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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45분. C교대 부근 쭈꾸미&낚지볶음 식당.
“자, 그래. 그러면 우리 새내기들부터 한명씩 자기소개 하도록 하자.”
지연의 지도교수는 교육과 내에서도 가장 젊고 젠틀하기로 소문난 분이라고 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이 세 가지는 반드시 말하도록. 누구부터 할까… 그래 너, 가연이라고 했었나?”
“아뇨 가은이요.”
“그래, 가은이부터 이렇게 차례대로.”
같은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배정받은 학생들은 하나의 분담으로 묶인다. 그래서 못해도 매학기 한 번씩, 이렇게 함께 밥을 먹는다고.
“안녕하세요! 저는 분당에서 사는 스무살 박가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여기 계신 교수님과 선배님들 그리고 동기분들과 잘 지내고 싶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타과에 비해 교수님들의 인원이 약 2배정도 많아 교수님 1인당 배정받는 한 학년의 학생은 두 명 내지 세 명.
지연은 다른 사람들처럼 박수를 짝짝짝 쳤다. 일어서서 자기 소개를 했던 가은이 다시 자리에 앉자, 지연의 맞부딪혔던 손바닥 사이로는 조금 땀이 나는 듯 했다.
“그래, 여기 2학년 언니 말 들어보니까 새터때 가은이 너가 춤을 그렇게 잘췄다던데?”
“아 아니에요, 그냥 다 같이 장기자랑으로 춘 거예요!”
“그래 그럼. 다음!”
지연은 맞은편 대각선으로 앉아있던 교수가 넉살 좋은 미소를 보이며 자신을 보자 손에 힘을 꽉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연의 숨소리가 조금 떨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사는 스무살 차유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까처럼 들려온 짝짝짝 소리.
고개를 꾸벅 숙인 지연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일단 무난하게 잘 한 것 같았다.
“그래, 유희 너는 오티랑 새터에 다 불참했다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
“몸이 좀 안좋아서요.”
“지금은 괜찮고?”
“네.”
지연이 앞에 놓인 물컵으로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때 또다시 느껴지는 왼편의 시선.
그녀는 말랐던 입안을 적시고자 물컵을 들었다.
심장이 조마조마하게 뛰는 게 면접 보던 날보다 더한 것만 같았다.
“그래, 자 그러면 어우, 난 이친구 보자마자 놀랐다 놀랐어. 자기 소개!”
교수의 말끝으로 뜨거운 정적이 일어난 때.
지연은 왼편의 인기척을 느끼며 철판 위로 쭈꾸미볶음이 자글자글 끓는 모습만 가만히 봤다.
“안녕하세요. 서울에 사는 스물다섯 송태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쩐지 더 크게만 느껴지는 박수소리.
스물다섯 살…
다른 학생들이랑은 다르게 자신만만해보인 그 특유의 분위기가 나이 때문이었나.
지연은 흘끔 태열을 보고는 고개를 젓듯, 입술끝을 희미하게 비죽였다.
아니었다. 나이 때문이 아닐 것이었다, 차갑고 사나워보이는 느낌은.
‘그러면 지금부터 호명하는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 분담 배정 발표하겠습니다.’
태열과 같은 지도교수에게 배정받으리라고는 설마 하는 생각조차하지 않았었다.
그저 신경 꺼야지, 크게 신경쓰지 말아야지 했을 뿐이었는데.
지연은 태열이 자리에 앉자 다시 물컵을 들었다.
“그래 태열이, 이번에 우리과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하던데. 군대는 갔다왔고?”
“네.”
“그럼 대학 다니다 입대해서 다시 수능 본 건가?”
“네.”
“전공은 뭐였고?”
교수님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아무렇지도 않나보다. 이 남자 눈을 뚫어지라 보는 게.
“사회체육이었습니다.”
“그래? 운동신경 좋겠네!”
태열은 형식적으로 입꼬리만 짧게 올렸다.
그의 신경은 아까부터 불규칙적으로 물컵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지연의 손에 가있었다.
제 한 손으로도 두 손을 전부 감쌀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크기의 손.
가느다란 손가락에 비해 어쩐지 거칠어 보이는 손등과 살결들이, 아기처럼 보인 얼굴 피부와는 다소 상반됐다.
어디 다쳤었나.
“역시 이 교수부터 잘나서 그런가? 우리 분담 학생들 인물이 다들 훤칠해, 안 그래?”
교수의 농담조가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푸하하,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고.
“그럼 2학년부터 쭉 자기소개하자, 1학년들 잘 들어야 돼? 얘네 소개 다 끝나면 이름 물어볼거다?”
지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좌측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작된 선배들의 자기소개.
지연은 그렇다할 표정의 변화 없이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또 때맞춰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조용히 따랐다.
일곱 명의 자기소개가 모두 끝난 무렵.
“어 그래, 아우 타겠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자.”
교수는 각 테이블로 먹으라는 듯 손짓하며 화기롭게 웃음 지었다.
‘후우…….’
매운 걸 잘 먹지 못했던 지연은 앞에 보인 시뻘건 양념에 코로 숨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자꾸만 목이 타는지 그녀는 다시 물컵을 들었다.
남아있는 물을 전부 다 마시고는 빈 컵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물을 따르고자 눈동자를 굴려 테이블 위로 물병을 찾았는데.
“…….”
지연은 허공에서 손을 어색하게 내렸다.
놀란 듯 작게 벌려진 지연의 입술. 그 사이로 급히 수축된 심장의 소리처럼 아, 하는 희미하게 새나왔고.
“고맙습니다.”
태열은 지연의 작은 목소리에 물병만 다시 내려놓았다.
지연은 흘긋 본 태열의 옆얼굴로 그 어떤 표정이 없자 얼른 컵을 들었고.
“역시 오빠라 그런가, 물까지 따라주고. 까칠하게 생겨선 매너도 좋아?”
허허 웃는 교수의 말소리에 지연은 괜히 물을 마시며 컵을 꽉 쥐었다.
아까 개강총회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모든 이에게 주목받는 남자,
이 남자와 가까이만 있으면 절로 쏠리는 시선.
거기다 모자라 제게 직접 물까지 따라줬으니.
‘오늘 개강날이죠? 하루 무사히 보내요, 하루만 잘 넘기면 그 다음부턴 쉬울 거니까^^’
왜 갑자기 컵에 물을 따라줬는지의 탓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루, 그래 오늘 하루. 오늘 하루만 잘 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계속해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
저녁 6시를 10분 넘긴 시각.
“아니, 왜 나만 먹는 것 같아? 너희들 내가 불편해?”
“아녜요 교수님, 저는 배불러서요!”
서운하단 듯 농을 던진 교수의 말에 가은이 애교 있게 대답했다.
“태열이랑 유희는, 니들은 불편하고?”
“아닙니다.”
“아니요.”
“이것 참, 얘네들은 신입생때도 내 앞에서 교수님 사리 추가해주면 안돼요 하던 애들이었어. 긴장풀고 편하게들 먹어! 아 안되겠네, 나 잠깐 전화좀 하고 올테니까 먹고 있어!”
때마침 온 전화에 교수는 허허 웃으며 일어섰다.
이로 인해 직사각형 테이블로, 나란히 앉은 지연과 태열. 그리고 지연 맞은편의 가은만이 남은 상황.
2학년부터 4학년까지 여덟명의 학생들은 저희들끼리 떠들며 1학년 테이블을 눈치껏 흘끔흘끔 살피고 있었고.
지연이 테이블 안으로 찾아온 정적에 잠시 숨을 고르고자 다시 물을 마시려 할 때였다.
“유희야, 넌 서울 어디 살아?”
지연은 가은의 미소에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까 개강총회 때 단발머리의 옆자리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던 여자였다. 이곳에 들어와 마주앉은 이후 눈만 마주치면 연신 방긋 웃더니 처음으로 말을 건네 왔다.
“도곡동.”
“아… 그럼 서울에서 태어난 거야?”
“응. 왜……?”
태열의 눈썹끝이 미묘하게 꿈틀댔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 컵을 두손으로 잡고 있던 지연의 손끝이 불안하게 움직인 걸 정확하게 본 그였다.
“말이 조금 느린 거 같아서, 혹시 어릴 때 다른데서 살다왔어?”
“다른…데?”
“응 우리나라 말고 다른데서 태어났나 싶어서.”
“아 아니, 서울에서 태어났어.”
심장이 철렁인 지연은 애써 웃으며 컵을 들어 올렸다.
말이 조금 느린 것 같단 말에, 어릴 때 다른데서 살다왔냐는 물음에 손끝이 얼어붙었던 느낌이 아직도 저렸다.
아무래도 더 빠른 속도로 말하는 데 치중해 연습해야할 것 같았다.
반면 태열은 다시 눈썹을 치켜세웠다.
물을 마시며 내리 깐 지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던 것.
낯가리는 성격인가.
“아, 나 번호 알려줘!”
지연은 가은이 휴대폰을 내밀자 컵을 내려놓았고.
“그러지 말고 분담 톡에 올리는 거 어때? 태열이 형 것도 같이!”
“아니 우리것도 같이 올려야지!”
“맞아 태열오빠랑 유희는 새터도 안와서 번호 모르는데.”
시끄럽게 떠들면서도 1학년 테이블을 주목하고 있었을까.
결국 지연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톡방에 넣어야 했다.
그렇게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으려 한 때.
“내꺼도 올려줘.”
왼편에서 지그시 느껴진 태열의 시선과 그의 목소리에 지연은 휴대폰을 꾸욱 잡았고.
태열은 지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저를 보고만 있자, 빈컵에 물을 따르며 태연히 말했다.
“내껀 배터리가 없어서. 번호 불러줄테니까 네가 좀 올려줘.”
“아 아니면 오빠 제가…….”
“매운 걸 못먹나보네.”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거 보면.
가은의 말을 무시한 채 지연을 짙은 눈으로 내려 본 송태열.
그는 지연에게 물을 마시라는 듯, 컵을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그대로 그녀의 휴대폰을 뺏어오듯 들고 왔고.
“그 그래 유희야, 물 마셔! 너 많이 매워 보인다.”
“…… 응.”
지연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끝을 힘주어 누르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태열이 가져간 제 휴대폰을 바로 가져올까하다가 순간적으로 든 판단.
자칫 여기서 괜히 일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여기 있는 여자들의 모든 호감을 태열이 갖고 있다는 걸 느낀 상황에서, 거기다 가은이란 아이의 말까지 완전히 무시했으니.
‘가만히 있는 게 낫겠지.’
물 한 모금을 마신 지연은 태열이 다시 휴대폰을 주자 말없이 건네받았다.
이 식당에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태열의 눈길이,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만 자주 닿았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지연은 가급적 태열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들고자 작정한 사람처럼 느껴졌기에.
*
“교수님 잘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사랑해요!”
“교수님 조심히 들어가십쇼!”
“교수님 수업 때 봬요!”
지연과 태열을 제외한 학생들의 활기찬 인사 속에 교수는 손을 흔들며 주차장쪽으로 갔다.
교수에게 말없이 고개만 숙였던 지연은 순간 잠잠해진 분위기에 휴대폰 겉면을 매만졌다.
‘이제 가도 될 것 같은데…….’
가보겠다며 인사를 할 타이밍을 찾던 지연은 손가락만 꼼지락 댔다.
어쩐지 선배들 모두 태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어 지금 가게? 카페가서 우리들끼리 얘기좀 더 하려 그랬더니, 아까 교수님계셔서 말 얼마 못했잖아. 무슨 바쁜 일있는 거야?”
“약속이 있어서요.”
지연은 여선배의 얼굴이 조금 떨떠름해지는 걸 봤다. 그럼에도 가보겠다는 듯 선배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고.
태열은 가죽재킷의 지퍼를 목끝까지 채우며 지연을 주시했다.
“뭐… 그래, 그럼 내일 대면식때 보자.”
“잘가.”
“힝 아쉽다 톡할게 유희야!”
이어지는 선배들과 가은의 인사에 어색한 눈인사를 끝으로 지연은 식당 앞을 벗어났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줄지은 식당 간판들과 벅적거리는 분위기를 무시하듯 지나치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으로 네온사인보다 쌩쌩 달리는 차들이 더 많이 보일 때쯤.
그녀는 멈춰서 해가 저문 하늘을 잠깐 올려봤다.
“휴…….”
오늘 하루가 참 길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학교 사람들과 있었던 시간들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열도 아까 휴대폰을 다시 돌려준 후로는 말을 걸지 않았고…….
지연은 긴장하고 있었던 어깨를 조금 축, 하고 내려놓았다.
마음 졸이던 걸 조금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크게 숨까지 내뱉었다.
집에 가서 먼저 따듯한 물로 씻고 싶었다.
씻고 나선 영어 공부와 소리 내 책 읽기 연습을 해야지.
하루 일과를 어떻게 마무리 할 건지까지 골똘히 곱씹은 지연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오늘 아침에 혜민이 내려줬던 곳으로 가고자 학교 방향을 찾아 왔던 길.
지연이 다시 움직이려 할 때였다.
“……!”
빠앙!
“앞 제대로 보고 다녀.”
하아…….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내려앉은 지연은 놀란 듯 아랫입술을 떨었다.
갑작스레 잡힌 손목과 함께 끌어당겨진 어깨.
위편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
“……. 고 고맙습니다.”
태열에게 반쯤 안겼었던 지연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며 황급히 몸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태열은 지연의 가방을 쉬이 바로잡아줬고.
그녀의 두 눈을 깊게 내려 봤다.
“나 기억하지.”
“……. 저 급한 약속이 있어서, 안녕히계세요.”
지연의 말이 다급하게 새나왔다.
도망가듯 몸을 움직인 그녀의 코끝에선 태열에게 났던 형체모를 짙은 향이 찬바람과 함께 아른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