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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브레이커
작가 : 스테인리스
작품등록일 : 2017.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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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순한 지랄 (2)
작성일 : 17-07-16     조회 : 330     추천 : 0     분량 : 4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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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 저녁부터 한숨도 자지 못한 지연은 벽에 기대 앉아 힘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쿵, 쿵. 쿵.

 

  그녀는 머리를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먼저, 제가 이렇게 회장님을 대신해 사과할게요. 지연양에 대해 알아본 일, 기분 나쁠 거예요. 그런데 저희 쪽 제안이 지연양 인생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지연양이 이해해주면 좋겠어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오면 이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알 거예요.’

 

  신체적 비밀을 빼고는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이었지만 지연은 너무나 허무한 기분까지 느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인생을 참 쉽게 알아낼 수 있구나 싶어서. 나는 참, 힘이 없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회장님은 계약기간 4년이 끝나고도 지연양 후원해주실 거예요. 그래서, 고심 끝에 처음부터 저희 신원을 분명하게 밝힌거예요.’

 

  ‘곧 스물하나 되죠, 지금 이런 기회 인생에 딱 한 번 올 기회예요.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사회에 나올 수 있었던 거, 회장님이 보육원에 주신 장학금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지연양은, 지연양 홀로 후원받는 거예요.’

 

  KW그룹. 모르긴 몰라도 어떻게 KW그룹을 모를 수가 있을까. 정작 지연이 쓰고 있는 통신사가 KW인데.

 

  지연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여자는 믿기지 않겠지만 전부 사실이라며, 태블릿PC로 뉴스 기사 사진에 차진혁회장과 함께 찍힌 대문 밖의 남자 사진 여러장은 물론, 차진혁회장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후원을 약속하는 영상까지 보여주기까지 했었다.

 

  상상으로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끔찍이도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자신을 알고 왜 하필 자신인 건지.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을 제안할 수 있는 건지.

 

  그럼에도 여자에게 화를 내며 나한테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거냐고,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우스워보였냐고,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빨리 나가라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생각도 들지 않고, 겁이 나면서도 계속 여자의 말을 듣고 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기까지 했었다.

 

  마음 한편으론 이 제안이 이 현실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줄 동아줄인 것만 같아서. 그 동아줄이 선물처럼 나타난 것 같아서.

 

  ‘4년, 그러니까 8학기 동안 대학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는 지연양이 원하는 공부나 취미생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대신, 말했듯이 절대로, 4년동안 허락받지 않은 개인 활동은 하면 안돼요.’

 

  ‘모든 학기가 끝나고 최소 5년 동안은 한국에 있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 무섭게 느껴질 거예요. 그런데 5년, 생각보다 짧아요. 한 번도 해외에 가보지 못했잖아요, 그렇죠? 유학이든 여행이든 원하는 형태, 나라를 말씀해주면 모든 지원은 저희 쪽에서 해드릴 거니 거기에 가셔서는 그때부터 지연양 본인 마음대로의 인생 사시면 됩니다. 지내시다가 그쪽에서 정착을 원하신다면 그또한 저희쪽에서 도와드릴 수 있는 모든 지원은 다 해드릴거고요.’

 

  한글자도 빼지않고 귀담아 들었던 것 같다. 그 무서웠던 기분에서까지.

 

  ‘이렇게 처음부터 다 오픈해서 말한다는 거, 저희쪽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만큼 지연양한테 확신이 있다는 말이에요. 지금 너무 갑자기 들어서 당황스러울 건데, 나흘간 생각해 봐요. 물론, 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않아야한다는 것 정도는 알 거라고 믿구요. 저희 회장님께서 잡음이 들리시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셔서. 아, 그렇다고 겁먹진 말아요 지연양. 회장님 좋으신 분이에요.’

 

  여자의 어조는 일관되게 차분했고 친절했지만 분명 강단이 있어 무언의 압박까지 느끼게 했다. 거친 협박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일련의 정황만으로도 지연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선택의 여부는 없다는 것.

 

  답을 정해주고 생각을 하라고 있는 꼴이었으니.

 

 

  “얼굴, 머리, 옷, 집, 돈…….”

 

  지연은 자신이 서울에 가게 되면 받게 될 혜택들이 떠올랐다.

 

  ‘사투리 교정도 해줄 거예요. 지연양이 뭘 배우고 싶어 하든, 각 분야의 최고 실력을 가진 개인 교사도 붙여줄 거구요. 아침 식사는…….’

 

  “좋다…….”

 

  지연은 머리를 헤집으며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큰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비상식적인 일이었기에. 뭣보다 그녀 자신의 인생을 4년 동안 어딘가로 벗어 던져 놓아야 하는 기분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여자가 말한 달콤한 말들에 현혹되는 자신의 모습이, 머리가 어지러우면서도 어쩐지 기대도 되고, 차라리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회라는 생각까지 들자 그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차피 뭘 하더라도 그녀의 인생에서 그렇게 큰돈을 벌 수는 없다는 건 자명했다. 유학도 보내준다는데…….

 

  지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어 무릎 위로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그녀는 집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이틀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차피 무의미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을까.

 

 

  해가 뜰 때까지 뜬눈으로 뒤척였던 지연은 가스레인지 근처에 올려놓았던 물병을 들었다.

 

  목이 타는 듯 계속해 물을 마셨고. 두 눈을 감은 채 자꾸만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4년, 4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지연은 4년을 중얼거리며 휴대폰에 명함 위 11자리 숫자를 차례로 입력했다.

 

  지난 4년을 떠올려보면 자신에게 크게 변한 거라고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냥 4년 동안, 대신 학교만 다니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 못해봤던 것들만 하면 되는 거였다. 여자가 말했던 제약 조건들 따윈, 아무런 상관없었다.

 

  그렇게 지연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별 탈 없이 4년이 지나갈 거라고 여기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 여보세요…….”

 

  제 아무리 야무지게 마음을 먹었다 할지라도 지연의 손과,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네, 네.”

 

  지연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왼쪽 얼굴을 매만졌다. 이후 한참동안 지연은 수화기 건너편의 음성에 집중하며, 짤막한 대답만 이었고.

 

  “저 그런데…….”

 

  지연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보다 큰 음량으로 입을 열었다.

 

  “그날 이야기 하셨던 거 전부 다… 정말인 거죠?”

 

  지연은 다시 한 번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 건너편의 여자는 지연이 무엇을 다시 한 번 확인받고 싶었는지 알았기에, 재차 지연이 받을 후원 내용들을 나긋나긋하게 설명했고. 이내 그 내용은 전부 계약서로 명시되어 있으니 걱정하지마라며, 아니 그것보다 회장님이 직접 이름을 건 제안이라는 점을 잊지 마라며, 그렇게 지연을 안심시켰다.

 

  이후 여자는 오후3시까지 데리러가겠다며, 다른 부수적인 일들은 전부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해줄 테니 그냥 결심만 잘 한 그 마음, 몸으로만 있으라는 말을 붙였다. 그때 이야기했던 주변사람 정리도 잊지 마라는 말과 함께.

 

  “……. 잘 했어, 잘 한 거야.”

 

  전화를 끊은 지연은 작게 되뇌었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얼굴을 꽈악 누르더니 이내 거실과 구분이 잘 되어있지 않던 작은 크기의 제 방으로 향했다.

 

  주변 사람 정리. 여자가 말한 주변사람이라 하면 공선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나마 공미영 선생님이라는 분과 가깝던데, 그분께는 편지로 지연양 소식 전하는 게 좋겠어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지연양이 편지를 보낸 이후부터 4년동안 저희쪽에서 그분을 감시하기도 할 겁니다. 혹시라도 지연양을 찾는 일이 벌어지면 번거로운 일이 생길 테니, 만에 하나를 위해서입니다.’

 

  모든 걸 준비해온 것처럼 보였다. 황갈색 서류봉투 안에는 공선생에게 편지를 쓰게 될 거라는 듯 편지지와 편지봉투까지 들어있었다.

 

  지연은 공선생에게 다부지게 입을 꾹 다물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지난 토요일에 직접 말씀 못 드리고 이렇게 편지로 말씀 드리는 걸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고, 그동안 고민 많이 해왔었다고.

 

  우선은 경기도에 있는 기숙학원으로 간다고, 휴대폰도 해지시키고 악착같이 공부할 거라고. 꼭 성공해서 선생님 찾아뵙겠다고, 종종 편지로 소식 전할 테니 연락이 안된다고 걱정하지 않으시면 좋겠다고. 지난 4년간 선생님이 보내주셨던 책들이 가장 좋은 친구였던 것 같다고, 공부하는 동안에도 책 읽는 시간은 반드시 갖겠다고. 다음에 만나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그녀는 거짓말을 한 죄책감 위로 꼭 4년을 잘 보내겠다 다짐하며, 여자가 권했던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편지지를 채워 넣었다.

 

 

  현재 시간 오전 10시 30분.

 

  한지연, 그녀는 자신이 어떤 앞으로의 날들을 마주할지 가늠도 못한 채. 반드시 가지고 가야할 게 뭐가 있을지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얼마 되지도 않는 물건들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시간을 보낸 지연은 아예 갈 때 입고 갈 옷부터 입고 있자는 생각에 할머니가 5년 전 직접 떠 준 목도리부터 그대로 목에 둘렀다. 지갑속에 있던 할머니와 단 둘이 찍은 사진 한 장과 함께 마지막 남은 할머니의 흔적이었으니까.

 

  그리고는 외투를 입기 위해 몇 개 걸려있지도 않던 헹거를 보던 그녀는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은 채 대충 올려진, 지난 토요일에 입고 나갔던 패딩을 들었는데.

 

  “……?”

 

  지연은 패딩을 옆구리에 끼어 넣은 채 허리를 굽혔다.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던 것.

 

  “아…….”

 

  이게 뭐지 싶다가 금방 기억이 떠오른 지연은 일어서서 손수건을 쫘악 폈다. 지금에야 느끼는 거지만 손 끝에 닿는 질감이며, 눈에 보이는 색감이며 모든 게 처음이었다.

 

  “엄청 비싼 거 같은데…….”

 

  토요일 저녁,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제안을 받고 점퍼만 대강 헹거에 올려뒀던 것을. 주머니를 열어둔 것도, 그 안에 이 손수건이 있었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녀였다.

 

  “그만큼의 좋은일… 일 거야.”

 

  저에게 손수건을 건넸던 아저씨가 한 말이 떠올랐던 지연은 힘주어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마치 부적인냥, 짙은 바다색상의 손수건을 고이 접어 메고 갈 가방에 넣었다.

 

  이 손수건이 가져다 줄 파장은 상상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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