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광활한 대지엔 피들이 서로 뒤섞여 흥건했고, 그 자리에선 악취가 났다.
곳곳엔 저마다의 상처를 가진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 중엔 정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것들도 몇 있었다.
전쟁의 참혹함은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고,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탁탁, 탁탁.
수풀이 우거진 숲 속.
그 속에서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한 무리가 보인다.
네다섯 명쯤 될까.
어두운 밤길이라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뛰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멈출 수 없어 그리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리 뒤로 어떤 불빛들이 그들을 빠르게 쫓고 있다.
“여기!”
무리들 중 가장 앞서가던 이가 황급히 방향을 틀며 소리친다.
그리곤 곧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뒤따르던 일행들도 당황한 듯 주춤거렸지만, 곧 그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 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푹 꺼진다.
어두운 밤이라 잘 안보였지만 그곳은 절벽이었던 모양이다.
무리 중 한 명이었던 소녀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밑으로 꺼지자 소리를 지르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 급히 그 입을 틀어막는다.
아까, 무리에서 제일 앞장서 가던,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다.
남성처럼 보이는 투박한 옷들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여자였다.
“쉿!”
그녀가 소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소녀는 여전히 입이 틀어 막힌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의 몸이 훅 꺼졌던 그곳은 다행히 절벽이 아니라 구덩이였다.
구덩이 위로 풀들이 빼곡하게 덮여있어 이 위를 직접 밟지 않는 한 이곳이 구덩이란 건 절대로 알 수 없었다.
풀들은 누군가 밟으면 그 순간 밑으로 잠깐 휠 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지붕처럼 아득하게 구덩이를 덮고 있었다.
무리를 뒤쫓던 불빛들이 이 주위를 서성이며 그들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풀잎들 사이로 빛이 들어와 일렁인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긴장한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멀리가진 못했을 거야. 갈라져서 찾아보지.”
다행히 불빛들은 이 구덩이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멀어진다.
곧 주위가 어두워진다.
그제야 소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도 떼어진다.
소녀는 숨을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다. 그리고 묻는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지구로 가는 비밀통로가 있는 곳이다.”
그녀의 대답에 소녀의 눈이 커진다.
“무슨 소리입니까. 지구로 가다니요. 우리는 이 숲 너머로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곳에 우리의 동족들이 숨어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하지만 그곳은 오늘 아침 적들에게 습격당했다. 누군가 밀고를 한 모양이야.”
“누가 그런 짓을….”
“누가 밀고를 했는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너희는 지구로 가거라.”
그녀가 소녀와 그 옆에 있던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소녀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전 싫습니다.”
“누벨!”
“지금 우리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였던 동료들은 전쟁터에서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동생은 지구로 도망치라니요! 그건 비겁한 짓입니다.”
“잘 들어라.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는 전쟁에서 졌다. 지금 적들은 우리를 찾아다니고 있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란 말이다.”
“비겁하게 목숨 연명하느니 차라리 그냥 죽겠습니다!”
짝.
짧은 마찰음과 함께 소녀의 얼굴이 옆으로 세차게 돌아간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이냐!”
그녀가 소녀를 향해 소리친다.
“너희가 살아야 우리 종족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걸 모르느냔 말이다!”
“….”
“내가 왜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너희를 끌고 이곳까지 왔겠느냐.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우리 종족이 맞이하는 건 죽음밖에 없다. 그러니 지구로 가라. 지구로 가면 미리 그곳에 보내놓은 동족들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지구에 살며 힘을 키워라.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적들에게 빼앗긴 우리의 영토를 되찾거라.”
“…그러면 어머니는요?”
소녀가 묻는다. 빨개진 볼 위로 눈물 한 줄기가 타고 흐른다.
소녀의 물음에 그녀가, 아니 소녀의 어머니가 멈칫한다.
“제가 제구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무사하게 계실 수 있는 것입니까.”
“….”
“알려주십시오. 저희가 지구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그리고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는 무사 할 것이다.”
“그 말, 그 약속! 제가 진정 믿어도 되는 겁니까.”
“… 그렇다.”
그녀의 대답에 소녀가 조용히 눈을 감고 흐느낀다.
눈물이 쉴 새 없이 소녀의 볼을 타고 흘러 땅으로 뚝뚝 떨어진다.
옆에 있던 소년의 눈에도 눈물이 잔뜩 고여 있다.
그가 앞으로 조금 나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묻는다.
“어머니, 그냥 어머니도 저희와 함께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안 된다. 나에겐 이곳에 남아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머니…”
자신의 어머니를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은 제 아들의 손을 잠시 내려 보다가 곧 손을 빼낸다.
그녀는 흔들릴 수 없었다.
단호해져야했다.
“어미의 말을 잘 듣고 기억해라. 누벨, 샤르길. 너희는 자랑스런 호시르 종족의 수장 슈올의 자식들이다. 그 사실을 항상 가슴에 새겨두고 기억해라. 그리고 강해져라. 이곳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해져라. 강해져서 다시 돌아와 적들에게 뺏겼던, 이곳을 다시 되찾거라. 너희의 집이었고, 터전이었던 이 곳, 얼데트를 말이다.”
그리고 탁, 구덩이의 한쪽 벽을 손바닥으로 친다.
그러자 그 벽 가운데의 일정부분의 흙들만 흔들리며 움찔거리더니 곧 풀썩 내려앉는다.
한 사람이 겨우 기어들어 갈만한 작은 터널이 생겼다.
강한 바람이 생기며 그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바람에 구덩이를 덮고 있던 풀들이 세차게 흔들린다.
이러다간 곧 내려앉아버릴 것 같다.
“어머니! 풀들이!”
“아무 말 말고 얼른 들어가거라! 얼른!”
주저하는 소녀의 등을 그녀가 힘으로 떠밀며 터널 안으로 집어넣는다.
소녀는 불안한 눈으로 제 머리 위의 풀들을 보면서도 자신을 떠미는 힘에 못 이겨 터널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소녀가 사라지고, 그녀는 옆에 있던 소년도 터널 안으로 떠민다.
이제, 풀들은 반쯤 내려앉아 구덩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어머니, 우리 분명 다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것이다. 얼른 들어가거라!”
그렇게 소년도 깜깜한 터널 안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그 깊은 터널 안을 잠시 들여다보곤 다시 탁, 구덩이의 벽면을 손바닥으로 친다.
허물어졌던 흙들이 다시 그 터널을 채우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강하게 일던 바람도 사라져 주위가 고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이 사라졌던 벽을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잘 가거라. 나의 딸아, 나의 아들아.
강해져야했던 그녀가 차마 그들 앞에서 내뱉지 못했던 말을 그제야 작게 중얼거린다.
그녀의 옆에 있던 보좌관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누벨과 샤르길은 잘해낼 것입니다.”
“그러길 바래야지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반쯤 사라진 풀들 사이로 지독하게 높은 밤하늘이 보인다.
그 속에서 별들은 너무도 평화롭고 여유롭게 제 빛을 내고 있다.
저 빛들의 너머로 자신의 자식들이 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눈이 시려온다.
우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 그녀는 마른세수를 하는 척하며 재빨리 옷깃으로 제 눈을 닦는다.
보좌관은 그 모습을 못 본 척 괜한 곳을 바라본다.
그런데, 사라졌던 불빛 하나가 구덩이 위에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들킨 것이다.
“찾았다. 이 자식들.”
그 불빛은 아주 거친 목소리로 말하더니,
곧 위에서부터 허물이 타들어가며 벗겨지듯 내려오며 인간의 형태로 변한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피부는 초록색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눈동자 색은 수시로 바뀌었다.
매아이 종족이었다.
“지긋지긋한 놈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깊은 구덩이를 한 번에 훌쩍 뛰어 밖으로 나온다.
보좌관도 똑같이 뛰어올라 그녀의 옆에 선다.
구덩이를 사이에 두고 매아이와 마주보는 형태가 된다.
그 매아이 뒤쪽으로 두세 개의 불빛이 이쪽으로 날아와 똑같이 원래의 제 모습으로 변한다.
제일 앞에 서 있던 매아이가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한다.
“우습군. 이런 구덩이에 숨어있었다니.”
“호시르 놈들 역겨운 건 내 잘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겁쟁이 같은 짓까지 할 줄은 몰랐는걸.”
그 옆에 있던 매아이도 거들 며 낄낄거린다.
그 말에 보좌관이 발끈한다.
“네 이놈! 종족이 달라도 서로간의 예의가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말이 지나치다! 그리고, 역겨운 건 너희 매아이 종족이 아니더냐! 오만방자함으로 종족간의 평화를 깨고 힘으로 억누르려하는 그 행동이 말이다!”
“예의? 네 놈이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모양이로구나. 네 놈들은 그저 패배자일 뿐이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보좌관이 이를 갈며 말했다.
하지만, 그도 잘 알고 있다.
이 전쟁에서 호시르 종족이 패하였음을, 그리고 종족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이다.
“잠깐.”
그때, 맨 뒤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매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자세히 보니, 당신은 왕의 보좌관이 아닌가.”
“넌 누구냐.”
보좌관이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이 탈로나면 큰일이었다.
“난 보좌관이 아니다.”
“보좌관이 아니라… 그래, 그렇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저장에서 왕 옆에 있던 당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걸.”
“잘못 본 것이겠지.”
“잘못 봤다? 그 큰 흉터를 가진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주 뻔뻔하게 넘어가려 하는군.”
그는 보좌관의 얼굴에 난 흉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좌관의 볼에는 위에서 아래로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
그걸 봤을 줄이야, 보좌관은 난처해졌다.
매아이는 그 속내를 눈치 챘는지 아주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근데 오늘은 왜 왕 옆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것이지? 도망친 것인가? 아니면…”
그의 시선이 보좌관 옆 그녀에게로 향한다.
뒤에 서 있던 매아이들도 따라서 그녀를 쳐다본다.
“당신이 왕비로군.”
매아이의 눈이 번뜩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