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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세미나 끝나고 나오는 길입니다.”
이어폰을 낀 채 시간을 내려 본 유한은 그 특유의 단단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제게 인사해오는 직원들에게 간단히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것에서도, 불과 다섯 시간 전 귀국한 이의 피곤함 따윈 느낄 수 없었다.
“수고했다. 그 아이랑은.”
“곧 레스토랑에서 볼 겁니다.”
“그래, 개강이라던데 격려 잘 하거라. 네가 유희 오빠 아니냐. 네 동생일 봐주는 앤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유한은 차회장의 말에 쓰게 입매를 비틀었다.
격려라…….
이런 일을 벌여 놓고 격려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것을 정작 모르고 있는 걸까.
그는 두 달 전 봤던 지연의 모습이 떠오르자 안타깝다는 듯 눈가를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인터넷이 빠를 줄은 몰랐어요.’
‘아파트도 엄청 많고 외제차도 엄청 많고, 건물도 높고… 실제로 이런 거 본 적은 처음이라…….’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도 되게 많은 거 같은데…….’
유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울에 와보니 어떤 것 같냐는 제 질문에, 정제되지 않은 감상을 그대로 표출했던 지연의 모습이 몹시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유한이 두 달 동안 그녀가 얼마나 달라져 있나 궁금해지기 시작한 때.
“이게 아닌데…….”
지연은 창가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머리를 정돈했다. 벌써 여섯 번째 바꾸는 가르마였지만 결국 제자리. 왜 이곳에 들어오니 제 얼굴이 자꾸 이상해 보이는지.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딱 여기 이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그때도 이 시간쯤이었을까…….
으 모르겠다.
지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입이 마르는지 앞에 놓인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예전에 중학교때였나, 반에서 누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목표로 팬사인회를 온다고 해서 결석까지 했었는데. 그때 그 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리고는 옆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내가 내일 두 달간 출장을 가서, 두 달 뒤에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땐 지금이랑 많이 달라져 있겠어요?’
달라진 거, 내가 많이 달라진 거…….
지연은 입을 앙 다문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예쁘게도 말아 올려진 속눈썹이 결 좋게 움직였다.
‘취업준비 때문에 교정하는 분들 많은데 대체적으로 나이가 어릴수록 더 빨리 습득하기도 하고. 우리 학생분은 이런 템포로만 계속 얘기한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이네요.’
제일 걱정했었던 사투리.
그녀가 살던 섬에 있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의 억양이 보다 거세고 빨라, 학교에 다닐 때면 반에서 가장 억양의 변화 정도가 심함을 스스로 느꼈기에. 지연은 이곳 서울에 와서 제 생각을 전부 말하는 것에, 그리고 평소와 같은 템포로 말하는 것에 주저주저 했었다. 물론 지금도 의식적으로 빠르게 말하기는 피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가장 걱정했었던 사투리가 조금은 나아졌단 생각에 다행이라 여기며 다시 물을 마시려 했는데.
“많이 기다렸어요?”
“아 아니요……!”
유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지연을 보고 짧게 미소 지었다.
놀란 것 같이 또 벌게진 저 얼굴은 원래 저렇게 잘 붉어지는 지.
“앉아요, 배 많이 고팠을 거 같은데.”
지연은 그의 손짓에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자리에 다시 앉았다.
유한 또한 그녀의 맞은 편에 앉더니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옆 의자 위로 놓았고.
그 사이 지연의 동그란 눈이 유한의 옆얼굴을 훔쳐보듯 빠르게 보았다.
“왜, 뭐 할 말 있어요?”
“아 아니요……!”
지연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 채 나왔다. 갑자기 마주쳐버린 유한의 눈에 그녀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싱겁다는 듯 유한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음식 나오기 전에 줄게요, 받아요.”
“이게… 뭐예요?”
“노트북. 학교 다닐 때 쓰라고 산거예요, 작고 가벼워서. 참고로 아직 우리나라엔 출시 안된 거예요.”
일부러 웃으며 뒷말을 붙인 유한은 제가 건넨 상자를 두 손으로 받은 지연을 가만히 바라봤다.
살짝 벌린 입 사이로 감탄사가 작게 흘러나왔지만,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깔끔하게 좋진 않았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네, 감사합니다.”
지연은 미소를 짓는다고 입가를 움직였다. 이를 본 유한은 느른하게 시계 버클을 풀렀고.
“혹시 불편해요? 이렇게 받기만 하는 거.”
“아니요.”
지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에 유한은 한쪽 다리를 꼬며 살풋 미간을 좁혔다. 순식간에 화가난 듯 얼굴의 나머지 근육은 멈춘 채.
“거짓말 하는 거 티 나는데, 거짓말 할 거예요?”
“…….”
일순간 지연의 가슴은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의 눈썹 앞머리는 위로 올라갔다 불안정하게 흔들거렸고.
이내 지연은 노트북 상자위로 손가락을 작게 꿈틀거리듯 움직였다.
“죄송해요 거짓말해서…….”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들려왔지만 기어들어간 지연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끝엔 들려온 건 유쾌한 유한의 웃음소리였다.
당황한 지연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다 입을 달싹였다.
“하하, 미안해요 내가 장난좀 쳤어요.”
“어 어떤 장난이었는지…….”
“일부러 무섭게 굴어봤어요, 나 무서운 사람 아니라고 했던 말. 기억하죠?”
유한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진정 편할 때만 나오는 그의 눈웃음에도 지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저 작게 아, 하며 그의 화난 모습이 장난이란 것에 마음으로 안도할 뿐.
“거짓말 티 났다는 건 맞아요, 내가 이것도 말했었던 거 같은데. 의사 표현은 분명하게 해야된다고. 이건 기억 못해요?”
‘엄연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기 때문에 의사표현은 분명히 해야 돼요. 안그러면 4년동안 더 힘들어질 수 있어요. 알겠어요?’
‘불편하거나 힘든게 있으면 우리쪽에 얘기 해야된다는 말이에요. 이해 했어요?’
지연의 얼굴은 방금 전과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대로 그녀의 고개는 천천히 좌우로 움직였고.
“아뇨, 기억나요. 그냥 저는… 받기만 하는 게 불편하다기 보다는…….”
“보다는……?”
“조금 겁나서요.”
유한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멋쩍은 듯 아래턱을 좌우로 문질렀다. 이런 분위기를 형성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저 자신만 즐거운 장난이었나 싶어 그는 지연에게 미안해졌다.
“뭐가 겁나는데요, 말해봐요 편하게.”
“……. 여기 와서 갑자기 좋은 것만 먹고, 입고… 좋은 집에서 살다보니까 나중에 가면 이런게 익숙해질까봐요.”
“4년 뒤엔 뭐하고 싶은데요.”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린 유한이 지연의 불안한 얼굴을 편안하게 바라봤다.
지연은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눈꺼풀을 조금 떨었고.
“그냥… 유학도 가고 싶고, 해외여행도 마음껏 다녀보고 싶고…….”
천천히 유한을 보며 꺼낸 말은 이내 작아졌다.
4년 뒤, 4년 뒤…….
처음 서울에 왔을 땐 4년 뒤를 생각하면서 왔는데, 지금 그녀는 4년 뒤가 아닌 앞으로의 4년에 얽매여있었다.
걱정했던 것만큼 지난 두 달간 몸서리치게 힘들거나 불편한 건 없었다.
어차피 령화도에 있었다 한들, 령화도를 벗어나 일자리를 찾았다 한들 홀로 보낼 시간이, 외로움이란 감정을 짓밟으며 홀로 싸워야 할 일들이 많았을 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래서 차라리 이곳이 더 나은 곳이라고 수천번도 넘게 느꼈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기 위해 배우고 익히는 것들조차 령화도에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것들. 그 작은 섬에 있으면서 막연하게 동경해왔던 것들을 내가 시간만 낸다면 충분히 배워볼 수 있었으니까. 의식주따윈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4년 뒤. 4년 뒤엔 정말 어떻게 되는 거지…….
지연은 지금 이순간, 처음으로 겁이 났다.
4년 뒤에 나, 한지연……?
유한은 그녀의 풀이 죽은 모습에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돈 때문이라고 했었잖아요, 그렇죠?”
“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배우가 됐다고 생각해요 집밖에서는.”
“배우…요?”
유한은 지연의 얼떨떨한 모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미소지었고.
“말이 4년이지 8학기에요. 시간으로 치면 3년도 안 되는데. 그 시간만 출연료 받고 연기한다고 생각해요.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편하게,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4년 후에 은퇴하는 거예요.”
“아…….”
“보통 은퇴한 배우들은 휴식이 필요하다면서 조용한 곳을 찾아요, 꽤 많이 해외로 가서 살기도 하고. 왜 그러겠어요?”
스물한 살밖에 안 되는 아이한테, 세상의 때를 묻히기도 미안한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할 짓이 못됐다. 그럼에도 유한은 이것이 지연을 위하는 말이라 여기며, 좀 더 단단한 말로 대화를 이었다.
“배우일 하는 동안엔 주변사람들한테까지 진짜 자기 모습 드러내기 어렵거든요, 이미지관리 때문에.”
“…….”
“그래서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으로, 자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향하곤 해요.”
“…….”
“우울증이니 공황장애니 해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우가 되고 싶어 하겠어요. 그렇게 가고 싶은 델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돈, 제대로 된 역할 하나만 해도 벌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조용히 입이 다물어진 지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이 제게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4년동안 차유희라는 역할의 배우가 된 것. 그래서 앞으로 평생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 그 선택을 그녀 스스로가 했다는 것을 잊지마라는 것이었는데.
“학교 다닐 땐 어땠어요, 친구들 좋아해요?”
“……. 네? 죄송해요,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여럿이 어울려 노는 거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지연이 깊이 생각에 잠기려하자 넌지시 화제를 돌렸던 유한은 피식 웃었다.
제법, 표준어의 억양을 잘 구사하고 있었다. 거기다 놀란 듯 되물었던 것 또한 칭찬할만큼 침착했다.
지연은 그가 어떤 의도로 그와같은 말을 꺼냈는지 알았는지, 작게 아, 하고 소리냈고.
이내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조용히 말했다.
“아뇨, 저는 혼자 있는 게 더 편해서…….”
“대학생활은 좀 다를 건데, 특히 교대는 더.”
“괜찮아요. 친하게 지내는 친구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어요, 다른 애들이 뭐라고 말하거나 어떻게 보는 것도 신경 안쓸 수 있고요……!”
지연의 차분한 대답에 유한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장비서가 반복해서 강조했을 거라 예상했지만, 교육대학교의 생활 특성이 어떠한지를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지연이 짓는 미소가 쓰게만 느껴진 유한은 유리잔을 들고 엄지로 좌우로 쓸었고.
“대신, 내가 친구해줄게요.”
“친구…요……?”
일순 눈이 동그랗게 커진 지연의 모습에 씨익 웃은 그는 물을 간단히 마셨다.
“학교 다니면서 스트레스 받는 일 많을 거예요. 누구 욕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나한테 욕해요 편하게.”
“아…….”
처음 본 지연의 해맑은 미소에 마음 어딘가가 짠해졌다.
지금껏 본 미소와는 달리, 그 어떤 걱정도 없이 순수하게 즐거움으로만 느껴진 웃음.
그 웃음의 진폭을 느끼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