생각했다. 이 복수가 끝나면 무엇을 한다, 라니.

 

 

 당연히 그런 건 생각해두지 않았다. 그냥 정말로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마지못해 고른 거니까. 그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복수가 끝난다면, 다시 술을 퍼 마시고 손목을 긋는 나날의 반복으로 돌아가야 하나?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해둔 것이 없었다. 당장이 깜깜했다. 나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나 보군요.”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정말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나보다도 한현이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건가? 의미를 도통 알 수가 없는 한숨이었다.

 

 

 “일단 조건은 이렇게 하죠. 첫 번째, 복수를 하는 도중에는 여기 사무실에 머물러요. 뭐, 호텔이나 다른 방 구할 수 있으면 그래도 상관 없는데, 어차피 구할 돈도 없죠?”

 

 

 “재수 없는 말투로 말하지 마세요.”

 

 

 “그럼 말 놓을까요?”

 

 

 “좋아, 놓죠. 그러면. 놓아.”

 

 

 말을 놓으면 뭔가 쓸데없이 친해지는 기분이 느껴져서 짜증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근데 그건 조건이라긴 그런데요.”

 

 

 앗차, 방금 말을 놓기로 해놓고는 존댓말을 써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현은 딱히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뭐, 요컨대 복수 하는 동안에는 내 사무실에서 잘 먹고 잘 지내라는 거지. 지금 같은 꼴로 있지 말고.”

 

 

 “그, 그렇구나.”

 

 

 분명히 말을 놓자고 한 건 난데 오히려 이쪽이 부담스러웠다. 대체 왜? 어째서?

 

 

 “좋아요, 좋아.” 나는 존댓말에 관한 건 포기했다. “나머지는요?”

 

 

 “간단해. 이 복수가 끝나면, 일상생활로 돌아가. 모자라는 게 있으면 지원해줄테니까.”

 

 

 일상이라. 런던포그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 맛이 참 희미해서 안개 같다. 내게 일상이라는 게 있기나 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상으로 돌아가라니.

 

 

 자, 첫 번째로 생각해보자. 실패한 교우관계. 학교를 다닌 지 몇 년이 되어가는데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고, 그렇다고 성적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창창한 미래 같은 건 다른 녀석들에게 밀려 경쟁 사슬의 맨 밑바닥으로 추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다시 입 안에서 흩어지는 런던 포그를 한 모금. 밴드 생활. 그래, 그건 재미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픈 추억이다. 어떤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완전히 밴드 씬에서 쫓겨났다. 그 누구도 받아줄 데가 없다. 어떤 밴드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그런 곳을 돌아갈 곳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남는 건, 정말로, 자기 파괴의 반복. 매일 술을 마시고, 손목을 그으려다가 차마 긋지 못하고 대신 손등이나 팔을 그으며 살아있는 걸 저주하고, 저주하다가 숙취와 함께 아침을 맞는 일상.

 

 

 그것도 일상인가?

 

 

 돌아가야 할 곳이 없다. 그래서 매달린 복수다. 그런데 한현은 내게 복수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다.

 

 

 이 사내가 하는 말이 어이가 없다.

 

 

 “아저씨는 참 팔자가 좋으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네요.”

 

 

 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더 해보라는 거지. 제기랄.

 

 

 “이봐요, 당신이 일상이라고 부르는 건 나한테는 매일 술이나 마시고 손목이나 긋는 거에요. 당신은 나보고 그런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건가요?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꼰대질이죠?”

 

 

 한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이 재수없었다. 당장 찢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 새끼가 커서 된 게 나다.”

 

 

 한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배 위에서 태어난 꼬맹이를 아냐? 원양어선에 부모도 없이 꼬맹이 하나가 타고 있었던 거지. 내가 일곱 살까지 한 건 새우잡이였고, 조폭에 들어간 건 겨우 열 살이 조금 넘어서였어.”

 

 

 한현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거기를 박차고 뛰어나왔지. 환멸이 느껴져서. 그리고 한 게 뭔지 아냐? 매일 술을 처먹는 거야. 술을 처먹다 쓸개즙을 토하고도 또 처먹는 거지. 돈도 없어, 할 일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 매일매일 술이나 처먹는 살아있는 시체였지.”

 

 

 누군가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다. 한현은 차를 들이마셨다. 그는 찻잔을 금세 비웠다. 차를 더 타오는 대신, 그는 빈 잔을 가지고 놀았다.

 

 

 “뭐,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대학 나오고, 적당히 직장 취직하고, 잘 먹고, 잘 살고’는 우리에게 무리수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그냥 먹고 살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왜냐면 내가 해봤으니까. 적어도 술 먹고 손목은 안 긋는 상태로 가보자고. 뭐, 여전히 꼰대질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한현의 과거 내력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가 조금이나마 비춰 준 희망 때문이었다. 터널의 끝에 비치는 빛. 하지만 그 빛으로 마냥 손을 뻗기는 망설여졌다. 그 희망이 오히려 날 더 밑바닥으로 잡아끄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씹던 쿠키를 삼키고 내가 물었다.

 

 

 “하나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그럼 날 갱생시켜서 당신이 얻는 건 뭐죠?”

 

 

 “그냥, 수많은 죄책감 중에서 하나를 더는 거지.”

 

 

 “이해가 되게 말해주실래요.”

 

 

 “단순히 네가 시하 동생이기 때문이야.”

 

 

 짜증나. 계획대로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원수는 갚을 수 있게 되었는데 내 의지가 아니라 오빠의 이름이 날 좌지우지하는 기분 때문일까. 나는 여기에 없어도 되는 사람 같아서 화가 났다.

 

 

 아직 런던 포그는 반이나 남았지만, 우유 거품은 거의 다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나는 거품우유가 서서히 사그라드는 걸 지켜보았다. 걷혀지는 안개. 정말로 괜찮은 미래를 상상해도 괜찮은 걸까. 터널 끝의 빛. 정말로 빛이 있을까.

 

 

 “일단은.”

 

 

 그래, 일단은.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복수를 먼저 생각하자. 그걸로 당장 살아갈 이유가 된다면, 그걸로 하자.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된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 지금은.

 

 

 “일단은 생각해 볼게요. 당장 네, 라고 바로 대답할 수는 없어요. 뭐, 그래도 노력 정도는 해볼게요.”

 

 

 “좋아. 그럼 일단은 계약 성립인가.”

 

 

 “좋아요. 성립.” 나는 주먹을 내밀었다. 한현은 나와 주먹을 맞부딪혔다.

 

 

 

 

 내 일생 동안

 사투르누스는 나와 사랑을 나누려 하는데

 나는 가슴을 걷어찰 뿐이야

 내 일생 동안

 나는 한 푼도 못 딸 거야

 왜냐면 내가 돈을 걸 때마다 쫓겨나니까

 그리고 내가 부수는 이 고리들은

 너에게 개인적인 빚을 남겨 두지2)

 

 

 

 

 

 

 1) Kendric Lamar – U 中

 

 2) Gorillaz – Saturnz Barz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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