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송합니다 고객님. 혹시 다른 카드는 없으신가요?”
“왜요, 이제 없는데.”
“이건 결제 가능 금액 초과라고…….”
태열은 고개를 끄덕, 끄덕이며 점원이 건넨 카드를 가져왔다.
당황하거나 안타까운 기색 하나 없는 모습.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여자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게 오빠 그동안 너무 돈을 막썼던 거 아니야?”
여자를 내려 본 태열은 피곤한 듯 눈두덩을 지압했다.
미치겠네.
“오빠 혹시, 집에 무슨 안좋은 일 있어? 그래?”
여자는 태열이 이마를 세게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자 재빠르게 가방문을 열었다.
“계산 이걸로 해주세요. 오빠, 그럼 진작 얘기를 하지. 내가 뭐 도와줄 건 없는 거야? 말만해 내가 뭐든…….”
“화장실 갈 테니까 계산 끝내면 다 들고 나와.”
여자의 말을 무자르듯 자른 태열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사촌 여동생이 울며불며 사정한다며, 몇 번만 만나주다 네 알아서 끊어내라는 친구의 간곡한 부탁에 좋은 일 한다 여기며 곱게 쳐내고자 부러 데리고 왔던 이곳.
생일 선물로 사주고 싶은 거 다 사주겠다며 마음껏 고르라고 한 뒤 예상처럼 벌어졌던 상황. 사용 정지된 카드. 카드 한도 부족.
그런데도 실망한 기운 없이 오히려 제 걱정을 하고 있으니.
아주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
태열은 걸음을 멈추더니 눈두덩을 세게 눌렀다.
헛것이 보였다. 헛것이.
후…….
이런 적이 없었던 듯 그는 주머니에 꼽고 있던 손조차 빼내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고.
진짜 미쳤나, 별 게 다…….
…….
맞네 차유희.
지연의 손과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반복해 확인한 태열은 허무하게 턱끝을 쓸었다.
도톰하게 올라선 이마, 그 밑으로 미간에서부터 콧대까지 오똑하게 흘러내린 작은 코, 분홍빛을 띤 탱글해 보이는 입술. 그리고 깜빡이는 저 눈.
깨끗한 흰자위는 물론 진갈색의 동공이 주는 저런 맑은 느낌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친…….’
태열은 쓰게 입매를 비틀었다.
가볍게 옷 하나하나를 넘겨보는 지연의 옆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변의 것들은 전부 흐릿하게 보이는 착시까지 일었다.
오직, 모든 조명이 지연에게만 향해있는 것 같았는데.
그는 헛숨을 서늘하게 토해냈다. 제게 관심없는 여자, 자신도 아쉬울 이유가 없어야 정상인데.
“후…….”
태열이 멈춰서버린 제 자신을 인식하고는 훤히 드러낸 이마에서부터 턱끝까지 얼굴을 세게 쓸어내린 때.
“…….”
“…….”
정면으로 두 남녀의 눈은 얽혀들었고.
그 순간.
“오빠 화장실 간다며, 나 기다린 거야?”
양팔에 쇼핑백을 주렁주렁 단 여자는 태열의 탄탄한 팔뚝을 자연스레 매만졌다.
이에 태열은 지연으로부터 고개를 무심히 돌렸다.
지연을 보지 못한 것처럼, 아니. 모르는 사람처럼.
이에 지연은 신경 어딘가가 불편하게 움직였다.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알 수 없는 숨이 흘러나왔다. 가방끈을 지그시 누른 손톱 끝이 유독 붉었다. 이곳에서 태열을 보자마자 놀랐던 것도 잠시였다.
‘여자친구인가…….’
빠르게 오른편으로 움직인 지연은 데님 스커트를 만지작거리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뒤편으로 들린 여자의 애교섞인 웃음소리와 힐소리가 유독 그녀의 귓가에 크게 맴돌았다.
‘무슨 상관이야.’
자신을 모른 척 한 태열의 행동이 고마웠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후우… 신경 끄자 신경 꺼.’
정신이 사나운 듯 고개까지 빠르게 흔든 지연은 눈을 꽈악 감았다 떴다.
손에 걸린 니트가 유독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
“오늘도 굳럭!”
지연은 혜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벨트를 끄르는 지연의 손이 조금 초조했다.
“얘 좀 봐, 너 개강날에도 안 이랬다?”
“네……?”
“너 영어 때문에 그러지.”
헤민은 눈을 가늘게 좁혀 지연을 바라봤다. 지연이 어색하게 소리 없이 웃었고.
“됐어, 너무 잘하려고 마음먹지마. 네가 네이티브도 아니고, 한국인인데 못하는 거 당연해. 오케이?”
“네.”
“긴장하지마, 그게 더 이상하니까! 그리고 너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단 칭찬, 잊지마라?”
지연은 혜민의 응원을 뒤로한 채 차에서 내렸다.
다시 월요일. 1주일 전 이 시간이 생생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는 오늘 이 아침, 지연은 어쩐지 개강날보다 더 긴장하게 되자 심호흡을 연달아 했다.
맑게 갠 하늘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괜찮을 거라고, 대학 수업 잘 들을 거라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그렇게 물먹은 파란빛이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지연의 가슴이 조금 울렁이듯 조여들었다.
얼마간 멈췄던 커다란 시선이 발끝으로 향했다.
‘잘못한 거 없잖아……!’
지연은 입가에 힘을 줬다. 태열을 보자마자 멈춰 섰던 것이다.
‘신경쓸 것도 없고.’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 어제의 기억에, 지연의 눈가가 조금 찌푸려졌다.
택시에서 내린 태열의 옆모습에 바로 그를 알아본 것도 잠시.
어제 그와 함께 있던, 바비인형처럼 마른 여자의 얼굴, 고양이처럼 예뻤던 표정이 생각난 것은 물론이요.
막 그의 곁으로 뛰어 다가간 가은의 모습에 지연은 다시금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이렇게 괜한 일에 신경이 쓰이면 안됐다.
*
지연은 강의실로 들어서며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잠깐이라도 복습하고자 들었던 영어 회화 레슨 때의 녹음본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조용하게 움직였다.
자리를 찾기보다 태열을 찾는 거였다.
자신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갔을 테니, 당연지사 그가 먼저 와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내가 먼저 왔나…….’
결국 지연은 지난주에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태열의 모습은 보이기는커녕, 빈 자리나 의자 위로 올려진 가방은 여자의 것으로 추측되는 것밖엔 없었다.
현재 시각 8시 56분.
지난주 이 시간을 떠올린 그녀는 어째 더욱 소란스러워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1주일 사이, 학생들은 저희들끼리 몰라보게 더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로 흘러야, 이런 대학의 풍경에 익숙해질까.
그렇게 지연은 홀로 마음을 다잡으며 이어폰을 휴대폰에서 분리했다.
그리고는 흰 이어폰을 둘둘 말아 가방 속 작은 수납공간에 넣었고, 휴대폰 또한 진동이었는지 재차 확인했다.
준비해온 교재와 필통을 꺼내는 지연의 손끝이 반복해 외친 파이팅으로 힘 있게 움직일 때였다.
“…….”
소란스러웠던 이곳을 찬물 부은 듯 가라앉힌 건 태열이었다.
지연은 오른쪽 책상 위로 올려두고 정리하고 있던 가방을 제 책상 쪽으로 옮겼다.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언뜻 보이는 그의 옷깃에도 지연은 무신경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옆에 앉은 태열의 얼굴 또한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미, 강의실 입구에서부터 본 지연의 옆모습에 힘이 들어간 미간이 미동도 안했던 것.
지연은 코끝으로 느껴지는 묘한 향기에 노트끝을 꾹 눌렀다. 태열이 옆에 오자마자 느껴진 것이었다. 이내 얼마전 그에게 잠시 안겼을 때 맡았던 향이란게 떠오르자 그녀의 귓불은 미세하게 붉어졌고.
그런 두 남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학생들이 입 밖으로 지연을 부러워하기 시작할 때, 에너지넘치는 교수의 인사말이 들려왔다.
“어디보자, 어 다들 잘 짝맞춰 잘 앉았네.”
검지와 중지를 살짝 구부려 둘둘이 앉은 곳들을 빠르게 스캔한 교수는 출석부를 들어올렸다.
“오케이, 결석자 없는 것 같고. 다들 교재 준비 해왔죠?”
교수를 보고자 오른편으로 고개를 움직인 지연이 그렇다는 듯 작게 고갯짓한 사이, 태열은 이제야 백팩에서 교재를 꺼내 올렸다.
강의실에서 자발적으로 가장 앞줄의 자리라니. 파트너가 지연이 아니라면 일찌감치 자리를 옮기자고 했을 테지만, 그는 잠자코 필통과 들고 온 생수병까지 꺼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강의.
영어 말하기 수업이라 해봤자 기초 교양 수준밖에 안됐다. 영어 독해나 문법도 아니고, 겨우 말하기나 듣기.
애초부터 교수의 강의를 들을 마음이 없었던 태열의 신경은 오직 옆자리에 앉은 지연에게 쏠려 있었다.
목 뒤가 뻐근한 듯 어깨를 돌린 태열은 무심히 그녀를 흘끗 바라봤다.
강의에 집중해 고개를 끄덕거리는 지연의 옆모습이, 참.
‘……. 예쁘네.’
태열은 괜히 인상을 구기며 생수병을 따 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눈, 저 눈. 아무래도 저 눈 때문인 것 같았다.
눈 화장을 진하게 한 것도 아니고 렌즈도 안낀 거 같은데 뭐 저렇게 눈이 예쁜지.
백조가 날개짓을 하는 모양새로 움직이는 새까만 속눈썹은 또 얼마나 부드러워보이는지.
태열은 이런 생각이 드는 저 자신이 저 조차도 이해할 수 없단 듯 고개를 못마땅하게 갸웃댔다.
그때.
“……?”
갑작스런 지연의 시선에 흠칫 놀란 태열은 왜 그러냐는 듯 부러 이맛살에 힘을 주며 그녀를 바라봤다.
“하라고 하시는데요.”
“어.”
지연은 그의 차가운 얼굴에 애꿎은 교재를 꽉 쥐었다. 뭘 하라고 했는지 몰랐던 그는 지연을 다시 봤고.
“먼저 해.”
지연은 그의 낮은 목소리에 고개만 끄덕였다.
짝에게 영어로 3분간 자기소개.
자기소개.
그동안 레슨받은 것만 생각하며 족히 5분도 넘게 할 수 있던 자기소개였다.
근데 왜 이렇게…….
‘떨 필요 없어 이 사람이 교수님도 아니고.’
정면으로 본 태열의 뚜렷한 얼굴에, 그의 짙은 눈빛에 지연은 이유 없이 심장이 떨려왔다.
-이름은 차유희에요. 나이는 스무살이고, 서울에 삽니다. 부모님과 오빠 둘이 있습니다. 심화전공은 교육학이며, 제가 교육학을 심화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초등교육을 배우는데 있어 교육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와 전문적인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제 취미는 독서입니다.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라도 할 수 있어 그 점이 특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후 꿈꿔왔던 것 또한 주어진 여가시간에 더욱 다방면의 책을 접하는 것입니다. 제 최종 꿈은 어린 아이들이 삶 전반에 있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지연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떨린 채 멎었다.태열의 얼굴을 마주한 채, 무릎위로 올려뒀던 가방을 애써 꾹 누르며 시작했던 자기소개. 그가 고개를 까딱이자 지연은 입술을 앙다물며 눈꺼풀을 조금 내렸다.
때문에 보지 못한 미세하게 올라갔던 그의 입술 끝.
태열은 이토록 지연이 제 얼굴을 오래 보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느릿했지만 분명했고, 조금은 어설펐지만 사소한 단어와 단어사이의 엑센트를 넣는 게 제법이었다. 목소리에 힘을 줄때마다 눈밑 애교살이 볼록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반복됐다는 걸, 이 애는 알고 있을까.
지연의 눈빛만큼이나 목소리가 참 맑구나 느낀 순간, 그는 괜히 미간을 주름잡았고.
화이트보드 위, ‘이름/나이/사는 곳/가족관계/심화전공, 선택이유/취미/대학 입학 후 꿈꿨던 것/최종 꿈’이라 적힌 것을 본 찰나.
“안하세요?”
지연은 저편에서 다가오는 교수의 모습에 조용히 태열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