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열은 책상 위로 검지끝을 툭, 툭, 연달아 까딱이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유독 진지했다.
-이름은 송태열, 스물다섯이고 서울에 삽니다. 아버지 혼자계십니다. 교육학을 심화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을 움직여 운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곳에 온 후 꿈꾼 건 빠르게 시간이 흘러 졸업하는 것이고, 최종적인 꿈은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특유의 저음이 완벽한 문장들과 함께 끝이 난 때. 지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빠르게 정면으로 돌렸다.
오른쪽 머리를 귀 뒤로 넘긴 그녀의 눈이 교재 위에서 희미하게 일렁였다.
가슴 위쪽이 따끔하게 울렸었다.
아버지 혼자 계신다는 말. 상처 한 번 받아본 적 없어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그저 차갑고 사나워만 보인 사람이었는데.
왜 그 말에 그녀는 태열에게 묘한 연민이 느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 자, 다 한 친구들은 이제 각자 파트너에게 영어로 자유롭게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보세요. 대답도 영어로 해야 됩니다. 이거 다 끝나면 임의로 불러내 자기 파트너에 대해 안 걸 다른 친구들한테 소개하게 할 겁니다.”
느리게 눈을 감아내던 지연은 교수의 말에 심호흡을 하더니 언뜻 눈가에 힘을 줬고.
다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학교 끝나면 보통 뭐해.
귀에 착 감기던 그의 영어 발음이 불쑥 들려왔다.
지연의 동그란 눈이 그를 보려다 말았다.
-이것저것 해요.
-이것저것 뭐.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태열은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눈썹을 살풋 까딱였다.
지연을 보고자 완전히 그녀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입가가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남자친구랑 데이트는. 안 해?
-네.
-왜.
지연의 짧은 대답에 태열의 목소리가 보다 차가워졌다.
지연은 그의 서늘한 눈빛에 마음이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그를 똑바로 봤고.
-없어요 남자친구.
-그래?
-네.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한 지연은 제자리로 고개를 돌리며 관자놀이 부근을 살짝 긁적였다.
그녀의 입가가 석연찮게 흔들렸다.
그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다 만 것을 잘못 본 걸까.
웃는 표정이 보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세게 구겨진 그의 미간에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의 표정 하나하나에 눈치볼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데. 왜 자꾸 유독 이 사람의 표정이 신경쓰이는 일인지.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야.’
물병위로 손가락을 무심히 까딱거리기 시작한 태열의 옆자리로 지연이 빠르게 속으로 되뇌인 때.
“동아리나 학회는.”
지연은 나지막이 들려온 그의 말소리에 눈꺼풀을 살짝 올리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녀의 눈망울이 걱정스럽게 움직이자 태열은 가볍게 입술을 터트렸다.
영어를 쓰라고 했는데 우리말을 쓴 게 걸릴까 겁먹었나.
나이가 몇 살인데.
태열이 보다 음량을 높여 물었다.
“동아리나 학회, 안하냐고”
“네.”
교수님이 멀찍이 있는 걸 봤던 지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답했다.
“왜.”
“관심 없어서요.”
“그럼 관심있는게 뭐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던 지연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한음 한음 정확히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태열의 눈빛이 너무나 짙어 그를 계속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관심 있는 게 뭐냐고.
능숙하게 영어로 바꾸어 말한 태열의 모습은 한없이 태연했다.
교수가 곧 자신들 쪽을 지날 것 예견이라도 한 듯, 지연은 교수의 인기척에 타액을 꾸욱 넘겼고.
태열은 지연이 제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저 책상만 내려보고 있자 속이 터지는 걸 참아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매사에 관심이 없나봐.”
“…….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에는요.”
더는 태열의 언행에 신경 쓰이고 싶지 않다는 듯, 지연의 대답이 또렷했다.
이 사람한테 휘둘리는 것 같은 느낌, 정말 싫었다.
*
“자, 다음시간까지 오늘 배운 표현 익혀오는 거 잊지 맙시다. 수고했어요!”
지연은 교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찍이 가방을 챙겼던 태열은 교수가 자리를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까지 대강 밀어 넣은 그는 지연을 보지도 않은 채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변 여학생들의 시선이 지진나듯 흔들리던 때.
그녀는 그가 별다른 말도 없이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자 다행이라는 듯 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제일 걱정했던 영어말하기 수업, 그것도 송태열 그 사람과의 수업은 큰 탈 없이 무사하게 끝이 났다.
꼬르륵.
책상 위에서 검은색 쇼퍼백을 들어올린 지연은 제 뱃속에서 들린 소리에 민망한 듯 시간을 확인했다.
지난주와는 달리 수업시간을 전부 채웠더니 어쩐지 허기가 밀려왔다.
오늘 아침엔 사실 너무 긴장이 돼 물밖에 먹지 않았던 그녀였다.
‘뭐 먹지…….’
지연은 휴대폰을 꺼내 올렸다.
주말에 스크랩 해두었던 학교 부근의 카페와 식당들.
아무래도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는 건, 아직까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음…….’
지연은 스크롤을 내리며 강의실을 벗어났다.
이내 그녀는 주변의 인파에 빠르게 휴대폰을 내렸다.
아무래도 건물을 벗어나 차분하게 휴대폰을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 유희 차유희!”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들린 커다란 목소리에, 지연은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 1주일 전 그 단발머리 여자애였다.
지연은 제게 다가오는 단발머리를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짧게 인사만 하고 나가야지, 하는 생각을 한 순간.
“너 태열오빠랑 영어말하기 같이한다며?”
“아, 응.”
“어떻게?”
“둘 다 짝이 없어서.”
“아 좋겠다!”
지연은 단발머리의 호들갑에 미동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지연의 행동이 무안했던 단발머리는 잽싸게 화제를 바꿨고.
“어디가? 수업?”
“아니, 밥 먹으러.”
“아, 야 너 얼굴보기 완전 힘들어! 톡방에서 말도 없고!”
제 팔을 가볍게 친 단발머리의 큰소리에 지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며 말하기 곤란하거나 귀찮을 때 웃으라 누누이 강조했던 혜민의 말.
지금 이 순간 왜 그 미소가 잘만 지어지는지, 지연은 헛웃음이 나올뻔했다.
“가봐야겠다, 안녕.”
모르지 않았다. 1주일 전 제게 말을 걸어오던 때의 눈빛과는 조금 달라져있다는 것을.
무언가 불만이라는 듯, 단발머리 근처에 있던 다른 한 명의 여학생 또한 저를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쎄한 기운을 아무렇지 않게 벗어난 지연은 다시 건물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사실 당황했었다.
어떻게 그 사람이랑 방금 전 수업을 파트너로 듣는지를 알고 있는지.
그게 그렇게 뭐 대단한 일인가 싶었다가도, 학교 안에서 그 사람만 등장하면 느껴지는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건가 싶고.
역시, 가까이 있어봤자 좋을 사람이 아니란 생각을 한 그 순간.
“어디가?”
어쩐지 느긋하면서도 여유롭게 들린 말소리가 지연을 긴장케 했다.
“……. 밖에요.”
“그니까, 밖에 어디.”
싱겁게 웃은 태열은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내려 봤다.
그닥 변한 건 없었다.
수업 때만 두 눈을 제대로 보고 얘기한 건지.
그게 아니면 제 눈을 보기 싫은 건지.
이렇게 내려 보는 그녀의 눈도 나쁘지 않았다.
쌍꺼풀 밑으로 드러난 속눈썹이 촘촘하기도 참 촘촘했다.
지연은 가방끈을 꽉 되잡았다. 지난 주 목요일, 음악관에서의 일이 일순간 오버랩 됐다.
잠시 시선을 피했던 지연이 그를 힘주어 올려봤다.
“왜 물어보시는데요?”
“밥 사달라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너무도 당연하게 입을 연 태열로 인해 지연은 그만 입술 사이를 작게 벌렸다.
그는 지연의 말을 재촉하듯 눈썹을 까딱였다.
“왜, 싫어?”
“……. 제가 밥을 사줄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혼자 밥 먹는 게 편해요.”
손등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가방끈을 손톱으로 짓누르며, 느릿하면서도 차분차분하게 대답했던 지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입가에 힘을 줬다. 음악관에서와는 달리,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지 오직 태열의 언행에 야무지게 대응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억 안나?”
지연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보란 듯 내민 그의 손등. 그 위로 붙여진 밴드.
실은, 태열이 아까 쉬는 시간에 빠르게 나가 인근 편의점에서 사서 붙였던 밴드였다.
“나지.”
작정하고 붙인 밴드인지 지연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 안도한 태열은 눈썹사이를 바짝 좁혔다.
“지난주엔 차사고 날뻔한 것까지 도와줬는데.”
“…….”
“카페에서 그렇게 부딪혔던 건, 네 책임도 있었는데.”
“…….”
“나한테 괜찮냐는 말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했던 거 기억하지? 제대로 마시지도 못한 커피까지 다 쏟았었는데.”
“……. 경황이 없어서 그랬어요, 정말 미안해요.”
고저 없는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던 지연은 침착하게 그를 올려봤다.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이 완연했다.
제 손등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온정을 느낀 그는 입가를 부러 구겼다. 순간적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며 심장 언저리가 뜨끈했다. 낯선 기분이었다.
“저도 그땐 너무 당황해서 그쪽 신경쓸 틈이 없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의 손등에서 다시 두 눈으로 시선을 옮긴 지연이 연달아 사과했다. 아무 말 않던 태열이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더니 다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서, 밥 안 사주겠다고.”
“이렇게 다친 줄은 몰랐어요. 병원비랑 약값, 제가 드릴게요.”
태열은 자신의 눈썹 앞머리를 툭툭 건드리다 결대로 쓸었다. 이게 아니었다.
“따로 먹으면 되잖아 같이 먹는 게 불편하면.”
입안이 마르는 느낌이었던 지연은 빠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의 목소리가 반가운 듯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럼 밥값으로 얼마를 드리면…….”
“아니, 같이 가서 계산만 네가 하라고. 밥은 따로 먹고.”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단 듯, 지연의 말을 끊어낸 태열이 그녀를 직시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여기서 지연을 그대로 보낸다면 제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 것 같았던 그였는데.
“……. 알겠어요.”
소리 없이 숨을 골라낸 지연이 최대한 차분하게 답했다.
싸움을 낼 수도,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분히 이성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음에도, 지금 이 사람은 고집을 피우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조용하게 딱 해줄 일만 해주면 된다고, 그렇다고 생각했다.
한 테이블에서 같이 법을 먹는 것도 아니고.
같은 식당에 가서 계산만 해주면 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