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답은.”
“간단하게.”
“질문은.”
“꼭 필요한 것만.”
“친절과 호의는.”
“감사인사만.”
“남자의 관심은.”
“무시한다.”
“좋아.”
지연은 혜민의 미소에 함께 웃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얼굴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입술을 앙다물더니 부르르르, 부르르르르 하고 연속적으로 떨었다.
“왜, 떨려?”
“그냥 조금, 아 왜 떨릴까요.”
지연은 저마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장 큰 고비였던 면접도 잘 넘겼는데.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걸까.
드디어 개강 날 아침.
오리엔테이션도, 새내기배움터도 그 어떤 것도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심지어 자동으로 초대된 같은 과 새내기 단톡방에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상황.
“개강총회가 5시라고 했지?”
“네. 그거 끝나고 분담모임 있다고 하던데…….”
“그냥 조용히 있으면 돼. 교수님이나 학생들 질문엔 그동안 연습한 방향대로 가면 되고.”
혜민은 지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겨 들었고.
“네가 어떤 실수를 했다 쳐도 당황하지 말고. 잊지 않았지?”
“네.”
“그래, 가자.”
지연은 캔버스 소재의 에코백을 팔목에 건 채, 혜민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 시각.
“도련님, 이거라도…….”
“됐어요.”
박비서가 건네는 정체모를 텀블러에 태열은 성가시다는 듯 팔을 내저었다.
빌라 단지 내를 빠르게도 걸어가는 태열의 뒷모습에 박비서는 안타깝게 고개를 숙였고.
“이제 우리 도련님 고생 시작이네 시작이야…….”
군대를 두 번째 보내는 것마냥 마음이 쓰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새벽까지 그가 친구들과 클럽에서 술 진탕 먹고 놀다 들어온 걸 모를 리 없어 고르고 골라 가져온 숙취해소에 최고봉인 음료.
그 음료가 필요 없을 정도로 술기운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지금 저렇게 착실히 가방까지 챙겨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픈 건 오바인 걸까.
“앞으로 어쩌시려나…….”
빠르게 태열의 발자취를 쫓은 박비서는 이내 그가 택시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중얼 거렸다. 100만원을 오천원 쯤으로 아시는 분인데 이젠 어떻게 사시려는지…….
그렇게 박비서가 태열의 대학생활이 부디 평탄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기 시작한 무렵.
“오늘이 개강이죠 그렇죠?”
“네.”
“아이고, 교대갈 정도면 공부 열심히 했나 보네요.”
태열은 택시기사의 칭찬에 형식적으로 고개만 까딱이고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피곤한 듯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엔 오직 궁금증 하나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여자.
붙었나. 붙었으면 오늘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건가.
삼일 전 그렇게 지연을 호텔에서 본 이후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기하급수적으로 쌓여가고 있던 걸, 태열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딜 수가 없었다.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왜 그렇게 그 여자가 자꾸 생각나는지.
눈에 확 들어올 만큼 빼어나게 예쁜 것도 아니었고 절로 시선을 움직일 만큼 몸매가 독보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후…….”
진짜 미쳤나.
태열은 지끈거린 머리에 이맛살을 일그러뜨렸다.
*
C교대 부근.
혜민이 운전하는 새하얀 고급 세단 한 대가 부드럽게 갓길로 멈춰 섰다.
“그나저나 노래는, 진짜 할 수 있겠어?”
“네, 뭐… 괜찮아요.”
“아휴, 설마 아직까지도 장기자랑같은 걸 시킬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시키면 그냥 대충해 .”
지연은 소리 없이 웃으며 안전벨트를 끌렀다. 스스로 힘을 더 내려는 듯 보다 크게 입을 열었다.
“언니도 출근 잘해요!”
“그래, 가봐.”
혜민은 그런 그녀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지연이 조수석 문을 열려던 찰나.
“아 지연아.”
혜민의 말소리에 지연의 손은 잠시 멈칫했지만.
“한지연.”
혜민의 연달은 말을 무시하며 지연은 그대로 빠르게 문을 열었다.
뒤이어 들려온 혜민의 기분 좋은 웃음 소리.
“잘했어 차유희. 연락하자!”
문을 연 채 다소 고개를 숙여 혜민에게 힘주어 고개를 끄덕인 지연은 이후 크게 숨을 골랐다.
처음 이곳에 온 다음날부터 계속 됐던 이름 연습.
이제야 겨우, 갑자기 불려온 제 본래 이름에도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차유희. 차유희.
이게 내 이름이니까.
그렇게 지연이 힘주어 학교 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한 때.
태열은 막 택시에서 내렸다.
눈으로 보이는 개강의 풍경에 피곤하단 듯 눈살을 구기며 뻐근한 목을 풀려던 찰나.
그의 눈썹은 빠르게 치켜세워졌다.
가느다란 목이 살짝 보이는 연한 그레이 터틀넥에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슬렉스. 그 밑으론 검은색 스타킹으로 둘러쌓인, 한손으로도 그냥 잡힐 것 같은 발목과 진한 버건디 색상의 로퍼. 거기다 막 여민 힙을 덮는 정도의 검은색 반코트와 그녀의 어깨에 걸려있는 아이보리색의 캔버스백.
촌스럽지도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은, 깔끔한 옷차림.
그런 옷차림을 한, 그토록 그의 머리를 괴롭혔던 여자가 이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태열은 쥐고 있던 휴대폰 위로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멈춰선 채 지연의 움직임만 보고 있던 그의 두 눈으론 그의 바람처럼 그녀의 동그란 눈이 제대로 맞부딪혔고.
‘……!’
지연의 검은 동공은 미세하게 커지다 빠르게 눈꺼풀로 가려졌다.
‘저사람…….’
태열과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지연은 눈을 깜빡이며 코트 옷깃을 잡았다 놓았다.
한눈에도 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몸을 움직였다.
자신처럼 합격해 학교에서 볼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지만 정말 이렇게 보게 돼버리니.
‘신경끄자. 신경꺼…….’
어쩐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토록 너무도 쉬이 꺼져버린 지연의 신경과는 달리 태열의 신경은 그렇지 못했다.
분명 알아본 거 같았는데도 순식간에 무시하듯 지나치는 행태.
태열은 입가를 쓰게 비틀었고.
지금 이런 제 모습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는 이맛살을 구긴 채로 몸을 움직였다.
*
첫 수업 영어말하기 강의가 있는 건물 앞에 멈춰선 지연은 잠시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이내 입술 사이로 내뱉은 깊은 숨.
‘이제 진짜 시작이네.’
오전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이제야 해가 뜬 걸까, 언뜻 피부로 느껴진 햇살이 조금 반가웠던 찰나, 다시 찬 바람이 불어 오자 지연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3월이었으나 아직 덜 익은 3월.
다시 몸을 움직이려던 지연은 다시 멈춰 섰다. 주변으로 무리지어 가는 학생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왁자지껄 소란스레 웃는 모습이 즐거워 보이긴 했으나 위축이 되진 않았다.
이윽고 조용히 도착한 강의실 안.
캠퍼스에서 들었던 시끄러운 웃음소리는 여기서도 여전했다.
언뜻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앉지…….’
지연은 빠르게 강의실을 둘러봤다.
가방이 올라가 있지 않고 주변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는 자리.
아무래도 앞쪽 가장자리에 앉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지연이 창가쪽으로 몸을 움직이던 순간, 강의실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대박, 야 저기봐봐. 제발 여기로 들어와라 들어와라!”
“허… 완전 조각이다 진짜. 언니들이 말한 남자가 저사람인가보네.”
“무슨 말? 무슨말 했는데?”
“우리과 언니들이 면접날 자원봉사했는데 완전 연예인 씹어 먹는 남자있었다고 그랬거든.”
“이 수업듣는건가봐 예쓰! 근데 무슨 과지? 새터때 저남자 없었잖아 그치.”
지연의 눈썹 앞머리가 희미하게 찌푸러졌다.
뒤편에서 들려온 쑥덕거림이 왜 이리도 크게 들려오는 건지.
설마 그 남자는 아니겠지 싶어, 지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가방부터 책상 위로 올렸다.
그 사이 태열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들어왔고.
태열이 들어온 줄 모른 채 휴대폰을 꺼낸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5분 남았네…….’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스케줄러와 필통을 꺼내는 지연의 입가로 의식적인 힘이 들어갔다.
학점은 크게 신경쓸 필요 없다고 했었지만, 그렇다고 하위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비록 여기 입학한 다른 학생들처럼 고등학생 때 수능이든 내신이든 정식으로 공부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학공부는 또 다르다고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고 싶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연은 미세하게 울린 진동소리에 휴대폰을 들었다.
<조용한 카페. 샌드위치 맛집. 만레사. 링크 클릭……>
<학식 먹기 불편하면 여기가서 먹으라고, 너 점심 공강이잖아! 이제 곧 수업 시작 하겠네, 진동인지 확인 제대로 하고 굿럭!>
아 맞다 점심.
지연이 링크된 페이지를 확인하고는 다시 전화기를 내려놓은 때.
강의실 분위기가 환기되며 중년 여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반가워요!”
교수를 바라보는 지연의 두 눈은 티 없이 초롱초롱해졌다.
첫 여행지의 공항에 도착한 사람들의 눈처럼.
그토록 궁금했던 대학 수업의 풍경.
“자 강의계획서인데, 다들 한 장씩 받고 뒤로 돌려요.”
가장 뒷자리에 앉은 태열의 시선은 오직 한쪽에 쏠려있었다.
이 분단 제일 앞자리에 앉은 여자.
강의실을 들어오며 보게 된 지연의 옆모습에 태열은 신경을 끄려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치 않게 마주친 첫 등굣길도 모자라 첫수업이 겹치는 상황.
송태열 그는 의자 뒤로 몸을 편히 젖힌 채 저도 모르게 지연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는데.
“저…….”
태열은 앞자리 여학생의 조심스런 말소리에 눈썹을 까딱였다.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강의 계획서를 받아든 태열은 익숙하게 평가란부터 찾았다.
중간고사 없고, 기말고사 지필평가 아니고…….
검지와 중지 사이로 펜하나를 끼운채 빙그르르 돌리고 있던 그의 귓가로 교수의 힘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5분 줄테니 2인 1조 만드세요. 이 분반은 딱 스물 여섯, 짝수네, 결석 없는 것 같고.”
태열은 귀찮다는 듯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펜을 빼버렸다.
‘조 같은 거 짜라고 하면 일단 가만히 있어. 못 짜는 사람 웬만하면 교수들이 알아서 해줄 거니까.’
반면 지연은 그저 강의계획서를 꼼꼼히 살피고만 있었다.
이내 사방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말들과 일어서서 움직이는 소리들.
“조 짠 친구들은 메모지에다가 과 학번 적어서 앞으로 내요. 메모지 예쁠 필요 없어, 대충 찢어도 됩니다.”
오른쪽 발을 까딱, 까딱 거리고 있던 태열은 재밌다는 듯 입술 사이를 가볍게 터트렸다.
저처럼 가만히 있는 애가 누가 있나 봤더니 딱 한 명.
고개조차 돌려보지 않는 저 행동. 원래 저렇게 매사에 관심이 없나.
교수가 말한 5분의 시간이 전부 지나기도 전. 교수의 손엔 열 세장의 메모지가 들려 있었고.
“흐응, 여기 조 아직 못짠 친구 둘 있는 거 같은데. 손들어 봐요.”
교수의 말이 끝나며 촤악 가라앉듯 조용해진 강의실 안.
스물여섯 명의 학생들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던 그 사이로, 지연과 태열의 손이 동시에 들려졌다.
“어 그래 이렇게 둘이 하면 되겠네, 여기 여학생. 뒤돌아서 저 뒤에 남학생 봐봐요.”
“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지연이 몸을 돌려 뒤를 본 곳에는.
‘……!’
“뭐해요 둘 중에 아무라도 가서 메모지 써야지? 어 그래, 저기 남학생 오네.”
지연은 앙다문 이 안으로 윗니와 아랫니를 꾹 깨물었다. 하마터면 놀란 티를 낼 뻔했다.
왜 또 저 사람이…….
“와 개부럽.”
“야 조용해 다들려.”
제 움직임의 속도가 이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의 수업시간을 앗아가고 있는 건 알고나 있는 건지. 태열은 일부러 보폭을 줄여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어떤 심산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애초부터 교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소곤거림 따윈 안중에도 없던 그였으니까.
그저, 무슨 반응이라도 일으켜보고 싶은 여자에게만 온 신경이 박혀 있었는데.
“여기요.”
지연은 오른편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태열의 얼굴도 보지 않고 메모지와 펜만 책상 끄트머리로 밀었다.
태열의 오른쪽 눈썹끝은 날카롭게 치켜세워졌고.
그대로 몸을 숙인 그가 지연이 건넨 종이 위에 막 펜을 움직이기 시작한 때.
이미 마음을 진정시켰던 지연은 그가 다 쓰면 빠르게 종이를 가져오고자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둥그스름한 형태로 매끄러웠던 그녀의 이맛살이 일순간 당황한 듯 흔들렸다.
[나 기억하지]
“……. 과랑 학번이랑 이름이요.”
지연은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어쩐지 주변으로 그 어떤 소음도 느껴지지 않은 채 1초가 10분처럼 느껴진 이 순간.
그녀는 손끝까지 꾸욱 눌렀다.
지연의 미세하기 떨린 목소리를 감지했던 태열은 입술끝만 미묘하게 올리더니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교육과 송태열]
“……. 학번이요.”
“모르겠는데 학번은.”
속삭이듯 낮게 전해진 태열의 무미한 목소리에 지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교육과. 교육과. 하…….
왜 하필…….
“주세요.”
태열은 지연이 제 손에서 종이를 뺏어가듯 빠르게 가져가자 몸을 일으키며 지연의 얼굴을 무심히 내려 봤다.
그리고는 태연히 제 자리로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가 쓴 첫 번째 말을 누가 볼까 손으로 꽉 누른 채, 지연이 빠르게도 제 학번과 이름 그리고 과를 적는 무렵.
“앞으로 다음 시간부터는 조원끼리 같이 앉으세요, 한학기동안 같은 배 탄 사람들이니까. 알겠나요?”
“네!”
주위에서 들려온 커다란 대답소리에 지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눈가를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