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무리 10억 없는 거지라도 지하철을 탈 돈은 있다. 다행히 아직 지하철 막차가 남아 있었다. 적당히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갔다가, 새벽 첫 차가 나올 때 까지 근처에서 노숙이라도 한 다음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온천장은 내가 전에 살던 곳인 부산대 바로 옆이다. 온천이 솟아나는 곳이라 온천장. 사실 이름이 온천장이니까 온천이 있겠거니, 싶다 뿐이지 정말로 온천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애초에 나처럼 새파란 젊은 애가 온천을 찾아 돌아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도 온천이 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온천장 주변은 모텔이 꽤나 많은 편이다. 온천 보러 오는 관광객이 꽤나 많은 걸까. 한 가지 웃긴 점은 온천장 주변은 이렇게 모텔이 많은데 바로 옆인 부산대 주변은 모텔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부산대에 있을 모텔들을 전부 온천장이 빼앗아 온 느낌이다. 뭐, 어차피 필요한 사람들은 조금 발품 팔아서 온천장까지 와서 모텔을 쓰겠지만.
편의점 네온사인이 혼자서 안개처럼 희멀건 빛들을 내고 있지만 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는 지하철도 끊어진 늦은 시각이다. 사람의 시간이 끝나고 밤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밤의 시간에 허락받은 것은 이성이 배제된 감각뿐이다. 시각, 촉각, 후각 그리고 청각만이 밤을 허락받았다.
이성은 감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밤에는 사람들이 더더욱 예민해지고, 사납고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새벽감성이라는 건 헛말이 아니다.
나만큼 밤에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밤에는 얌전히 감각의 말에 따르는 편이 낫다. 억지로 이성적으로 밤을 버티려 해봤자 밤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밤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밤에 가깝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 잡아먹히기 않을 정도로 가깝게. 내가 밤에 가까이 갈수록, 밤이 나에게 가까이 오는 것이니.
오늘 같이 새까만 날에 후드를 뒤집어쓰면 아무도 당신을 알아볼 사람이 없다. 단, 간혹 지나다니는 차도 당신을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차에 치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홀로 횡단보도를 지난다. 다행히 아무런 차도 나다니지 않는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고 나서야 기다렸다는 듯 작은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올 뿐이다.
종종걸음으로 모텔을 찾아 나선다. 생각해보면 원룸에서 지내느라 모텔은 별로 와볼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간혹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하는데 막차가 끊어졌을 때 한두 번이었나.
솔직히 모텔은 섹스 하는 곳이잖아. 섹스라는 말은 차마 입에 못 담겠지만, 아무튼. 물론 어디까지나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섹스라는 말에는 뭔가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 행동에서도. 트라우마 때문일까, 아니면 애초에 어리기 때문일까.
나는 모텔 옆 골목으로 돌았다. 담장을 두리번거리다, 사다리를 잠군 자물쇠를 땄다. 자물쇠를 따는 간단한 방법은 바로 그냥 자물쇠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라디오렌치만 있으면 바로 간단하게 자물쇠를 따버릴 수 있다.
라디오렌치로 자물쇠를 끊어버린다. 렌치 안쪽에 자물쇠를 끼워넣고 힘을 주었다. 쩡 하고 자물쇠가 잘려나가야 하는게 그러지 않는다.
간단하게는 취소. 생각보다 힘들구나, 이거. 나는 겨우 깐 자물쇠를 멀리 집어던져버렸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모텔 벽을 올라갔다.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중이라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모텔 창문으로 한 커플이 그 짓을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보고 있기가 민망해서 도로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김춘삼이 있는 곳은 4층이었다. 여기서 4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맨 위의 비상구를 통해 복도로 들어가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서 바로 사다리를 박차고 뛰어넘어 난간과 난간 사이를 넘어 지나다니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띌 가능성이 있고, 후자는 빠르게만 한다면 눈에 띄지는 않지만 다칠 위험이 있다.
전자든 후자든 리스크는 있는 것이다. 후자의 리스크가 더 크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는 리스크다. 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람이지. 애초에 지금 여기 온 것도 사람을 죽이러 온 거잖아. 그것도 리스크라고.
나는 사다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저쪽에 보이는 난간에 손을 뻗었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손이 미끄러졌다.
다행이었다. 나는 지금 난간 아랫부분을 붙잡고 매달려 있다. 4층 높이에서 떨어질 뻔했다. 4층 높이면 골절인가. 머리부터 떨어지면 바로 즉사겠지. 이걸 아깝다고 생각해야할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지 모르겠다. 떨어졌으면 한 방에 갈 수도 있었던 건데.
모르겠다. 지금은 복수를 생각하자. 복수를 앞두고 있으니까. 나는 나머지 한쪽 손도 난간 위에 올렸다. 난간을 오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있는 곳은 보아하니 410호.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춘삼 녀석이 있는 곳은 407호. 총 난간과 난간 사이를 세 번 뛰어넘어야 하는 셈이다.
난간과 난간 사이는 다면 좁게도, 넓다면 넓게도 보였다. 도움닫기를 하고 뛴다면 충분히 닿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달리고, 발을 뻗는다. 난간 한 쪽을 밟고, 날아오른다.
하늘을 나는 동안 바람이 따갑게 뺨을 스쳤다. 후드가 절로 벗겨지려는 바람에 나는 머리를 꼭 붙잡아야 했다. 눈에 띄더라도 얼굴만큼은 눈에 보이면 안된다. 이러는 와중에 409호 바닥의 베란다가 눈앞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한바퀴 굴러서 착지. 좋아. 적당히 알맞게, 타이밍 좋게 구른 덕에 아프지 않았다. 그래, 이 짓을 두 번이나 더 해야 한단 말이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미 그만두기에는 한참 늦었다. 나는 손을 털었다. 그러고 보니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었구나. 미쳤지 내가.
다음 번 도약은 사소한 실패가 있었다. 바로 너무 높이 날아올라버리는 바람에 베란다 하나를 통째로 건너뛰어버릴 뻔 한 것이다. 다행히 난간에 몸을 부딪히는 것으로 무사히 끝났다. 부딪힐 때 꽤나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안에 있던 사람이 상황을 확인하러 잠깐 밖에 나왔다. 담배를 꼬나물고,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 두리번 두리번. 짜증난다는 듯이 화를 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방 안에서는 교성이 들렸다.
마지막 도약이다. 굴러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두 다리를 딛고 착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뒤이어 정강이에 무지막지한 격통이 타올랐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걸까. 일단 당장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소리가 나지는 않았겠지. 나는 베란다 한쪽 구석에 엎드렸다.
토카레프를 꺼내 탄창을 끼웠다. 초탄을 장전하는 방법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총구를 이마에 맞대고, 심호흡. 안심해선 안된다. 이제 겨우 한 명이다. 아직 죽여야 할 사람은 두 명이나 더 있고, 한 발도 빗나가서는 안 된다.
나는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를 대 보아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적막. 김춘삼은 자고 있는 걸까. 하지만 코 고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애초에 그 남자가 이 방 안에 있기는 한 걸까.
천천히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인기척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은 흉흉한 살기 뿐. 뭔가 잘못됐다. 뭔가가 분명히 잘못됐다. 여기 안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단순히 아무도 없는 것일까? 나는 당장 벽을 더듬어 등불을 켰다.
피. 고깃덩이. 시체. 얼굴이 갈라져 있어. 나는 저도 모르게 시체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시체가 좀비처럼 일어나 날 습격하기라도 할 것처럼. 숨을 가라앉히고 침착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진정해. 이런 시체는 전에도 본 적 있어. 그리고 그건 우리 오빠였지. 이젠 놀랄 일도 아니야.
시체는 김춘삼이 분명했다. 저 머리를 어떻게든 조립해 본다면, 분명히 량차오가 보여줬던 그 김춘삼의 얼굴이 나올 것이다. 김춘삼은 깔끔하게 한 방으로 처리되었다. 머리에 뭔가 무거운 날붙이를 한 방. 글자 그대로 두 쪽이 난 머리가 침대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김춘삼은 반격할 시간도 가지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피는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잠깐. 나는 머리에서 이어진 핏방울이 하나의 길을 이루고 있는 걸 보았다.
뚝. 뚝. 뚝. 뚝.
살인자가 아직 이 호텔 안에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발을 내딛어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핏방울의 자취를 쫓았다. 이미 죽어버린 김춘삼 따위에게 소비할 시간따위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권총을 뽑아 쏠 수 있게 자세를 잡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깜깜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핏자국 정도는 어렵지 않게 분간해낼 수 있었다.
복도에는 양탄자가 깔려 걷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김춘삼을 죽인 누군가가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양탄자를 통해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살인자를 찾아 나선다. 살인자는 피가 뚝뚝 흐르는 흉기를 들고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계단의 끝에서, 핏방울이 끊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권총을 내밀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겼는지, 당기지 않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분명히 방아쇠를 당긴 것 같은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섬광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맞은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퍽 하고 내 머리를 내려찍은 감촉만이 들 뿐이었다. 아프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깜깜해질 뿐이었다. 망막은 쓰러지기 전에 본 형상을 기억하지 못했다. 잠이 쏟아졌다. 이런 걸 잠이라 부르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상관없겠지, 잠은 죽음의 사촌이라고 했으니까.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밤이 찾아왔다. 한 밤 중에, 흰 머리카락의 잔상이 눈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