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현의 사무소를 찾아온 날 이상으로 옷차림도 말이 아니었다. 머리도 안 감은 지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옷이 완전히 해져 있는데다 온갖 먼지가 묻어있다. 토한 자국과 눈물 자국은 그래도 공용화장실을 발견해서 겨우 씻어낼 수 있었다.
동이 텄다. 하늘은 더럽게 맑고 갈 곳은 없었다. 더럽게 추웠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슬슬 자동차들이 움직일 시간이 되었는데. 추위에 세상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 같았다.
겨우 길을 찾아서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아직 지하철 첫 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하철이 있어도 갈 곳은 없었다. 원래 살던 방에서는 쫓겨난 지 오래, 그렇다고 한현의 그 상판때기를 다시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한현, 이 개자식.
날 보기 좋게 속이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뭐가 복수야. 시작 단추부터 잘못 끼워놓고는. 사실 아예 처음부터 이런 짓 따위는 계획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애초에 이렇게 누군가에게 속고 억울해 할 일 따윈 없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희망은 없는 인생이었다. 오빠는 죽었고, 오빠에게서 들어오던 생활비는 끊어졌다. 남아있는 돈으로 남은 인생을 살기는 턱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발버둥으로 뭐라도 못해보겠냐고.
그러니까 이만하면 됐어.
이제 포기해도 돼. 그만 살아도 돼.
역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는 자꾸만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총알은 두 발 남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죽을 거라면 권총을 들킬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권총이 발견되는 건 어차피 내가 죽은 다음일 테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죽는 걸 생각하기는 뭔가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총을 꺼낼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남아있다고. 뭐가 남아있다고.
지하철이 들어와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올라탔다. 철저하게 몸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이끌고 있었다. 스스로도 어디로 가는 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참을 지하철 구석에 앉아서, 나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지하철이 서면역에서 멈춰 섰을 때, 나는 일어섰다.
아침의 거리. 아직 그 수많은 핸드폰 가게들이 오픈하지 않아서인지 아무런 노래 소리 없이 조용하고 좋았다. 수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아직 오픈을 준비할 시간조차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마치 투명한 백색의 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이 낯선 분위기의 거리에서 낯익은 기분을 느꼈다. 이 새하얀 거리를 어딘선가 본 적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신비한 기분이었다. 발이 닿는대로 나는 앞을 향해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서, 지나다니는 차들의 소리를 들었을 때야 비로소 나는 내가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는 ‘한현 탐정 사무소’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권총의 총알은 두 발 남았다.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이건 이제 우리 오빠의 복수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한현의 사무소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다짜고짜 권총부터 내밀었다. 한현은 그 와중에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내 총을 보자마자 양 손을 들었다. 저항의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남자다. 어쩌면 다른 곳에 몰래 무기를 숨겨두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젠장, 어쩐지 권총이 없어져 있더라니.”
“닥치세요.”
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총 들고 험악하게 나오는 거 보니까 눈치챘나보네, 어디까지 눈치챈 거지?”
“소담과 직접 만났어요.”
“거의 전부 다 들켰다고 보면 되겠군.”
“두 가지만 빼고.”
“그래, 뭐가 궁금하지?”
“김춘삼을 찾아갔던 날, 내가 기절했을 때 날 여기로 데려다 준 사람은 당신이 아니죠?”
“그래, 아니야. 널 여기로 데려온 건 소담이었지. 널 기절시키고 나서 소담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어. 그래서 데려와 달라고 했지. 뭐하는 앤지 묻지는 말라고 했고.”
그렇군. 이걸로 수수께끼 하나는 해결되었다. 나는 한현을 한층 더 매섭게 노려보았다. 허튼 수작이라도 부리면 당장이라도 쏠 수 있게. 이 인간은 처음부터 날 속였다. 지금도 어떻게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 처음부터 속일 생각이었죠?”
“정확하게는 처음엔 몰래 산에 데려가서 생매장해버릴 생각이었어. 그 편이 조용하니까. 문제도 없고.”
“비열한 자식.”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권총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니 잠을 자지 못했구나. 이다지도 몸에 힘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신이 우리 오빨 죽인 거나 다름없어, 김춘삼도, 아오이치도 전부 소담에게 팔아넘겼어.”
“맞아.”
한현은 피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자기가 한 일을 인정했다.
“왜죠?”
“전에 내가 홍차 이야기 했었나?”
“그 아삼인가 뭔가 하는 홍차 말인가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누군가가 홍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손해를 봐야하지. 세상은 그런 시스템으로 짜여 있는 거야.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팔아넘겨야지. 난 살아남아야하니까.”
뻔뻔한 자식.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어쩐지 홍차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고작 자기 하나 살겠다고, 나머지 셋을.
“고작 자기 하나 살겠다고 그런 건가요? 오빠한텐 목숨까지 빚졌다면서요.”
“이 바닥에서 인정이 풍부하면 죽기 딱 좋은 법이지.”
“아가리 닥쳐.”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일갈이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벌써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아직 물어볼 말이 더 남았는데.
“그래서, 그 세 사람을 팔아넘긴 건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날 가지고 논 이유는 대체 뭐죠? 그것도 당신 목숨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냥 장난감이 가지고 싶어서? 말해, 말해 이 씨발새끼야. 아가리 닥치고 말하라고!”
“아가리를 닥치면 말을 못하는데.”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나? 겨우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심정을 참았다.
“그냥 단순히, 순간적으로 수많은 죄책감 중에 하나를 덜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번역하면 값싼 동정심이라고?”
“그래, 값싼 동정심이지. 이렇게 이자까지 다 쳐서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화가 났다. 나는 손에 권총을 든 것도 잊고 달려가 한현의 멱살을 잡아 벽에 메쳤다. 하룻밤을 꼬박 샌 가녀린 여자아이의 힘이었지만, 한현은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 점이 더더욱 나를 화나게 했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반성하지 말라고. 마음껏 증오하지도 못하게.
“개새끼야.”
나는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소리쳤다.
“개새끼야!”
한현의 턱 밑에다 바로 권총의 총구를 가져다대었다. 한현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떻게 이처럼 초연할 수가 있지? 자기가 죽을 거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이 와중에서도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신은 나에게 희망을 보여줬어.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해줬다고. 그런데 뭐? 이제와서 값싼 동정심이었다고? 그냥 강아지 키우듯이 덥썩 굴러들어온, 그런 꼬맹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래놓고 모든 걸 속였어? 모든 게 거짓말이었어?”
말을 쏟아내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나는 계속해서 따졌다.
“고작 자기 살자고 사람 팔아넘긴 사람이 변덕스런 동정심으로 사람을 거뒀단 말이야? 당신은 인간쓰레기야. 당신 인생은 당신이 팔아넘긴 사람들보다도 못해. 죽어. 여기서 죽어버려.”
“그래, 죽여.”
나는 한현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인정도 가진 녀석이나 부릴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허세부리는 녀석의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 동정심 따위 진작 버리지 못한 사람이 발붙이고 살아갈 자리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보여줘. 네 오빠가 인정에 죽었듯이, 나도 인정 때문에 죽는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 보면 몰라? 죽이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는 거잖아. 참고로 턱 밑에다 대고 쏘는 건 좋지 않아.”
한현은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가리켰다.
“쏠 거면 여기를 쏴. 그게 정확하니까.”
“나더러 당신을 죽이라는 거야?”
“왜, 애초에 죽이러 온 게 아니었나?”
“맞아. 당신을 죽일 거야.”
“그럼 뭘 망설여? 배신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나도 세상 사는 데에는 신물이 났다고.”
“좋아, 그래. 한번 해 보자구.”
나는 한현과 거리를 벌리고, 그의 이마 한 가운데를 노렸다.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연습해온 장면이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오빠의 원수가 있었지만, 그 자리가 한현이 될 줄은 몰랐다. 뭐, 한현도 우리 오빠를 팔아넘겼으니까, 원수가 맞지만.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유언이라도 남길 말 없어?”
나도 모르게 뜸을 들였다. 그러자 한현이 대답했다.
“하, 진장에 그냥 산에 끌고가서 묻어버려야 했는데.”
그게 유언이란 말이지. 좋아. 손이 떨렸다.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인다. 머릿속에 글자가 가득 차 올랐다. 방아쇠를 당겨. 당기라고.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글자들이 덜덜 떨리는 내 손을 옭아맸다. 그 와중에, 눈앞에 글자가 스쳐지나갔다.
지금이야. 당겨.
총성이 울려퍼졌다. 손이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한현의 사무실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구토감이 치솟아 올라 하늘을 메웠다. 당장이라도 어디다가 토악질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술, 술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