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녀석의 은신처는 부전동이었다. 바로 옆이니까, 어쩌면 어제 온천장을 가는 것 보다 여기를 오는 게 수십 배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없이 량차오가 소개해준 순서대로 온 셈이다.
은신처는 어느 작은 주차장이었는데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카-카이 소유라고는 하는데, 이 작은 주차장에 여러 명 씩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셔터는 내려져 있고, 아무래도 들어가는 게 영 힘들어 보인다.
이럴 때 들어가는 방법은…….
아무래도 정중한 노크겠지. 나는 셔터를 툭 툭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셔터를 마구 발로 찼다. 쩔렁거리는 소리가 한밤중에 울렸다.
“열어 개새끼야!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열어!”
“모스.”
량차오의 아지트에서도 들었던 방식의 암호문이었다. 모스 다음에 올 말이 뭐가 있을까. 모스는 나방이란 뜻이다.
“데프?”
“모스 데프1)는 또 뭐야 멍청아. 암호문은 모스버거다. 꺼져.”
“아 쫌 열어봐요, 당신 생명이 달렸다고!”
도저히 열릴 생각을 앉는다. 나는 그제야 옆에 다른 출입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려보았지만 열리지 않는다. 나는 권총을 꺼냈다. 지금 이걸로 문고리를 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총알이 아깝다. 나는 권총의 손잡이로 문고리를 내려찍었다. 단단한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 퍽 하고 문고리가 꺾였다. 나는 꺾인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퍽 하고 누군가가 나를 한 대 후려갈겼다. 그리고 뒤에서 목을 졸랐다. 숨이 갑자기 턱 막혔다. 나는 내 목을 조이는 팔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보냈어 새끼야.” 성난 목소리. “잠깐만, 새파란 어린애잖아?” 놀라는 목소리.
“놔, 줘요, 사람 죽겠네.”
남자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날 아무렇게나 주차장 바닥에 던져놓았다. 바닥을 굴러서 생기는 상처보다도 이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게 고마웠다. 나는 바닥에 누워서 숨을 골랐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아가리 나불대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해 꼬맹아. 누가 보내서 왔어?”
내 뒤를 돌아보았다. 하와이 셔츠를 입은 남자, 아오이치가 내 머리에 총을 대고 있었다. 나는 저절로 놀라 뒷걸음질쳤다. 내가 생각해도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쏘, 쏘지 마세요. 전 제 발로 여기 왔어요.”
“아앙?”
아오이치는 총을 더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두 손까지 들었다. 쪽팔려도 이대로 총 맞고 죽는 것 보다는 낫다.
“저,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몰라요.”
“위험에 처해 있으면 있는 거고 안 처해 있으면 안 위험한거지 위험할지도 모르는 건 뭐냐? 여기까지 왔으면서 내 직업 몰라?”
“알아요, 알죠. 하지만.”
잠깐만. 아오이치는 권총을 들고 있다.
오빠는 무거운 날붙이에 살해당했다. 권총이었다면 총상이 남았지 그렇게 끔찍한 몰골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춘삼도 마찬가지다.
즉, 여기서 권총을 들고 있는 아오이치는 범인이 아니다.
“당신, 확인차 물어보는 건데, 혹시 시하라는 킬러 아나요?”
“질문은 내가 해.”
“대답하지 않으면 당신이 위험해요.”
“내가 왜 위험한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순간 앞이 막막해졌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설명 중에 뭔가 납득하기 쉽고 합리적인 설명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충격적인 사실부터 먼저 던지는 수밖에.
“시하, 김춘삼, 죽은 거 알아요?”
“그 녀석들이 죽어? 누구한테?”
“나도 몰라요. 시하, 김춘삼, 당신, 셋이서 대체 뭘 하려고 하고 있었던 거에요? 당신이 마지막이에요. 빨리 대답 안하면 죽을 지도 몰라요.”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지. 그 녀석들 누구한테 죽었어?”
“야, 지금 니가 죽는다는데 질문 하는 순서가 중요해 지금?”
“그 녀석들 누구한테 죽었냐고!”
“나도 몰라!”
서로 소리쳤다. 잠깐 동안 서로 숨을 몰아쉬느라 정적.
방금 전의 말다툼에도 소득은 있었다. 적어도 우리 오빠, 김춘삼, 이 남자 셋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여 있을 거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오이치가 그 둘을 죽인 게 아니라는 점과, 제 3자에 의해 곧 누군가에 의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점.
이렇게 말다툼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오늘 밤, 바로 당장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 전에 대답은 들어둬야 했다.
“내가 시하랑 김춘삼이 죽었다는 건 가르쳐줬죠.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에요. 맞죠?”
“좋아, 빠르게 끝내지. 네가 궁금한 건 뭐야?”
“당신과 시하, 김춘삼은 무슨 관계였죠?”
아오이치는 일단 총구를 떨어뜨렸다. 적어도 나에게 총구를 들이밀 가치는 없다고 판단한 게 분명하다. 당장 총구가 내 눈을 벗어나니 마음이라도 편했다.
“같은 암살 대상을 쫓는 암살자였어. 셋 중 먼저 목을 가져오는 사람이 현상금을 받기로 했지.”
젠장. 한현과 량차오가 이야기해준 사실과 완전히 달랐다. 둘이서 짜고 나를 속인 건가? 정말로?
정말로 내가 한현에게 속은 거야?
모르겠다. 판단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기죽은 모습을 보여줄 순간이 아니었다.
“꼭 잡것들이 힘 안 뭉치고 혼자서들 발악하다가-”
“내 차례 끝났어. 이제 네 차례니까 아가리 닥치고 대답해. 넌 누가 보냈지?”
“내 발로 왔어요.”
“그걸 믿으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죽은 시하가 우리 오빠에요. 이러면 말이 되나요?”
“오, 이런.”
아오이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 심정은 이해가 갈 만 하다.
“그럼 여긴 누가 가르쳐 준거야.”
“한 번에 하나씩. 이젠 제 차례에요. 당신들은 누구에게 무슨 의뢰를 받은 거에요?”
“한번에 하나씩이라면서 뭔 여러 개를 섞어서 묻고 앉았어. 아카-카이에서 의뢰받았다. 자, 이제 누가 여길 불었는 지 말해.”
제길, 거짓말은 진실이 섞여있을수록 더 그럴듯한 법이다. 량차오와 한현은 거짓말에 진실을 조금 보태서, 더 말이 되는 듯이 나를 속였던 것이다. 화가 치밀었다. 왜 그렇게 나는 멍청하게 속은 걸까.
“량차오라는 사람 알아요?”
“제기랄, 그 마파두부밥 새끼.”
“마파두부밥?”
아니다, 이런 이상한 걸로 질문 기회를 낭비할 수는 없다.
“당신들이 쫓는 사람은 누구죠?”
“소담.”
“뭐하는 사람이에요?”
“이제 내 차롄 것 같은데, 더 물어볼 것도 없으니 말해주지. 전 아카-카이 출신 암살자. 암호명은 ‘칠살.’ 쌍도끼를 쓰는 괴물같은 여자야.”
쌍도끼라. 도끼라면 그 치명상들이 이해가 갔다. 우리 오빠와 김춘삼 모두 머리가 두 쪽 나서 죽었다. 나이프나 권총으로는 그런 상처가 날 수 없지만, 도끼라면 충분히 머리를 쪼개는 게 가능하다.
그렇다. 우리 오빠와 김춘삼을 죽인 범인은 그 소담이라는 여자다. 아오이치도 이제 그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아오이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찾아와줘서 고맙다. 애송이. 여기가 들킨 걸 보니 빨리 튀어야겠구나.”
“잠깐만요.”
“왜?”
“나도 데려가줘요.”
“뭐?”
한현과 량차오가 날 속였다는 걸 안 이상, 그 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특히 한현. 내가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된다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제기랄, 인생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면서. 그 웃는 낮짝으로 홍차를 권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왜 한현이 내 뒤통수를 친거지? 어째서? 이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첫 날부터 전부 량차오와 다 짜고 친 거잖아. 아예 시작부터 날 속이고 들어가는 셈이었던 것이다. 제기랄. 전부. 날 향해 했던 그 달콤한 유혹들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용서할 수 없어.
“나도 데려가-”
쩔그렁! 하고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뭔가 단단한 것이 끊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오이치와 나는 말 없이 그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뭔가 불길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스르르, 하고 셔터가 느린 속도로 들어 올려졌다. 매우 천천히, 달빛을 받은 여자의 곡선이 드러났다. 온 몸에는 흉터와 붕대가 가득하고, 양 손에는 한 쌍의 도끼를 쥔. 광전사의 형상.
나는 온천장 모텔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봤던 그 백발을 떠올렸다. 여자는 백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밑바닥을 체험하고 온듯한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 모텔에서 나를 기절시킨 그 사람.
“여어.”
‘칠살’ 소담이 달빛에 빛나는 푸른 눈을 깜빡였다.
“내가 지각한 건 아니지?”
아오이치가 권총을 뽑아들고, 새하얀 잔상이 아오이치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1) Mos Def, 미국의 래퍼이자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