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태양이 높았다. 옆에선 친구들이 시험 성적에 암담해하고 있었고 연화는 가만히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주제가 바뀌었다. 아침에 난 교통사고 얘기였다.
"그러고보니까 오늘 학교 앞에서 1학년 애 하나 차에 치였잖아."
"우리 학교 교통사고 나는 게 하루이틀이냐?"
"그렇긴 한데, 치인 애가 나 중학교 후배거든. 걔가 1학년 수석인데 사고 났는데도 시험 봐야한다고 병원도 안가고 그냥 왔단다. 근데 그것도 걔는 쉬겠다는데 아버지가 가라해서 온 거래. 시험 마지막 날에 빠져서 되냐고."
"애비 맞냐?"
"부모라고 다 훌륭한 줄 알아? 세상에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은 병원 갔겠지? 그래도 오늘 시험 끝나서 다행이네."
"끝나고 갈 거랬어. 저기 있네."
지연이 손가락으로 앞서가는 아이들 중 한 명을 가리켰다. 푸석한 짧은 머리, 몹시 마른 몸과 비틀대는 걸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곧 쓰러질 듯한 모습이라 불안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재인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쟤 그냥 혼자 가게 해도 돼? 쓰러질 것 같은데?"
"바로 앞이 병원인데 뭐."
"근데 비틀대잖아. 횡단보도 그 긴 거 건너다가 쓰러지는 거 아냐?"
"쟤 원래 저렇게 걸어."
학교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육교와 횡단보도가 있고 그걸 건너면 대학병원이 있다. 보폭이 작은 연화의 걸음으로도 몇 분 안 걸리는 거리임에도 걱정이 될 정도로 아이의 모습은 불안했다. 어느새 횡단보도에 도착하고 앞서가던 아이와 만났다. 지연이 아이에게 인사했다. 그 애의 교복에 달린 명찰이 보였다. 안승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무신경한 눈매의 얼굴로 안승화가 나긋나긋 인사했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부모님은 안 오신대?"
"언니가 저 병원에서 일해서요."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고 연화는 지연과 안승화보다 조금 앞에서 걸었다. 면식도 없는 선배가 계속 옆에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호가 바뀌기까지 남은 시간은 여유로웠고 그들은 느긋하게 걸었다. 시험이 끝나 아이들의 얼굴이 밝았고 날도 밝았고 그의 마음도 꽤 밝았다. 성적은 이대로만 유지하면 그가 목표하는 대학에 무리없이 붙을 수 있었고, 좋아하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다. 평범한 날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커다란 트럭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갑자기 나타난 트럭에 의문을 가질 법 했지만 연화는 그럴 수 없었다. 트럭이 있단 걸 알아챈 건 이미 치이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치인 사람은 그 한 명이었고 주변에 그의 피가 흘렀다. 피비린내, 따뜻하고 끈적한 무언가들. 흐릿해져가는 시야에서 붉은 것이 주변에 가득했다. 아, 재인이 피 무서워하는데. 아득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친구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게 흐릿해진다. 먹먹한 귀를 감싸려다가 힘이 빠졌다.
눈을 감았다.
*
향 냄새가 났다. 교통사고를 당한 입장에선 상당히 불길한 냄새였다. 생생한 감각들만 아니었더라도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데에 불편한 것이 없었기에 더욱.
눈을 뜨고 있었지만 보이는 게 없었다. 앞을 만져보자 나무같은 촉감에 단단한 것이 만져지고 바람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소리는 꼭 낙하하고 있을 때 들리는 것. 그제서야 깨어난 모든 감각들이 외쳤다.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서.
인지하고 나니 눈앞이 탁 트였다. 입구가 없고 지붕과 바닥을 제외한 모든 벽에 창살이 달린 나무상자. 심지어 상자는 조금씩 부서지는 중이었다. 자붕에서부터 부서지며 점점 커지는 나무조각들이 허공에 흩날리며 꽃잎으로 변했다. 그걸 보고 꿈인가, 싶어서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가 아픔에 손을 뗐다.
변하는 꽃잎들에는 규칙이 없었다. 같은 종류가 없었고 색까지 제각각. 알록달록 아주 화사하고 예쁜 것이 지금 상황과 정반대였다. 위만 바라보던 연화는 잡고있던 창살 하나가 부서지고 나서야 밑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을 무서워한 적이 없는데도 차마 보지 못할 만큼의 높이. 연화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팔에 파묻었다. 처음 경험한 높이가 두려웠다. 아까까진 현실감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실감이 났다. 정말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져도 사는 게 이상할 높이에서.
"엄마."
엄마, 엄마…. 울음이 터져나왔다. 눈물들이 방울져서 위로 떠올랐다. 그것들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가 떨어지고 있는 거였지만. 축축해진 눈가를 세게 문지르며 연화가 연신 중얼거렸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동생한테 한 번 더 사랑한다고 하고 올 걸. 한 번이라도 더 껴안고 올 걸. 괜히 공부했어, 시험 마지막 날에 이렇게 되는 게 어딨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끅끅거리며 소리쳤다. 억울했다. 아직 못한 것도 많고 못한 말도 많았다. 못해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죽어? 나 진짜 이렇게 죽는 거야?
이제 18년 살았는데?
바닥이 완전히 부서졌다. 남아있는 건 연화가 등을 기댄 창살들과 잡고 있는 창살들. 아찔한 공포에 연화는 악착같이 그것을 놓지 않았다. 얼굴을 파묻었던 팔로도 창살을 잡으면서도 눈 한 번 뜨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밑을 바라보면 손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연화가 울먹였다.
죽을 각오로 산 건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땡땡이 쳐본 적도 없고 수업시간에 잔 적도 없다. 열심히 공부했고 그만큼 성적도 곧잘 나왔다. 친구들도 많았고 어디서 싫은 소리 들어본 적도 없었다. 죽음이 가치있는 자를 가려야 된다는 것 아니었지만 좀 억울했다. 대체 왜 이렇게 이해도 안 가는 상황 속에서, 심지어 한 번 죽을 정도의 교통사고까지 당하고 또 이런 식으로 죽는지. 좀이 아니었다. 많이 억울했다. 죽일 거면 한 번에 죽이란 말야! 빽 소리친 연화가 휘청였다. 기대고 있던 쪽이 완전히 부서졌다. 잡고 있는 창살은 아무 역할도 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물방울들이 연화의 얼굴을 연신 때렸기 때문이다. 비였다. 진짜 나한테 왜 이래. 연화가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영문도 모른 채 떨어져 죽을 상황에 처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비까지 내리니 더 서러웠다. 눈물방울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것들과 비슷한 속도로 연화는 떨어졌다. 엄마 보고싶다…. 연화는 슬슬 체념해갔다. 어차피 살 가망도 없었다. 그는 죽기 전에 좋은 것들을 생각하려 애썼다. 가족, 친구, 좋아하는 음식, 동물, 식물, 추억들. 역효과다.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더 미련이 남았다.
살고 싶다.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 살고 싶었다. 현재형과 과거형이 뒤섞였다. 살고 싶었는데, 가망이 없다. 근데 살고 싶다. 팔로 눈가를 문지른다. 그 순간 향냄새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졌다.
무언가가 위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끌어안고 있던 창살이 휙 위로 올라갔다. 그 탓에 연화는 아래를 내려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궁궐. 인형 집 같은 크기로 보였지만 궁궐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경복궁 지도와 내려다본 구조가 비슷했다. 나 궁에 떨어져 죽는 거야?
오늘 오전 고등학생 A군이 경복궁에서 추락사한 채로 발견되어….
딱딱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머리를 스쳐갔다. 그런 건 절대로 사양이다. 어떻게든 옆으로 피해보려고 연화가 발버둥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빗방울들보다도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주 가까워졌다. 사람들까지 보일 정도였다. 향냄새가 거기서 나는 듯 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라도 지내는 듯한 모습. 그리고 만약에라도 연화를 받아줄 수 있을만한 것은 어디에도 안 보였다. 그럼 이제 저기에 내 시체가 떨어질 거란 얘기지…. 연화는 다시 핑 도는 눈물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비볐다. 이제 정말 코앞이다. 다가올 죽음에 연화는 눈을 감았다.
침묵이 내렸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기우제. 그럼에도 3년 간의 기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에 웃었고 누군가는 그것에 절망했으며 누군가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먹구름이 낀 흐린 하늘. 그것이 저의 심정인듯 싶어 왕은 헛웃음쳤다. 무력감, 허탈함, 절망.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쳤지만 왕의 표정에는 변화가 있으면 안된다. 그렇게 제단에서 내려오려는 그를 누군가 제지했다. 눈 앞에 꽃잎이 흩날렸다.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인 꽃잎들. 하늘을 수놓을 듯 수많은 꽃잎들이 흩날린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었다.
제단 위로 그의 발이 닿는다. 꽃잎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무릎이 제단에 닿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정적. 홀린 듯 서로만을 쳐다보던 시선들을 돌린 건 물방울이었다. 아니,
"비다!"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자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 처음 정적을 깨트린 자를 이어 사방에서 울부짖었다.
연화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웬 제단 위에 앉아있고 눈 앞에는 모르는 사람. 사방에 흩날리는 꽃잎이 정신이 사나워 눈을 올린 것 뿐인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쳐버려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기묘한 힘이 그를 고정시키듯 눈뗄 수 없는 사람. 검은 머리도, 서늘한 인상 속에서 온건한 눈빛도, 모든 게 그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꽃잎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비가 그의 얼굴을 때리기 전까지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힘이 풀렸다. 정말 죽지 않았나, 그 높이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거리던 연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제단의 가장 가까운 곳에 누군가 서있었다. 그의 것과 같은 교복, 짧은 검은머리와 몹시 마른 몸.
"안승화?"
무신경한 눈매가 연화를 똑바로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