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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긴장이 돼 무릎 위로 양 손을 재차 문질렀다. 흘끔 흘끔 본 유리창이 민망해 제 손등만 내려 보던 그녀였다.
“긴장할 거 없어요. 식사하면서 하시는 말씀 잘 듣고, 편하게 말씀 나누면 되는 자리니까. 본부장님 젠틀하신 분이니까 겁먹지도 말고.”
“네.”
지연은 입이 마르는 기분에 입술을 빠르게 핥았다. 달콤한 바닐라 향에 저도 모르게 다시 유리창을 흘끗 봤다.
여기가 몇 층이었지…….
지연은 하늘 위에 있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앞머리 없이 숱이 많은 검은색 머리를 늘 하나로 깡뚱하게 묶고 다녔던 자신이 진갈색의 끝이 굵게 말아져 부드럽게 흘러내린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기초화장품에 톤보정 없는 선크림. 그리고 약국에서 파는 딸기향이 나는 립밤을 발라본 게 전부였던 제가, 파우더로 보송보송하게 마무리 된 보기 좋은 살굿빛의 피부 위로 뷰러로 집어 올려 동그랗게 말아진 제 속눈썹을, 핑크코랄빛의 틴트가 물들어진 입술을 담고 있었다. 이 모든 모습이 그녀에겐 신기하면서도 전부 어색했다.
그러다 다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시내의 반짝거리는 야경에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그 안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예뻐서 자꾸 보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렇게 높은 곳에 와 내려다보면 아래에 있는 것들이 작아 보인다는 걸 새삼 실감하면서.
“저…….”
“내가 뭐라 그랬죠?”
목이 말랐던 지연은 여자의 다소 딱딱한 어조에 아차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든, 없든. 앞으론 언니라고 불러요. 말이라는 거, 작은 거 하나도 조심해야 해서.”
“네. 근데 물을 마시고 싶…….”
지연은 하던 말을 마저 다 하지 못한 채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앞으론 언니라고 부르라 했던 혜민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인데.
‘……!’
지연은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볼이 벌게졌다. 이내 눈을 연달아 깜빡인 그녀는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처럼 일순 주변이 환하게 빛이났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유한은 제게 정중히 인사하는 혜민에게 간단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지연과 마주한 두 눈.
유한의 시선이 지연의 말간 눈동자를 찬찬히 훑던 사이, 혜민은 두 남녀만 남긴 채 룸을 나갔고.
문이 닫히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한 지연은 유한의 시선을 가만히 보고 있기가 너무 떨리자 그만 절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름이.”
유한의 눈썹끝이 미묘하게 휘어졌다.
오늘 데리고 올라왔다 들었는데.
지난날 언뜻 사진 속에서 봤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머리를 손보고 옅게 메이크업을 시킨 것 같은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유희가 실제로 이 애를 봤으면 어땠을까. 제 동생이 그토록 동경하던 이목구비를 이 아이는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지연… 한지연이요…….”
“앉아요.”
지연은 그가 의자를 가리키며 가볍게 손짓하자 두 눈이 동그래진 채 애꿎은 입을 달싹였다.
손끝으로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매끄러워 보였다 피부결이. 남자 피부가 저렇게 새하얄 수 있을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목소리마저 처음 생크림을 맛봤을때처럼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유한의 인상은 꼭 동화 속 왕자님만 같았는데.
유한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벌렁 콩닥콩닥 요동을 쳤던 지연은 저도 모르게 입에 엄지손톱을 갖다 댔고.
“손톱 물어뜯는 버릇, 좋지 않은데.”
“…….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단 말도, 자꾸 하면 습관 돼서.”
양 팔로 팔짱을 낀 채 지연을 보고 있던 유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 룸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맹랑해도 보통 맹랑한 여자 애라고 생각했었던 게, 지연을 보자마자 봄눈 녹듯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대체 이런 간덩이 가지고 무슨 아바타 노릇을 하겠다고 한 건지.
유한은 모든 게 애처럼 순하게 느껴진 지연의 분위기에 아주 잠깐, 마음 속 어딘가가 정화되는 기분이 들자 조금 당황했다.
위 아래 할 것 없이 말 한마디, 시선 한 번 섞어보면 사람 속을 알아내길 귀신같이 알아내던 그가 지연의 악의 없는 밑바탕을 엿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무서워요?”
지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서운 건 지금 자신의 심장이었다. 왜 이렇게 자기 맘대로 빠르게 뛰는 건지.
태어나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이리 가까이서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 자체가 전부 긴장할 수밖에 없는 탓일까.
‘왜 이러지… 정신차려야 되는데……!’
지연이 스스로의 정신을 붙들기 시작한 사이, 견고한 노크음이 들리며 룸 안으로는 준비된 음식이 트레이 위로 고요하게 들어왔고.
호텔 직원들이 룸을 완전히 벗어나자, 유한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지연이요, 한지연이요……!”
“앞으론 차유희로 답해야지, 안 그러면.”
잠시 말을 멈춘 유한은 싱겁게 웃더니 물한모금을 마셨고.
“이 게임, 그냥 끝나버릴 텐데?”
“아…….”
지연은 눈꺼풀을 내리며 기름한 속눈썹을 작게 떨었다.
진짜 차유희란 아이의 친오빠라 들었는데.
그래서 더 분명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쩐지 유한이 편하게 농담을 하는 것만 같아 가슴 속이 몽글몽글 거리는 느낌이었다.
“다시, 이름 말해볼래요?”
“유 유희입니다 차유희!”
유한은 그만 풉 하고 웃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놀란 토끼눈을 뜨며 특이한 억양을 내뱉은 지연 때문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전라도 사투리가 이랬었나.
평소 유희가 갖고 싶어 했던 저 또렷한 쌍꺼풀이 있는 채로 커다랗게 동그란 눈. 그 눈은 아직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일이, 왜 하고 싶었을까요.”
지연은 그만 손가락을 잠시 떨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느껴진 사람이 금세 변했다 딱딱한 얼굴로.
유한은 제 눈치를 보며 대답을 머뭇거리는 지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고.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네…….”
“그런데도 하겠다고 한 거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난 이 일, 처음부터 반대했던 사람이라.”
정면으로 지연을 직시한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로 계속 그녀의 두 눈을 마주했다.
지연은 더 이상 타액으로 입안을 적실 수 없을 것 같아 바짝 마르는 입을 위해 몸을 조금 앞당겼고.
“그게…….”
“마시고 얘기해요.”
“네.”
유한은 지연이 말끝을 흐리며 두 손으로 물잔을 들자 물부터 마시라는 듯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유리잔 위로 지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를 본 그는 곤란하단 듯 엄지로 턱끝을 잠시 매만졌고.
이내 연달아 진동이 울리자 휴대폰을 꺼내 무음으로 바꾼 사이.
그의 귓가로 지연의 작지만 분명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돈… 때문에요.”
정말이었다. 돈 때문인 이유가 가장 컸고, 대부분이었고, 결국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이유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유한은 그런 지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고.
“겨우 돈 때문에 본인 인생을 버리겠다는 거예요? 아직 스무살밖에 안됐다고 들었는데.”
“……거잖아요.”
“다시 말해볼래요? 제대로 못 들었는데.”
희미하게 들린 지연의 말소리에 유한은 살풋 눈썹을 구겼다.
이내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린 그는 물잔을 들어올렸고.
지연은 테이블을 내려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스무살이든 마흔살이든… 결국엔 돈이 많아야 잘 살 수 있는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4년을 다른 사람 인생 사느라 본인 인생을 버려야 할 텐데요.”
“버리는 거… 아니에요.”
지연의 시선이 유한의 얼굴로 힘없이 닿았다.
목을 축인 뒤 물잔을 그대로 쥐고 있던 유한은, 조금 전까지 제 앞에서 긴장하고 있던 모습이 아닌 진지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짧게 주억거렸고.
“버리는 거 아니면요?”
“……. 투자하는 거예요. 이런 일 하지 않았어도 돈벌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일만 잘 하면, 4년만 지나면 평생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거잖아요.”
“청춘이에요. 이십대 초반의 4년이, 얼마나 인생에서 귀한 시간인지 알아요?”
유한의 진심 섞인 우려가 지연의 귓가를 울렸다.
지연이 감사하단 듯 애써 미소를 지었고.
“4년 동안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
자포자기하듯 흘러나온 지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에 담긴 염기에 유한의 관자놀이 위로 핏대가 꿈틀댔다.
“말이 4년이지, 그 시간동안 본인한테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래요.”
“하지 마라는 행동만 안하면 되는 거잖아요. 저… 잘 할 수 있어요.”
저를 믿어달라는 듯 제법 분명하게 답한 지연이 손끝을 꾹 짓눌렀다.
유한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어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이 일이 제 인생에서 어떤 위험을 부담해야 하는 일인지.
유한은 쓰게 고개를 끄덕이며 컵 위로 손가락을 한차례 쓸었다.
마음 한 구석이 아릿했다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이내 다시금 김실장이 보고했던 내용들이 선명히도 스쳐 지나갔고.
“우리집 강압 때문은, 아니었나봐요?”
“아…….”
침잠되려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농담조로 던진 말. 그 말에 지연은 그만 난처한 듯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는가 싶더니 애꿎은 컵을 들었다.
강압 때문인 이유도 있다는 표정. 그 날 것 그대로의 표정에 유한은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리다 이내 미간을 좁혔다.
이제야 덜덜 떨리던 손끝이 멎어있자 선명히 들어온 지연의 손.
곧 스물 하나가 되는 여자애의 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칠어 보였다.
물을 마신 지연이 유한의 눈치를 살피고자 그를 다시 바라본 때.
“이왕 하는 거, 4년 뒤엔 그 누구한테도 피해 없는 상태로 잘 마무리 되면 좋겠는데.”
“네.”
단단하게 입을 열었던 유한은 다시 컵을 들었다.
그의 눈으로 본 지연은 유희의 아바타로 너무도 부족했다.
표정관리며 어투며. 너무나 속이 훤히 드러나는 심성이며.
그러나 지연이 비즈니스나 이 바닥의 사교를 할 것도 아니고, 대학생활만 할 것을 감안.
특히나 장비서의 지휘하에 혹독하게 트레이닝 될 것들을 고려한다면 골치 아픈 사고를 칠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내가 내일 두 달간 출장을 가서, 두 달 뒤에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땐 지금이랑 많이 달라져 있겠어요?”
“아… 네……!”
“먹어요, 식겠네.”
지연은 유한의 깔끔한 미소와 손짓에 고개를 애써 힘주어 끄덕였다.
달라져 있겠지. 아니, 반드시 달라져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후로부터 시작된 지연의 독한 연습은 해가 바뀌고 겨울의 절정에 다다르면서부터 모두의 예상보다 더 일찍 그 결과가 하나 둘씩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스물 하나의 한지연은 스물의 차유희로, 제법 그럴듯하게 탈바꿈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