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페에 손님이 많았나봅니다.”
박비서는 생각보다 태열이 늦게 차에 오르자 허허 웃었다.
태열은 귀찮다는 듯 출발하란 표시로 대충 턱끝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미간을 구긴 채 오른편으로 시선을 살짝 옮겼고.
“카페에 뭐 두고 나오신 거라도…….”
“출발이나 하죠.”
“예, 그러믄요.”
박비서는 어딘지 모르게 날서있는 태열의 언행에 금세 꼬리를 내리듯 소리를 줄였다.
이내 태열은 이맛살을 구기며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왼손으로 들고 있던 일회용잔 위를 검지로 툭, 툭 하고 건들였다.
그리고는 제 오른손등을 잠시 보더니 팔뚝 부분의 냄새를 맡으려는 듯 코 가까이 옷깃을 가져다 댔고.
“뭐 안 좋은 냄새라도…….”
“운전 제가 할까요.”
“조용히 가겠습니다.”
태열은 선명하게 느껴지는 커피 냄새에 입가를 짜증스럽게 비틀었다.
이 찝찝한 기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껏 아무리 휴대폰을 확인하며 걸어 다녔어도 그 누구하나 부딪혔던 사람 없었건만 왜 하필이면.
분명 미안하다고 바로 사과도 했고 어떻게든 뒷말 나오지 않게 보상을 해주려고 했더니.
아 좀 쓰리네…….
컵을 쏟으며 제 손등도 커피에 튀겼던 태열은 아직까지 얼룩진 옷을 본 지연의 표정이 잊히질 않았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것이지 뭐 그렇게 절망스런 눈으로 글썽인 건지.
태열은 자신이 엄청난 범죄라도 저지르고 나몰라라 도망 온 사람이 된 기분에 꺼림칙했다.
자신이 다시 커피를 하나 새로 사서 픽업대로 갔을 무렵 또 카페로 들어왔던 그녀의 얼굴은 어땠는가.
살다보면 사람이랑 부딪혀 옷에 커피쯤 묻을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불안한 얼굴로 주문을 했던건지.
그는 자꾸만 지연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떠오르자 저답지 않게 별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는 것만 같아 거북했다.
분명 어디서 그런 표정을 봤던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 기억.
“……?”
백미러를 흘끗 봤던 박비서는 이상하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열이 성가신다는 듯 그의 얼굴을 세게 쓸어내린 뒤였다.
그 시각.
막 차에 다시 들어온 지연은 혜민에게 먼저 커피를 건넸다.
“여기요.”
“차유희.”
지연은 혜민이 제가 건넨 컵을 받자마자 꺼낸 말에 침을 삼켰다.
차안으로 감도는 공기가 차가웠다.
“너 누구랑 부딪혔던 거야, 아님. 네가 그냥 실수로 쏟은 거야.”
“부딪혔어요.”
“부딪힌 사람이랑은, 별 일 없었고.”
“네… 전화번호 알려주려고 했던 거 괜찮다고 했어요. 세탁비도 안받았고…….”
“그래, 잘했어.”
혜민은 들고 있던 컵을 센터페시아에 있던 컵홀더에 끼었다.
막 들려온 클랙슨 소리에 일단 빠르게 차를 움직였고.
지연은 두손으로 초코라떼가 든 컵을 꽉 쥔 채 입술을 짓눌렀다.
“어떡하죠 이 옷은…….”
“트렁크에 비상용으로 챙겨둔 여벌 있으니까 걱정말고. 너.”
혜민의 차가워진 말투가 낯설진 않은 듯. 지연은 운전석 쪽을 침착하게 바라봤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요.”
“뭔데.”
“어떤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 이렇게 옷이 망가져서 너무 놀랐어요. 아무리 놀랐어도 목적했던 건 했어야 했는데 그냥 차로 와버렸구요.”
혜민은 지연의 느릿하면서도 분명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홀더에서 컵을 들어 올렸고.
“그깟 옷 더럽혀진 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 그 옷 하나 더럽혀 졌다고 그렇게 당황해서 오면 어떡해,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았어야지.”
“그래도 면접날인데…….”
“내가 말하지 않았었어? 차에 항상 여벌 옷 가지고 다닌다고.”
“네…….”
“차라리 잘됐어. 앞으로 대학생활 하다보면 아무리 조용하게 다녀도 원치 않게 사람들이랑 부딪힐 일 많을 건데, 실전 연습했다 쳐.”
“네.”
“작은 일 하나에 감정 담지 말고. 그렇게 눈물 보이면 어떡하겠어, 안 그래?”
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손으로 꼭 쥐고 있던 일회용컵을 꾹 눌렀다.
혜민은 네비게이션을 빠르게 확인하더니 사이드미러를 연달아 보았고.
“어디 다친 덴 없고.”
“네.”
“다행이네.”
지연은 여전히 왼쪽 손등이 얼얼했다. 꿈틀꿈틀 거리듯 오른쪽 손으로 살살 만지고 있던 그녀의 움직임은 차가 멈추자 동시에 멈췄다.
“옷부터 갈아입고 가게, 기다려.”
지연은 새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더 강해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
“하던대로만 해, 말했지? 면접 결과 안좋아도 너한테 책임 안따지니까 걱정말라고.”
혜민은 지연의 가슴팍에 수험표를 달아주고는 어깨를 토닥거렸다.
실제로 자식을 수험장에 보내는 부모 심정이 이러할까.
괜히 걱정이 되었던 혜민은 그 마음을 표현치 않으려고 무심한 듯 말했다.
적어도 이 면접만큼은 믿음이 컸으니까.
그동안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 왔던 건지, 지연은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고전이라 불리는 책에서 발췌한 지문을 독해하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물론 인문학적 사고까지 그 깊이가 제법이었다.
때문에 교대 면접 준비를 위해 데려온 교수진들에게도 적지 않은 칭찬을 받을 수 있었는데.
지연은 힘주어 미소 지었고.
“갔다 올게요.”
“그래.”
지연은 혜민이 엄지를 치켜올리며 싱긋 웃자 함께 눈을 맞추고는 차문을 열었는데.
“아.”
“……?”
“사투리 나올까 걱정하는 것도 그냥 잊어버려, 교수들 면접보는 애 긴장했다 생각해서 말 꼬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오케이?”
“네.”
혜민의 여유로운 표정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차에서 내렸다.
오전반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았을까.
오후반에 속했던 지연은 수많은 학부모들과 차량에 숨을 골랐다.
아무도 모르겠지. 아무도 모를 거야.
지연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지금껏 자신을 아는 사람도, 자신이 아는 사람도 단 한 번 본 적 없던 이 서울.
거기다 그녀 자신이 봐도 외적으로까지 서울사람처럼만큼은 아니었지만, 예전보다 정말 예뻐진 자신이 아직까지도 낯설었으니, 아무도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나만, 나만 잘 하면 돼.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1주일 전과 이틀 전, 혜민과 함께 학교에 와봤던 지연은 꽤나 익숙하게 면접이 치러지는 건물로 향했지만.
‘후우……!’
문득 떠오른 할머니와 부모님에 대한 생각에 그녀는 빠르게 되뇌었다.
내가 행복한 거,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게 할머니는 물론 부모님 모두가 바라는 것일 거라고.
4년. 딱 4년만 이렇게 지내면,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고.
그렇게 그녀는 두 손 힘주어 말아 쥐었는데.
“아…….”
손등의 살이 당겨진 건지 아까 커피가 튀었던 쓰라린 기운에 지연은 제 손등을 내려 봤고.
유독 선연하게 붉은 부위가 마음에 쓰였음에도 그녀는 바깥공기가 추웠는지, 일회용 손난로가 들어있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빠르게 넣었다.
같은 시각.
태열은 캠퍼스 안에 들어오자마자 숨이 막힌 듯 이맛살을 구겼다. 뭔 놈의 대학이 이렇게 작은 건지. 어디 편히 드러누울 때도 없을 것 같았는데.
이내 그는 캠퍼스맵을 찾으려는지 두리번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눈썹사이를 좁혔다.
그때.
“저… 혹시 면접 보러 오셨어요?”
볼이 상기된 여자 두 명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적당히 그을려진 피부에 짙은 눈썹 밑으로 블랙홀 같이 깊은 눈매와, 누가 빚어놓은 것마냥 곧고도 날카롭게 우뚝 솟아있던 코. 그 밑으로 적당한 크기의 붉은 빛을 보이고 있던 입술.
이 모든 이목구비를 담고 있던 작은 크기의 얼굴에 날렵한 턱선.
제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엉망인 머리스타일조차 그가 직접 만져 그 특유의 포마드 헤어스타일이 되어, 차가운 인상이긴 했음에도 모델 같은 체격에 한눈에 여자들의 시선을 확 끄는 외모였다.
태열은 말하기 귀찮은 듯 그대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후 재학생들의 봉사를 빙자한 호의를 받으며, 그는 면접장 건물을 찾을 수 있었고.
마음에도 없는 감사의 말을 대충 내뱉고는 그대로 건물 쪽으로 몸을 움직인 때.
“…….”
순간적으로 구부러진 그의 눈썹 끝.
그 밑으로 그의 눈길이 어느 한 쪽에서 멎었다.
어깨 아래로까지 단정하게 내려온 짙은 갈색머리를 얌전히 귀 뒤로 넘긴 채, 유독 맑고 동그란 동공으로 건물 외관을 둘러보는 여자. 커피로 얼룩진 상아색 상의대신 티 없이 깨끗한 흰 니트를 입고 여전히 검은색 롱 코트를 오픈한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저 여자, 지연이었다.
‘……!’
지연은 태열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차분하게 진정시켰던 심장이 갑자기 울렁였다.
저 남자도 여기 시험보러 온 건가 하는 생각에 앞서, 아까 카페에서의 일이 떠올라 미숙하게 대처했던 게 후회됐던 것이다.
후우, 지연은 떨리는 숨소리를 입술 사이로 내쉬었다.
세상이 정말 좁다더니 이렇게 또 볼 수 있는 걸까.
설마 안좋은 징조일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여기서 자신을, 나 한지연을 알아보는 사람 없겠지 하는 불안감까지 갑자기 커졌던 것.
‘뻔뻔해져. 네가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야. 뻔뻔하라고, 알겠어?’
그 순간 환청처럼 들려온 혜민의 말소리.
그 강단있는 말에 지연은 애썸 마음을 진정시키며 두 다리에 힘을 줬다.
동시에 태열은 불편한 헛기침과 함께 이마를 문질렀다.
아는 척을 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고 뭘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시선이 스친 것 같은데 그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고 지연이 그대로 쌩하니 가버리니 왜 허무한 기분이 드는 건지.
그는 아무래도 오늘 컨디션이 제상태가 아니란 생각에 훤히 드러난 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정작 본인이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었다는 건 알고나 있는 건지, 태열은 다시 시간을 확인하며 지연이 들어선 건물 안으로 향했다.
*
“수험표 확인할게요.”
지연은 강의실 입구에서 자신을 막아선 남자에게 가만히 수험표를 건넸다.
건물 2층으로 올라와 좌측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곳이 자신의 수험장인 게 확실했다.
지연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을 거란 확신으로 남자의 반응만을 기다렸고.
“잘 찾아 오셨네요, 들어가셔서 칠판에 부착된 좌석 배정표 확인하시고 앉아있으면 돼요.”
“네.”
작게 고개를 숙이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칠판으로 향하며 심호흡을 했다.
성별로 수험장을 분리해둔 것인지, 강의실 안에는 온통 여학생들 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아주잠깐, 아까 그 남자를 또 보면 어떨까 걱정했었는데.
‘이미 다 지난일이야. 신경 끄자.’
지연은 다시금 심호흡을 했다.
어서 가방 안에 넣어둔 면접 자료를 어서 꺼내봐야겠단 생각을 하며, 외워둔 수험번호를 떠올리며 좌석을 찾았다.
그렇게 지연이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를 찾은 때.
“저 화장실 갔다 와도 돼요?”
지연의 앞 좌석에 앉아있던 여학생이 손을 들며 모기 같은 목소리로 재학생 봉사자에게 질문했다.
“네 화장실 다녀오실 분들은 미리 다녀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려뒀던 지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몸을 세웠다.
자신 또한 아무래도 화장실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지연은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의 세기가 평온해지기를 바란 듯, 양손을 꽉 맞잡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머릿속으론 지금까지 면접준비를 하며 칭찬 받았던 말들을 떠올리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던 때.
“와 이거 실화냐, 저 얼굴로 교대 왜 올라 하지? 입학하면 여자애들 난리나겠네.”
“제발, 제발 붙어라. 제발! 눈호강이라도 좀 하자!”
“저쪽에 교수님들 누구 들어갔는데?”
건물 로비에서 길안내를 해주던 사람들과 같은 띠를 두르고 있는 여자들의 작지만 뚜렷한 웅성거림.
그 호들갑에 지연은 잠시 멈춰서야 했고.
시야를 확보하고자 고개를 돌리다 봐 버린 태열의 모습.
“야 야 비켜 너 뒤에 학생!”
“어머 죄송합니다! 화장실 가시게요?”
“네.”
지연을 막아 세웠던 여자가 비켜주자 지연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이토록 여자들을 시끄럽게 만든 사람, 설마 아까 그 남자일까.
이내 지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큰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들이 보통 남자들과는 많이 달랐지만 어쩐지 무섭고 차가워 보이는 게, 지연은 여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에 공감할 수 없다 싶었던 것.
그러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싶어, 빠르게 생각을 돌리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밖으론, 가루로 흩날리던 눈이 굵고 탐스럽게 교내를 뒤엎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