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무실에서 2일차.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낮잠 때문이다. 이번에도 술 사놓는 걸 까먹었다. 사실 까먹었다기보다는 사러 갈 생각을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나가자니 한현의 눈치가 보여서 한현이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갔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한현이 나간 직후에 술 사러 잠깐 나갔다 왔으면 됐는데. 그 순간에 정말 멍 때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려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젠장. 게다가 면도날도 없어서 자해도 못한다. 젠장. 나는 면도날로 손목을 긋는 대신 벽에다 머리를 박았다. 바보같은 나 자신에게 주는 벌이었다.
홍차는 다시는 타 마실 엄두가 안 난다. 나와 홍차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음료다. 한현 이 미친 놈은 어떻게 사람이 술도 안 마시고 세상을 사는 걸까.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떻게 집에 소주는커녕 맥주 한 캔도 없을 수가 있냐고. 이게 말이 되냐고. 악. 홍차 중독자 같으니.
낮잠이라도 안 잤으면 모르겠는데 낮에 졸아버렸으니 정말 큰일 났다. 이대로 아무것도 할 짓 없이 새벽을 보내야 하는 셈이다. 나는 슬쩍 저쪽에 치워 놓은 베이스 기타를 쳐다보았다.
저거라도 칠까.
아니다, 아직 그 정도로까지 마음이 풀린 건 아니다. 여전히 음악에 대한 마음가짐은 배배 꼬여 있다. 아직은 털끝 하나만큼도 건드리고 싶지 않다.
남은 거라고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뭐, 간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생각할 게 없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뭔가가 이상했다.
한현의 이야기가 너무 모든 게 딱딱 맞아 떨어졌다. 내가 김춘삼을 찾아간 날에 김춘삼이 죽었고, 살인범의 뒤를 쫓다 얻어맞고 기절했다는 건 정말로 우연이라고 치자.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한현이 있어서 급하게 나를 데려왔다고?
뭔가가 이상하다. 우연이 너무 심하게 겹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한현이 나를 속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실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가 싫은 거겠지.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는 싫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내가 한현을 믿고 있는 걸까? 한현에게 배신당하기 싫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모르겠다. 한현이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자. 그럼 두 번째 수상한 점.
왜 김춘삼이 죽어야만 했지?
단순한 소거법. 우리 오빠를 죽인 범인과 김춘삼을 죽인 범인은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다른 한 명이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사람을 2번 암살자라고 부르자. 2번 암살자는 분명 우리 오빠를 죽이는 걸로 자기가 할 일을 다 끝냈다. 하지만 왜 김춘삼의 머리까지 두동강내야 했지?
생각해보면 김춘삼은 처음부터 범인일 수가 없었다. 김춘삼이 사람을 죽일 때 쓰는 수법을 생각해보자. 김춘삼은 먼저 급소를 노려 찍은 후, 적을 토막내는 수법을 자주 쓴다. 하지만 우리 오빠도, 김춘삼도 무식하게 머리가 깨져서 죽었지, 토막살인을 당한 게 아니다.
굉장히 손쉽고, 대담하고, 무식한 방법으로 죽었다. 나이프로는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들 수 없다. 그것도 우리 오빠는 총까지 들고 있었는데 머리가 박살났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김춘삼은 범인 목록에 오를 수조차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김춘삼이 범인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거지? 량차오가 그걸 몰랐을 수가 없다. ‘자칭 부산 안에서 모르는 것 없음’이 용의자를 고르는데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량차오는 분명 알고 있었던 셈이다. 한현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둘째 치고.
대체 김춘삼이 범인 리스트에 오른 이유가 뭘까. 이 판에서 김춘삼의 존재 이유는 뭐였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김춘삼이 죽어야만 했지?
꼭 죽기 위해 등장한 등장인물 같지 않은가.
그래, 소거법. 소거법에 의하면 결국 범인은 2번 암살자가 되는 것이다. 2번 암살자가 김춘삼을 죽였다. 대체 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암흑가의 사정 때문에?
도저히 모르겠다. 김춘삼은 정말로 죽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둘 중 하나가 죽었으니까 남은 하나가 정말로 범인이라고? 오히려 더 이상했다.
내 권총은 서랍에 있다. 남은 총알은 두 발이다. 한 명만 쏘면 사건 해결이다. 하지만 한 발이 남는다. 한 발이 남는단 말이야. 그럼 그 한 발은 대체 누구를 향해 쏴야 하지?
어쩌면 이 두 암살자는 오히려 암살 대상 리스트고, 누군가가 이 두 사람을 암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번쩍 하고 지나갔다.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량차오와 한현 둘 다 날 속였다는 말이 된다. 짜고 치는 고스톱에 속은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다른 제 3의 암살자가 있다면.
나는 서랍을 따고 총을 꺼냈다. 남은 총알은 두 발이었다. 역시, 2번 암살자를 쏴 죽인다 하더라도 한 발이 남는다. 만약 지금 당장 2번 암살자를 만나서 그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렇다면야 그 인간을 쏴 죽이면 끝난다.
하지만 또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또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모든 게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