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나저나 어때, 지하철 버스 탈만 했어?”
“호선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서 놀라긴 했는데… 많이 기다리셨어요?”
“나도 방금 왔어.”
지연은 두르고 있던 검은색 울 목도리를 풀었다. 혜민이 멋쩍게 웃은 지연에게 따뜻한 유자차가 담긴 머그잔을 건넸다.
“어땠어 기분이.”
“그냥 환승이란 것도 신기했고 서울이 이렇게 넓구나, 사람 진짜 많구나… 그동안 언니랑 차타고 다닌 게 정말 편했던 거구나……?”
머그컵을 잠시 책상 위로 내려놓은 지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정전기가 일어난 뒷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어느덧 2월 말.
면접날 운이 좋았던 건지 공부했던 내용과 흡사한 문제가 두 개나 나와 너무나 떨렸음에도 차분하게 말을 이을 수 있었고. 최초합격 발표 날까지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며 지냈던 끝에, 지연은 차유희란 이름으로 정시모집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되던 각 분야의 레슨들 사이에서 오늘 처음으로 받은 자유시간.
지연은 고민 끝에 서울 탐방을 선택했다.
말이 탐방이지,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서울 시내 대중교통을 타보고 싶었던 것.
물론, 시시때때로 혜민과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긴 했지만.
“그나저나, 어제 몇 시까지 치다 잔거야?”
혜민은 피식 웃으며 키보드 위로 엉켜있는 헤드셋을 들어올렸다.
지연이 볼을 붉히며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모르겠어요 한 두시였나…….”
“아휴, 적당히 해 너 음대가는 거 아니야.”
“그래도 피아노 수업 있다니까…….”
지연은 원망의 눈초리로 헤드셋을 보더니 제쪽으로 가져와 엉켜있던 줄을 풀었다.
다른 건 다 잘 하겠는데, 이 피아노. 이 피아노는 정말 손가락이 머리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참, 오늘 요가는 스킵. 저녁 스케줄 생겼어.”
“무슨 스케줄이요?”
지연은 의아한 듯 혜민을 바라봤다.
이렇게 일정이 갑자기 바뀌는 일은 흔치 않았다.
혜민은 마저 유자차를 들이키고는 신디 사이저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기억하지? 본부장님.”
“본부장님…이요?”
“너 여기 처음 온 날, 호텔에서 같이 저녁 했던 분. 기억 안나?”
기억이 안나는 게 아니었다. 지연은 혜민의 말을 듣는 순간 긴장이 되며 심장 어딘가가 덜컥거려, 자신이 알고 있는 본부장님 말고 다른 분이 계시나 싶어 되물었던 것이다.
어떻게 기억이 안날 수 있을까.
지연에겐 그날 유한은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이었는데.
어른 남자와 그렇게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게, 처음 먹어봤던 음식들의 맛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 깊은 순간들이었는데.
‘그때랑 나… 많이 달라져 있어 보일까.’
문득 상경했던 그날의 제 모습이 떠올라 지연의 입가가 아릿하게 움직였다.
*
오후 4시, TP전자 본사 회장실.
“다들 나가있게.”
송회장의 말 한마디에 이곳에 와있던 임원 둘과 비서진은 빠르게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 어떤 힘을 주지 않고도 주변인들에게 위엄을 느끼게 하는 그의 얼굴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일흔 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거구의 몸집을 지닌 채 강철 체력으로 소문나 있는 그의 기를 쪽쪽 빨아가는 이가 있었으니, 가장 아픈 손가락의 손자놈. 송태열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막들어와 막들어오길! 네 애비가 이렇게 가르쳤더냐!”
“그럼 할아버지가 나한테 한짓은, 뭐 어떻게 설명할건데!”
태열의 훤칠한 이마는 완전하게 구겨져 있었다.
송회장은 태열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소파에 앉자 혀를 끌끌 찼고.
“못난놈 같으니라고, 그깟 차 몇 대 뺏어갔다고 이난리야 이난리가!”
“차뿐이야! 카드는, 내 카드는!”
태열은 입가를 신경질적으로 비틀었다.
차와 카드를 모두 막아버린 일. 이건 그의 손과 발을 전부 묶어놓은 거였다.
“다음주가 개강 아니더냐.”
“개강이랑 그거랑 뭔 상관… 하, 설마. 지금 뭐 4년동안 나한테 차없이 학교다니란 거 아니지?”
어이없단 듯 웃었던 태열은 이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제 조부를 응시했고.
“5월 중순 쯤에 기사 내보낼 생각이다, 네 아버지 당 경선 맞춰서.”
“뭐, 나 제대해서 교대 다시 들어간거?”
크음! 대답대신 헛기침을 한 송회장을 본 태열이 가볍게 코끝으로 웃었다. 그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그래서. 입학하고 계속 평범한 대학생 코스프레를 해라?”
“적어도 다른 학생들한테 위화감 느끼게 해선 안 되지 않겠냐!”
“그럼 아예 졸업 할 때까지 기사같은 거 내보내면 안되지 않나?”
흐음, 송회장은 태열이 신경질적으로 뱉어낸 말의 가시에 얼굴에 힘을 줬다.
기사화를 시킬 건지에 대한 내용은 여전히 고민중이었던 부분이었으니.
송회장은 태열이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며 한 쪽 다리를 꼬자 안경테를 치켜 올렸고.
“다달이 네놈 통장으로 용돈 줄테니 학기만이라도 참고 살아. 방학땐 어딜 나가있든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군대까지 갔다온 놈이 그걸 못해!”
“아무리 눈가릴래도 나 알던 놈들이 몇인데. 내가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모를 거 같아?”
“제대하고 달라진 모습 보이자는 거지 노력, 노력이라도 하는 거처럼 보이란 말이야!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놈이 어딨어!”
이마를 짓누르며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다섯손가락을 그대로 올린 태열은 날숨을 씹어내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 할아버지 말 한마디면 제 수중에 있던 모든 것들이 없어진다는 것을.
차도, 카드도 없이 학교를 다녀라… 하…….
웬만해선 제 아버지를 면전에 보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죽어도 아쉬운 소리는 못하겠던 그는 혀로 입안을 느리게 굴렸고.
“얼마 줄건데 용돈.”
송회장은 앞에 놓인 찻잔을 쥔 채 고심하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속이 터지고 있던 태열은 참아야 한다를 몇 번이나 되뇌었고.
“할아버지, 나 지금 진짜 얼마나 참고 있는지…….”
“백.”
“뭐, 백? 한달에 백?”
송회장은 태열의 기가찬 모습에 찻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모를 리 없었다 제 손자놈의 돈 씀씀이를.
“그거면 부족하진 않겠지, 안그러냐.”
“하…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대신. 네놈이 교내에서 10등 안에 들 때 마다 200% 인상해주마.”
띠릭.
“한실장, 박비서 들여보내도록 하게.”
태열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제 조부가 인터폰을 하는 모습을 지켜만 봤고.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자네 이리 앉아보게.”
“네 알겠습니다.”
태열을 막지 못했던 박비서는 쩔쩔매는 모습으로 송회장이 가리킨 태열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자네. 앞으로 이놈한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말게. 알겠나.”
“……. 예, 그러지요.”
“그리고 너. 네놈이 만에 하나 학교다니면서 소란을 일으키거나 할 시엔 그 즉시 박비서 회사에서 내보낼 거니 그런 줄 알아. 알겠어!”
태열에게 피붙이인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 박비서는.
그런 그에게 목줄을 걸고 협박하고 있는 거였다.
태열의 숨이 잠시 막혀오며, 온갖 짜증이 뒤섞이던 가운데.
4년. 4년 뒤를 위해 참아야 함을 안간힘을 다해 떠올리며 버텨내고 있었다.
*
“언니는요?”
“어 난 본사 들어가봐야지. 말했잖아 너 개강 전까지만 자주 볼 수 있을 거라고.”
“아…….”
호텔로 오는 길 내내 유한을 본다는 생각에 긴장됐던 지연은 안전벨트를 끄르며 작게 탄식했다.
그간 매일같이 혜민과 함께했던 것도 이젠 그럴 수 없다는 데서 괜한 서운함이 느껴졌다. 의지할 곳 없는데서 저도 모르게 혜민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엔 개강 때가 되면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내심 편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얘가 왜 이래, 서운해? 너 지난 번에도 본부장님이랑 식사는 둘이했어. 기억 안나?”
“아뇨 나요.”
“차라리 나도 너 하나 전담이었을 때가 편했다. 그래도 긴장 놓진마, 어디서 누가 너 감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연은 혜민의 센 소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내려,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예의야. 못해도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될 거니까 그런 줄 알고.”
“네.”
지연은 조심스레 차문을 열더니 다시 뒤를 돌았다.
“그래도 앞으로 삼일 동안은 매일 보는 거죠?”
“그래, 그리고 개강 후에도 웬만해선 매일 보긴 할 거야. 너한테 보고 받아야지. 빨리 가!”
혜민은 지연의 동그란 눈빛에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새 제게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러면 안되는데, 혜민은 그녀 자신조차도 지연을 친동생인 것마냥 마음 쓰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개강해서는 지연으로 하여금 감정단속, 마음단속에 보다 철저하게 신경쓰도록 강조했던 게 본인이었다. 정작 본인이 그걸 못하고 있었으니.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쉬이 마음주지 않았던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아마 지연이 갖고 있는 안쓰러운 맑음 때문이었을 터.
“조심히 가세요.”
지연은 그런 혜민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 건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차문을 닫았다.
‘후우…….’
혜민의 차가 빠르게 호텔 정문을 비껴간 사이, 지연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 별이네……!’
처음이었다, 서울에 와서 반짝, 하고 빛나는 제대로 된 별을 본 것이.
이내 지연의 눈동자 또한 별처럼 빛나는가 싶더니 그 위로 투명한 액체가 서렸다.
‘아… 안되는데.’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내리더니 두 눈가에 힘을 줬다.
불과 두 달여 전까지는 매일 밤이면 입김에도 우수수 쏟아져 내릴 것 같이 수많던 별들을 보았던 자신이었는데.
흐으음, 흠!
지연은 목이 메여오려 하자 미간을 찡그리면서까지 목을 가다듬었다.
우울한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아, 울고 싶지 않아 보다 더 많은 것들에 집중해왔었다. 잠이 들 때도 피곤해 지쳐서 그냥 잠들 때까지, 그렇게 악착같이 지내왔었다.
이왕 선택한 일, 후회나 미련같은 거 없이 모든걸 받아들이자 싶어서.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온 몸으로 령화도에서의 추억이 짙게 느껴지자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그렇게 그녀는 빠르게 눈을 질끈 감더니 작은 입술 사이로 큰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움직인 그 순간.
……!
“죄송합니다.”
눈가 끝을 저도 모르게 찌푸렸던 지연은 고개를 작게 숙이더니 빠르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와 동시에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고.
“죄송합니다 앞을 잘 봤어야 했는데. 괜찮으세요?”
남자의 말과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황했었던 지연의 낯빛은 제법 침착하게 정돈돼 있었다. 태열이 한달 전쯤 카페에서 봤었던 그때의 얼굴과는 상이하게.
“안괜찮은데.”
태열은 지연의 두 눈을 제대로 내려 보며 정확히 말했다.
그의 옆에 있던 친구 한명은 기가 막힌 듯 입가로 빈웃음이 새나왔다. 분명한 건 이 여자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
“……. 세게 부딪혀서 그런가 봐요, 다시 한 번 정말 죄송합니다.”
지연은 너무나 날카로워 보이는 태열의 언행에 조금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크게 동요치 않은 채 정중하게 다시 고개를 숙였고.
이내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때가 확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도망치듯 몸을 움직였다.
태열이 지연의 빠른 걸음을 구경하듯 가만히 있다 어느새 그녀가 호텔 안으로 들어선 때.
“너 미쳤냐?”
태열은 친구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사라진 지연의 자리를 보며 눈썹만 까딱였고.
“너 방금 뭐했던 거냐?”
하, 저 미친놈.
태열의 친구는 그가 자신의 말에 대꾸할 가치도 없단 듯 호텔 안으로 향하자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자신의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서려다 대뜸 멈춰 서서 그 여자만 보더니 작정한 듯 다가갔던 게 태열이었다.
지금껏 그가 여자한테 먼저 다가간 걸 본 적이 없었기에 몹시도 흥미로웠던 것도 잠시. 별 미친놈처럼 구는 제 친구의 모습이 여간 또라이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송태열 그라면 어떤 여자든 마음만 먹으면 오늘 밤 이 호텔 룸으로 함께 직행하고도 남을 수 있었을 턴데. 마음에 들었으면 못해도 번호라도 받아내든가. 뭔 짓이었는지.
“어디갔지.”
태열은 왜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헛것을 봤나 싶었다.
그러나 글썽거린 그녀의 두 눈을 본 순간 지난 번 그 여자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이미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보니 그때 봤던 얼굴 그대로였다.
“저깄네.”
지연의 위치를 확보한 태열은 망설임없이 그녀가 있는 엘리베이터 구역 쪽으로 빠르게 향했다.
무슨 말을 꺼내겠단 심산으로 다가갔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또 제 몸에 부딪힐 줄은 몰랐다. 뭐, 어딘지 모르게 다른데 정신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 자신이 멈춰서긴 했지만.
그런데 막상 제 얼굴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사과만 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 빈정이 제대로 상해 열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림색 대리석 바닥을 지나 계단위로 발을 들었던 송태열.
그는 지연이 열린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들어가자 입술을 씹으며 멈춰 섰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은 동시에 빠르게 들었던 생각.
붙었으려나.
태열은 지연이 탄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의 숫자가 변하는 걸 보며 눈썹 끝만 훑었다.
한편 지연은 홧홧해지는 얼굴을 애써 두 손을 꽉 말아 쥐며 진정시키려 했다.
면접날 그렇게 당황했던 것 보다는 아주 잘, 아주 잘 대응한 것 같은데.
이제부터는 정말 길거리에서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하면 안되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참아야 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답답한 거였는지 새삼 알았다.
그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을 듣는 건 그 사람 무례한 성격탓이라 그냥 넘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 머리가 쇠로된 것도 아니고 아팠으면 뭐 얼마나 아팠다고. 그때 난 커피 진짜 뜨거웠었는…….
‘어……?’
지연은 놀란 듯 입술을 벌렸다. 이내 작게 벌렸던 입술 사이가 커지는 건 물론 어느새 두 눈까지 뜨악한 듯 커져버렸고.
아까 그 사람 그때 그……!
맞아, 맞아… 같은 사람이야. 키도 그렇고 얼굴도 목소리도… 맞아 같은 사람.
후우…….
그녀는 왜 같은 사람이랑 두 번이나 부딪혔는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혜민이 누누이 말했던 좁은 세상.
그녀는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혹시라도 학교에서 보게 된다 하더라도 놀라지 말자 다짐하며 침을 꾸욱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