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모든 일은 삽시간에 벌어졌다. 먼저 한현이 안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몸을 날렸다. 소담도 지지 않고 나에게 몸을 날렸고, 나는 균형을 잃고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손에서 권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허공에서 총성이 울리고, 이제 완전히 텅 빈 권총이 내 몸 위로 떨어졌다. 나는 순간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방금?”
“네가 죽을 뻔 했어.”
한현이 대답했다.
“왜 날 구한거죠, 당신들은?”
“내가 목숨까지 바쳐서 널 구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자살해버리면 어이가 없잖아.”
“제가 당신에게 그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나요? 값싼 동정심이라면서요.”
“이렇게 비싸게 돌아올 줄은 몰랐던 거지.”
한현이 웃었다. 그 얼굴에 강펀치를 날렸다. 그 정도의 기력은 있었다. 그래놓고도 한현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그의 상처를 속이 후련해질때까지 밟고는 소담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당신은 뭐가 문제라서 막은 거에요?”
“아? 나? 그냥 재가 달려들길래 따라한 것 뿐인데?”
“당신은 바보에요?”
“재 바보 맞아.”
그렇게 처 맞고도 차릴 정신이 있다니, 한현이 좀 덜 맞은 모양이었다.
“그냥, 목숨을 포기하는 건 아깝잖아?”
“나는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뭔가를 상처입히는 것마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죠?”
“차차 노력해가다 보면 바뀌겠지.”
소담이 대답했다.
“누구도 답을 제시해주지 않아. 살아있다는 건 그냥 살아있는 거야. 때론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상처입혀야 할 순간이 오겠지. 결국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지는 거야. 물론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도 있겠지. 하지만 별 수 없는 거야. 살기 위해서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어쨌든 살아있으면 굳이 상처를 주고받는 것 말고도 즐거운 일이 많잖아?”
잘 모르겠다. 나는 주저앉았다. 살면서 즐거운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다. 날 죽일 능력이 있는 인간들은 전부 이 모양 이 꼴이고, 권총은 총알이 다 떨어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결국 종착역은 여기인 셈이다.
“왜 웃어?”
소담이 물었다.
“웃겨서요.”
“그래, 웃으니까 보기 좋네.”
나는 한참을 웃었다. 한현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좀 재수없었다.
뒤처리는 량차오가 알아서 했다.
결국 복수는 하지 못하고, 한현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이걸로 된 걸까. 스스로도 확신이 잘 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겉으로는 화해한 것 같아도, 한현과 나는 원수지간이다. 한 집에 살고, 비록 내가 밥을 축내는 처지기는 하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소담은 며칠 안 가 상처가 나았다. 꽤 크게 벌어진 상처 같았는데, 그 새 멀쩡해지다니. 소담은 괴물인걸까. 솔직히 말해 멀쩡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은 회색 엔딩이다. 안개 낀, 칙칙하면서도 마냥 어둡다고는 할 수 없는, 그래. 런던 포그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아닌 그런 엔딩.
나쁘지 않았다. 이거라면 충분했다. 나는 한현에게 런던 포그를 주문했다. 런던 포그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1. 홍차를 소량만 진하게 우려서 설탕을 탄다. 홍차는 얼 그레이가 좋다.
2. 우유 거품기로 거품을 낸다.
3. 만들어진 우유 거품을 홍차 위에 얹는다.
4. 홍차와 우유 거품의 조화를 느끼며, 맛있게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