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빠르게 보좌관을 향해 뛰어간다.
빠른 속도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뛰는 속도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다.
보좌관의 몸이 떨어지는 속도가 결코 느린 게 아닌데도 그녀는 어느새 바로 밑까지 와있다.
그녀는 달리면서 자신이 걸치고 있던 투박한 겉옷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그녀의 온 몸이 털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몸의 크기가 커지고 꼬리가 자라난다.
이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는 없고 한 마리의 구미호가 달리고 있다.
그녀는 도약하며 뛰어올라 등으로 보좌관의 몸을 무사히 받아낸다.
떨어지던 속도와 몸의 무게가 있어 상당한 충격이 등에 전해진다.
“오, 보기보다 날렵한걸? 여왕이라고 맨날 가만히 앉아있었던 건 아닌가보군.”
옆에서 지켜보던 매아이가 비꼬듯 말한다.
반쯤 떨어져나간 팔에선 쉴 새 없이 회색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고통이 꽤 큰 모양인지 태연한 척 하려는 얼굴의 미간이 자꾸 찌푸려진다.
그녀는 보좌관을 땅에 내려놓는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다.
하긴, 보좌관은 적이 내뿜은 기를 정통으로 맞았다.
기절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 기절한 보좌관을 내려 보다가 뒤를 돌아 매아이를 바라보며 묻는다.
“자네 팔 상태는 괜찮은가.”
그녀의 질문에 매아이가 코웃음을 친다.
“그거 참 가증스러운 질문이로군. 적 상태까지 살펴줄 정도로 마음이 넓다 이건가.”
“그렇게 들렸다면 아쉽군.”
“뭐?”
“내가 자네의 상태를 물은 것은, 이제부턴 내가 자네를 상대할 것이기 때문이지.”
“오호, 그거 영광이군. 높으신 여왕님께서 이 미천한 자를 직접 상대해주다니 말이야.”
“입이 살아서 떠드는 걸 보니 아직은 살만한가보군. 하지만…”
하지만? 매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그녀가 매아이에게 빠르게 달려든다.
보좌관이랑은 차원이 다른 스피드다.
매아이가 당황하며 피해보려 하지만 어떻게 할 새도 없이 그녀는 이미 그의 코앞까지 와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반쯤 떨어져나간 팔을 그대로 물고 뜯어버린다.
뚝. 팔은 너무도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매아이들의 눈이 놀라서 커진다.
“이봐! 팔!”
팔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린 매아이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그녀는 물고 있던 매아이의 팔을 땅에다 뱉는다.
그녀의 입가의 털이 회색빛의 피로 물들어있다.
“이제 입만 살아서 떠드는 일은 없겠지.”
매아이는 잘려버린 자신의 팔을 부여잡으며 거친 숨을 내뱉는다.
억눌린 신음이 그 사이로 새어나온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은 냉담하다.
한 종족의 여왕으로써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자세로 살아온 그녀지만, 적 앞에선 한없이 냉정해지고 잔인해졌다.
건너편에 있던 매아이들이 구덩이를 건너와 자신의 동료를 부축한다.
"저 여왕은 우리가 맡겠네. 뒤에 가서 쉬고 있어.“
“제대로 잘려나갔구만.”
팔이 잘린 매아이가 부축을 받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고통에 차 있으면서도 그녀를 쳐다보는 눈동자엔 아까보다 더한 광기가 서려있다.
매아이는 자신을 부축하는 손들을 다 쳐낸다.
“다 꺼져. 저 여왕은 내가 상대할 것이야.”
그리곤 반대편 손으로 땅에 떨어져있는 롱소드를 집는다.
“이 몸으로 여왕을 어떻게 상대하겠단 거야.”
“어리석게 고집부리지말라고!”
“다 꺼지라니까!”
매아이가 자신의 동료를 향해 롱소드를 위협적으로 휘두른다.
붕붕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는 롱소드의 칼날을 피해 다른 매아이들이 뒤로 물러난다.
매아이는 고통으로 거친 숨을 몰아쉰다.
“팔 하나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팔 두 쪽이 없어도 이길 수 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덤벼라.”
매아이가 검을 고쳐 잡는다.
그녀는 잠시 기싸움 하듯 매아이와 눈빛을 주고받는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란 걸 자신도 알 텐데 검을 쥔 자세는 결의에 차있다.
패기인지 객기인지 몰라도 꽤 그럴듯한 전사군.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냉정한 상황에서 그를 살려둘 순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둘 중 하나는 죽어야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마음먹은 듯 자세를 고쳐 잡고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매아이를 향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작은 덩치가 아닌데도 달리는 몸짓은 빠르고 날렵했다.
뛰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빠르게 달려 매아이에게 성큼 다가간 그녀는 롱소드를 쥐고 있는 그의 팔을 노린다.
하지만 용케 그녀가 노리는 부분을 캐치한 매아이가 팔을 빼내며 그녀를 향해 롱소드를 내리친다.
그녀도 그 칼날의 움직임을 읽으며 신속하게 몸을 빼낸다.
칼날의 열기가 몸 바로 옆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한 번의 반격을 피한 그녀는 쉬지 않고 바로 그에게 다시 달려든다.
빠르게 달려 그의 몸틍을 크게 들이받는다.
매아이가 뒤로 밀려나며 휘청거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달려들어 발톱을 휘두른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가슴부터 배까지 쓸고 지나간다.
“으윽.”
발톱이 지나간 자리엔 긴 상처가 나있다.
그의 옷 앞섬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온다.
매아이는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신음만 작게 내뱉을 뿐 아까처럼 주저앉지는 않는다.
그에게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진 않았다.
발톱이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갔어도 그는 죽었을지 모른다.
그걸 매아이 자신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운이 꽤 좋은 모양이군. 아니면, 갑자기 안쓰러워서 일부러 살려준 건가.”
“나에게 동정 따위가 있어 보이느냐.”
“하하, 동정이라. 그래. 없는 편이 더 좋다.”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동정이라면 단번에 숨통을 끊어주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의 숨통이 끊어질지는 모르는 법이지. 근데, 내 느낌상 그게 나는 아닐 것 같군.”
“그 느낌이 맞는지 틀릴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군.”
그녀의 말에 매아이가 크큭, 하며 웃는다.
그리곤 그녀에게 달려든다.
달려오던 매아이의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보좌관이 당했던 수법이다.
그녀는 온 신경을 주위에 집중한다.
단 하나의 소리라도 놓치면 당장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그때, 옆쪽에서 툭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무언가 공기를 가르는 날쌘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잽싸게 몸을 피한다.
간발의 차로 칼날이 땅에 내리 꽂아진다.
매아이는 그녀가 반격할 틈도 없이 칼을 뽑아 다시 제 모습을 숨긴다.
이번엔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녀는 방금 전처럼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쪽으로 튼다.
그런데,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등 뒤쪽에서 들려온다.
매아이는 그녀가 뒤쪽으로 몸을 피할 것이라 예상을 해 소리는 옆에서 내고 공격은 뒤쪽에서 해온 것이다.
아차, 하며 그녀가 몸을 바짝 숙인다.
머리를 숙이기 무섭게 칼날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그때 귀 쪽에서 아찔한 고통이 느껴진다.
미처 접지 못한 귀의 윗부분이 조금 잘려 나간 것이다.
그녀는 순간 느껴지는 아픔에 당황한다.
매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롱소드를 다시 한 번 휘두른다.
그녀의 어깨부분이 예리한 칼날에 베인다.
피가 튀기고, 은색 빛의 털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매아이는 이 기세를 몰아 그녀에게 공격을 퍼부으려한다.
하지만 그가 입은 데미지는 상당했기에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빠져 롱소드를 놓쳐버리고 만다.
“제길!”
롱소드가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땅에 떨어진 롱소드의 칼날 부분을 발로 집고, 손잡이 부분은 입으로 물어 부러뜨려버린다.
단단한 롱소드도 그녀의 힘 앞에서 툭 소리를 내며 반으로 부러진다.
그러자 투명했던 칼날 부분이 제 빛을 잃은 평범한 칼의 색으로 돌아온다.
강한 열기를 내뿜었던 그 기운도 사라져버린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건 지극히 평범한, 아니 오히려 평범한 검보다 더 초라해 보이는 부러진 검 한 자루뿐이다.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손잡이 부분을 땅에 뱉는다.
광기가 서려있던 매아이의 표정이 허망하게 변해있다.
자신의 팔을 잃었을 때보다 더 치명타를 입은 것 같았다.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군.”
“…”
“자, 이제 어떻게 싸울 셈이냐.”
“…”
매아이는 말이 없다.
오로지 반으로 부러져버린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지간히 아끼던 검인가보군.
그녀는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다.
이 세계는 냉혹한 것이니,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
매아이는 그녀가 자신에게 발톱을 세우고 다가옴을 알 텐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발을 높이 든다.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 날카로운 발톱이 번뜩인다.
단숨에 목을 그어 숨통을 끊어줄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했다간 이 매아이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발톱으로 매아이의 목을 내리치려는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그녀의 들어 올린 발에 감아지더니 꽉 옥죈다.
뭐지? 싶어서 보면 하얗게 뻗은 빛줄기가 그녀의 발에 밧줄처럼 감겨있다.
밧줄이 세게 당겨진다.
그 힘에 그녀가 뒤로 넘어진다.
“역시, 우리가 처리했어야했어.”
“공 세울 욕심에 목숨 잃을 뻔했다고 자네!”
“자, 여왕님. 이리오시지요.”
다른 매아이들이다.
그녀의 발을 붙잡은 빛줄기는 그 세 명의 매아이들 중 한 명의 손에서 길게 뻗어 나와 있었다.
그들은 그걸 밧줄처럼 잡고 그녀를 잡아당기고 있다.
그녀는 뒤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주지만 세 명이 끌어당기는 걸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녀와 매아이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