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야 너.”
“손 놔요.”
태열의 낮은 음성이 분노에 찬 듯 울렸다. 깊게도 빨릴 것 같은 그의 짙은 눈빛에 지연은 왼손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 이내 옅게 떨리며 들려온 그녀의 다분히도 차가운 목소리. 그 익숙한 음색에 태열은 그녀의 손목을 놓았고.
“차유희.”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태열을 노려본 지연은 제 앞을 막고 서있던 그를 지나치려 했는데.
“너 누구야.”
소름끼치게 들려온 태열의 건조한 말소리는 그녀의 두 다리를 단번에 붙들어 세웠고.
“너 누구냐고.”
다시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돌려세운 그는.
“지금 무슨…….”
“네 진짜 이름. 네 진짜 이름이 뭐냐고!”
그동안의 감정을 폭발시키며 그녀의 동공을 세게 흔들었다.
겁먹은 듯 떨린 그녀의 속눈썹. 아릿하게 새나온 그녀의 입술 사이의 탁한 숨.
지연의 심장 언저리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
*
“감사합니다.”
지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뒷집과 그 건너편에 사는 아주머니들이었다.
그들이 준 접시 위로는 군고구마와 장조림이 놓여있었다.
“네, 조심히 가세요.”
끼니 굶지 말고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내용의 말에, 지연은 힘없이 웃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철컥.
문이 닫히고. 지연이 문을 잠그기도 전에 그녀의 귓가로 저 이쁘고 착한 것을 두고 어찌 눈 감을 수 있겠냐며, 이제 저 애는 어떻게 사냐는 내용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연의 양손에 들린 접시 위로, 그대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힘주어 짓눌렀다.
그러나 이미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고, 두 팔에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
8년 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만해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땐 할머니도 있었었고, 할머니도 있었었고…….
지연은 눈앞이 캄캄했다.
‘아가, 할미가 죽으면…….’
얼마 되지도 않겠지만 옆 섬으로 가든, 저 멀리 시로 가든, 이 돈으로 공부를 하든 뭐를 하든 너 하고 싶은 데에 쓰라며 통장을 쥐어주던 할머니였다. 여자는 익은 열매라 항시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며, 남자한테 받는 상처는 죽을 때까지도 치유가 안 된다며 그 어떤 남자한테도 쉽게 마음 주지 말고 늘 경계하라는, 손녀사위감은 직접 골라주고 저승에 가야할 텐데라며 늘 걱정 하시던 할머니였다. 거기다 최근에는 노인네 욕심 때문에 지금까지 손녀딸 끼고 살고 있었던 게 가장 후회스럽다며, 일찌감치 지 인생 살게 내보냈어야 했는데라며 여러 차례 눈물을 보였던 할머니였다.
그래도 지연은 인상 한 번 쓰지 않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니던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그때부터 아침 마다 첫 배를 타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큰 섬으로 학교를 다녔던 그녀였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해당 섬에 있던 고등학교마저 폐교되는 바람에 고등학교는 입학도 하지 못한 채 검정고시 공부를 해야 했다. 이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는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씀과 도움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연이 정말로 공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누가 뭐래도 할머니, 할머니의 존재였다.
할머니랑 평생 같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지만, 언젠간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일자리를 찾아 집을 정리하고 섬을 떠날 날이 올 거란 생각을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렇게 혼자라는 사실이 뼛속깊이 느껴질 때면, 가슴이 시리다 못해 폐부가 막혀오는 느낌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나 진짜 어떡하지…….”
지연은 좁다란 거실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섞인 그녀의 울음소리는, 12월의 칼바람 소리 위로 애달프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유한은 헛웃음을 지으며 테이블 위로 물컵을 내려놓았다. 일주일간의 출장 후 돌아온 집에서 되도 않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아버지?”
“이미 얘기 끝난 문제다.”
“어머니는요. 어머니도 이번 일…….”
“네 어머니도 좋다고 한 일이야.”
“아니, 하 잠깐만요.”
30년을 살면서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유한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급히 풀었다.
“왜 오빠도 그러라고 했잖아, 나 스무 살 되면 성형하라며!”
“해 성형.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성형만 하라고.”
“싫은데? 큰 오빠한테도 말 다 해놨어 나 수술 다 하면 뉴욕 갈 거라고!”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차유희.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나 알고 있기나 해!”
유한은 자신의 큰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유희가 콧노래를 부르며 인화된 사진 몇 장을 뚫어져라 보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다 다시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차회장은 심지가 굳은 듯 유한과 눈만 마주한 채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빠! 여기서 누가 제일 예쁜 거 같아요? 오빠는?”
“아버지. 진짜 유희를 위하신다면 이렇……”
“이미 결정한 일이다.”
유한은 차회장의 얼음장 같은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한 번 결정한 일은 번복한 일이 없었고, 실패하는 일 또한 보인 적 없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이번 건…….
“김실장. 이 애들 중에 누가 가장 손쓰기가 쉽나.”
차회장은 뒤편으로 가볍게 손을 올려 손짓을 했다. 유한은 침착하게 차회장을 불렀다.
“아버지.”
“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생각해라. 다 네 동생을 위한 일이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 보십니까. 왜 하필 그런…….”
“현실이야 만들면 그만이야.”
차회장은 분명한 어조로 유한의 말을 끊었다. 이내 곁으로 온 김실장에게 말해보라는 듯 눈짓 했다.
유한은 얼굴을 빠르게 쓸어내리더니 물을 들이켰다. 너무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서 웃음이 나오려다가도, 그 모든 그림이 실제로 그려질 거란 생각에 뒷골이 당겨오기 시작했다.
“모든 면에서 분석해본 결과 한 사람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래, 그게 누군가.”
김실장이 차회장 곁으로 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테이블 위로 자신이 보던 사진을 가지런히 놓아뒀던 유희는 눈을 반짝였다.
김실장은 안경테 아래로 유심히 사진들을 보고는, 한 장의 사진만 위치를 조정해 차회장이 보기 편한 쪽으로 끌어 당겼다. 이에 유희는 마음에 드는 듯 방긋 웃었고.
유한은 인상을 구긴 채 한 쪽 다리를 꼬더니 다시 한 번 물을 들이켰다. 그는 김실장의 확신에 찬 말들을 빈웃음을 머금은 채 듣기 시작했다.
“이름은 한지연. 강서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전남 령화도로 이사, 줄곧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나이는 스물. 아가씨보다 한 살이 많습니다. 얼마 전 조모 사망 후 현재 일가친척 아무도 없는 상태입니다. 학력은 고졸로 중학교까지 인근 금좌도에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학력은 검정고시로 취득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성품이 올곧아 작은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모범생이었으며, 세 달에 한 번 꼴로 도서들을 보내주는 중학교 담임교사였던 이를 제외하고는 최근 6개월간 왕래하거나 잦은 빈도로 연락을 하는 친구들은 없는 걸로 확인했습니다. 후보인들 중 가장 외부노출이 덜 된 케이스입니다.”
“음… 그래.”
해맑은 얼굴로 령화도랑 금좌도가 어디지, 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낸 유희와는 달리 유한은 눈썹끝을 치켜세웠다. 실제로 저렇게 살아온 애가 존재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차치하고, ‘최근 6개월간’이란 말이 그의 빈웃음을 작게나마 터트리게 만 것이다.
그럼 적어도 6개월 전부터 이 일을 계획했다는 건데.
유한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얼굴은? 실제로 보면 어떤데? 옷이랑 머리 이런 거 빼고 진짜 얼굴만 보면 여기서 제일 예쁜 거 같은데! 피부톤이야 관리해주면 그만이구.”
유희는 두 섬에 관해 얼마 나오지도 않는 검색결과에 입을 비죽대더니 전라남도에 이런 섬들도 있었나 하고는 금세 김실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가씨와 키가 같았습니다. 외모는 전혀 신경을 쓰고 다니지 않는 것 치고는…….”
“아 그러니까 아저씨가 봤을 때 남자눈에! 남자눈에 예뻐, 안예뻐?”
미쳤구나.
유한은 유희의 유아틱한 모습과,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전혀 제지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머리가 세게 지끈거렸다.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유한은 차회장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김실장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정신이 팔린 유희를 잠깐 내려 보고는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어린 동생에게 특별한 관심도 주지 않았던 형이나 내 탓인 걸까. 그 어떤 거든 유희가 원하면 모든 들어주던, 유희말을 빌려 그녀만 열등한 유전자로 조합해 놓은 부모님 탓인 걸까. 그게 아니면, 자신의 뜻이라면 그 내용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기어코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동생 탓인걸까.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로부터 겪은 외모 놀림이 심각한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 사람들 많은 곳에 가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던 유희였다. 그탓에 학교 다니기 싫다는 유희를 등교와 조퇴를 반복시키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시켰었고, 유학이라도 보내려치면 집 밖엔 나가기 싫다며 우는 탓에 결국 중·고등학교를 전부 홈스쿨링으로 보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노출을 하지 않는 유희의 존재로 인해 일각에서는 온갖 소문들이 일었었지만,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모든 걸 무마해왔었는데.
아홉 살 때부터 눈, 코, 입, 얼굴형, 몸매까지 전부 성형수술을 하고 싶다는 유희에게 스무 살이 되면 각 부위의 전문가에게 수술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게 어머니였고 마지못해 그러라고 허락한 게 아버지였다. 그러니 열흘 뒤면 해가 바뀌니, 그토록 바라던 성형수술을 할 수 있을 것이었고. 세 번째로 본 수능에서 원하는 성적을 받았으니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면 되는 동생이었다. 그냥 그게 다여야했다.
그런데.
“잡음 들리게 하지 말게.”
유희의 아바타를 만드시겠다.
“이 일은 우리 유희한테도, 그 아이한테도 좋은 일 아니겠나?”
페이스오프 수준의 수술이 될 터이니, 필요한 시간이 꽤나 될 건데 그러니 시간은 벌고 싶고.
이왕 회복이 다 되면 큰 형이 있는 뉴욕으로 가 휴식을 취하며, 예뻐진 얼굴로 여기 저기 여행을 다니고 연수를 받는 동안.
스무 살 차유희로 대학에 입학해 4년간 대학만 대신 다녀줄, 학사 학위를 따줄 아바타 같은 사람을 사시겠다?
“내일 장비서랑 동행하게.”
유한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뚜렷한 차회장의 말소리에, 완전 대박이라며 꺄르르 웃는 유희의 웃음소리에 관자놀이를 깊게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