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쿤 영지를 출발하고 5일째.
첫날 밤의 소동이 있고 난 뒤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도적 떼도 만나지 않았고 몬스터도 출현하지 않았다.
“이번 상행은 운이 좋구먼. 이렇게 순탄하게 가다니 말이야.”
“다른 때는 안 그런가 봐요?”
“뭐 그렇지. 항상 이러면 용병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을 테니.”
며칠이 지나는 동안 레이와 상인은 꽤 친해져 있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일행이 가는 길 100미터 전방쯤에 조잡하게 만든 함정이 보였다.
너무 뻔하게 보이는 함정인지라 가장 앞에 가던 제프리가 모두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용병과 상인들 모두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혹시 저 앞에 함정 안 보이시는 분?”
“저거 되게 조잡하네요. 누가 만든 거지.”
“그냥 계속 가자니 찝찝하구먼.”
다들 함정은 뻔히 보이지만 그대로 가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함정을 돌아가려니 수풀이 우거져서 마차가 다니기 어려웠고 시야 확보도 안 되었다.
“제프리, 저기 함정 근처 수풀이 움직이는 거 같은데요.”
“응? 수풀이 움직여?”
제프리가 레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함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허리춤까지 오는 수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 수풀들이 흔들거리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렇다기에는, 다른 곳은 멀쩡했다.
“딱 보니 저 안에 함정을 설치한 녀석이 있겠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단 덩치가 큰 녀석은 아닐 것 같네요.”
“아마도 이 근방이라면 고블린이거나 코볼트겠지. ”
“그냥 접근하기에는 위험하니까 원거리에서 한 번 찔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프리.”
상단 일행은 의견을 수렴해본 결과 레이의 의견대로 원거리에서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레이는 애초에 원거리 무기는 적성에 안 맞았기에 들고 다니지를 않았지만, 다른 용병들과 상인들의 원거리 무기를 합해보니 총 4개가 나왔다.
투척용 도끼 같은 것도 있었지만, 사정거리가 활이나 석궁보다는 짧아서 조금 더 다가오면 사용하기로 했다.
일행은 간략하게나마 작전을 짰는데 다음과 같았다.
마차는 말과 상품이 손상될 확률이 있기에 지금 있는 자리에 둔다.
용병들과 원거리 무기를 가진 상인은 적의 매복이 예상되는 지점 30미터 지점까지 접근한다.
원거리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동시에 투사체를 발사하여 공격 후 상인들은 마차 쪽으로 퇴각한다.
그리고 용병 5명이 달려오는 적들을 퇴치하는 게 작전이었다.
상인들도 다 같이 참여해서 전투하면 좋겠지만 그건 용병의 입장이었다.
기습을 당했으면 몰라도 지금은 먼저 선제공격을 하려는 계획이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돈을 지급하는 것이기에 원거리 공격에 동참해 주는 것만 하여도 충분히 도움을 주는 거였다.
일행은 조용히 수풀을 향해 다가갔다.
일행이 다가갈수록 수풀의 흔들림이 커지고 뭔가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30미터까지 접근해서 원거리 공격을 하기 위하여 활의 시위를 당길 때였다.
갑작스럽게 수풀에서 고블린들이 뛰쳐나왔다.
이쪽에서 활의 시위를 당기는 것을 보고 녀석들도 자신들의 매복이 들켰다는 걸 알아챘나 보다.
키엑-키엑!
얼핏 보기에 다해서 10마리 정도였다.
달려오는 고블린들을 향해 화살들이 날아갔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고블린의 오른쪽 눈에 화살이 박혔다.
다시 한 번 꿰뚫는 소리가 나며 눈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고블린의 배에도 하나 박혔다.
일행은 쏜 화살은 4발 중 3발이 명중했다.
“활은 이제 빠져”
제프리가 외치는 소리에 상인들 중 활을 쏜 이들은 마차 쪽으로 물러났다.
용병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격돌을 대비했다.
달려오던 고블린들과의 거리가 10미터쯤 되었을 때다.
과묵한 남자 일런이 들고 있던 손도끼가 세차게 회전하며 날아간다.
도끼의 날이 독침을 쏠 준비를 하던 녀석의 머리통을 쪼갰다.
그것을 보고 고블린들이 움찔하며 속도를 늦췄다.
“지금이야. 공격해!”
용병들은 성난 들소처럼 돌진하였다.
그리고 레이는 살짝 뒤처져서 달리고 있었다.
‘방패를 안 쓰니 선두는 위험하단 말이야.’
레이는 덩치가 큰 일런의 뒤에서 몸을 안 보이게 하여 달리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일런과 고블린이 부딪혔다.
뒤이어 줄줄이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레이가 일런의 왼쪽으로 튀어나갔다.
고블린이 상대하던 적이 1명뿐이었는데 2명이 되자 당황하였는지 몸이 움찔했고 그사이에 레이가 발바닥으로 녀석의 배를 세게 밀었다.
밀린 녀석은 뒤에 있던 다른 고블린까지 밀치며 함께 넘어졌다.
넘어진 놈들의 위로 레이의 칼이 날아들었다.
위에 있는 놈의 목을 꿰뚫은 칼은 아래에 깔린 놈의 복부까지 찔러 들어갔다.
그 사이 일런이 아랫놈의 목을 날렸다.
재빨리 칼을 비틀어서 뽑아낸 레이는 다음 목표물을 찾아봤다.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블린이 한 마리 눈에 잡혔다.
고블린의 손에는 녹이 슬어있는 단검이 들려있었다.
녹슨 칼날이 레이의 허벅지를 향해 찔러갔다.
레이는 몸을 뒤로 껑충 뛰면서 고블린의 단검을 든 팔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뛰면서 휘두른 거라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서 팔을 통째로 자르는 건 실패했다.
아이처럼 팔이 얇은 고블린의 팔뚝이 반쯤 잘려 근육 사이로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이 고통으로 단검을 떨어트렸다.
레이는 발을 강하게 내디디며 고블린의 목젖을 베었다.
목을 베인 고블린이 비명도 못 지르고 꺽꺽거리는 소리만 내뱉었다.
‘놔두면 알아서 죽겠군.’
어느덧 전투는 거의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10마리의 고블린이 4마리가 되었는데 이대로라면 죽는다는 걸 느꼈는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린아이 정도의 신체였기에 도망을 쳐도 금방 잡혔다.
레이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녀석을 쫓아가서 목을 쳤고, 다른 사람들도 금방 처리를 완료했다.
“어휴- 지친다. 에이 이 녀석들은 개털이네”
한 용병이 고블린들의 아랫도리 천을 들춰보며 말했다.
가끔 사람들을 상대로 노획한 금화 같은 걸 들고 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일행이 만난 놈들은 아니었다.
무기도 녹이 슬었고 값나가는 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토벌 의뢰였다면 마리당 얼마라도 돈을 받았을 텐데 그냥 지나가다 만난 거라 그런 거도 없었다.
“다친 사람 없는 것 같은데 저것들 얼른 치우고 출발하죠.”
일행은 고블린 사체를 구석으로 치우고 함정을 제거했다.
마차로 돌아가니 상인들이 출발 준비를 다 해놓은 뒤였다.
“참 잘 싸우더구먼.”
일행이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레이와 친해진 늙은 상인이 칭찬을 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뒤에 빠져 있었기에 전투의 흐름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레이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상당히 노련해 보였다고 한다.
레이는 겸손하게 감사를 표했으나 속생각은 약간 달랐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용병생활이 지금 내 나이보다 많은데.’
******
무사히 마티프 영지에 도착하고 난 뒤 레이는 의뢰금을 받았다.
7일 치에 해당하는 동화 210개와 중간 전투로 인한 추가 수당 20개.
합해서 동화 230개지만 다 들고 다니기에는 무거워서 그중 200개는 은화로 받았다.
“레이, 클리앙 영지로 간다고 했지?”
“예.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일런이랑 나는 라쿤영지로 돌아갈 예정이니 나중에 오면 한 번 들려.”
“알겠어요. 제프리. 다음에 봐요.”
일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레이는 제프리와 조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인맥을 넓히는 게 아니라 유물을 찾기 위한 것이지만, 만들어진 인연의 끈을 먼저 자를 생각은 없었다.
용병 길드에서 이번 의뢰를 완료했다는 것을 확인 후 다른 일행은 그곳을 떠났다.
레이는 남아서 클리앙 영지로 가는 의뢰를 물으니 마침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서둘러 신청을 하고선 묶을만한 여관을 추천받은 후 용병 길드를 떠났다.
마티프 영지의 여관은 라쿤 영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적당히 냄새나고, 더럽고, 벌레도 몇 마리 기어 다니는 방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이라도 1주일간 야영만 하던 레이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불침번을 서기 위해 자다가 깰 일도 없었고 냉기도 올라오지 않았다.
습격의 불안함에 얕은 잠 대신, 원하는 만큼 깊게 잘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노숙하는 일이 익숙했는데 회귀 후 2년간 편안함에 몸이 길든 듯하였다.
침대에 누워서 행복을 즐기던 레이의 방문에 누군가 똑똑하고 노크를 했다.
문을 여니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은 따뜻하고 기름져서 침대만으로도 미소가 나오던 레이를 함박웃음 짓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레이는 의뢰 대상과 만났다.
라쿤 영지에서 마티프 영지로 올 때처럼 상행을 호위하는 일이었다.
대신 규모가 2배 정도 되었다.
그리고 용병 역시 마찬가지로 10명을 조금 넘는 인원을 뽑았다.
클리앙 영지로 가는 길은 어려울 게 없었다.
인원이 많다 보니 불침번도 지난번보다 절반의 시간만 서면 됐다.
이번에도 이동하는 중간에 고블린 패거리와 전투가 있었다.
2번의 전투였는데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레이가 칼을 몇 번 휘두르니 전투가 끝나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도 크게 다친 사람이 나왔다.
그대로 두면 다리 한쪽을 잘라내야 할 상황이라서 상인이 가지고 있던 포션을 사용했다.
다친 용병도 그 사실에 동의하였다.
포션이라는게 귀한 물건인지라 그는 이번 상행의 의뢰금을 받지 못하고 추가로 의뢰금의 10배는 더 치러야 했다.
‘그리고 보니 나도 죽기 전에 포션이 있었는데.’
포션이 비싸다고는 하나 레이는 잘 나가던 B급 용병이었다.
그 정도 되면 여분의 목숨으로 포션 하나 정도는 챙겨 다닐 수준은 되었다.
다만 호영이 양팔을 모두 잘라버리는 바람에 품속의 포션을 꺼내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갑자기 양손에 서늘한 느낌이 들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복수를 다짐했지만 요즘 들어 약간 느슨한 마음이 생겼던 레이였다.
새로 시작한 인생 굳이 그런 무서운 녀석과 싸울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런 나태한 마음이 조금 전의 생각에 확 사라졌다.
‘잊지 말자. 그놈에게 복수한다.’
******
클리앙 영지는 수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히 큰 곳이었다.
전생에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온 영지보다도 더 넓고 많이 발전되어 있었다.
과연 제국 3 공작 중 하나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레이는 유물이 있는 마을로 가기 전 이틀간의 준비 기간을 가졌다.
의뢰를 하는 동안 지친 몸의 회복도 하고, 대장간도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폼멜이라 부르는 손잡이 머리 부분이 헐거워진 게 느껴졌고, 숏소드의 날도 매우 무뎌졌다
휴대용 숫돌로 날을 갈아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숙소에 물어 대장간의 위치를 파악한 레이는 해가 떠 있을 때 그곳으로 향했다,
중심가에서는 약간 벗어난 곳에 <파거스 대장간>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대장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상상하던 대장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땀이 흐르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그런 곳이 아니라 일반 상점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레이가 생각한 대장간은 옆에 있는듯했다.
‘이곳은 대장간에서 만든 물건을 파는 곳인가 보네.’
정면의 계산대에는 점원이 있었고 그 뒤에는 갑옷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벽에는 무기들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우수한 품질로 보였다.
“어서 오세요. 찾는 게 있으신가요?”
“여기 이 칼의 날을 갈고, 폼멜도 좀 수리하려고요”
“음... 이 정도면 내일까지 가능합니다. 수리비는 동화 30개입니다.”
수리비용이 싸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로 사는 것보다는 경제적이었기에 레이는 점원에게 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손님”
“구경 좀 해도 되죠?”
“물론이죠. 파거스 대장간의 무기는 제국 최고랍니다. 마음껏 보시고 사세요.”
마지막에 본심이 나온 것 같았지만, 확실히 점원의 말대로 벽에 걸린 무기들은 괜찮아 보였다.
제국 최고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처질만한 품질도 아니었다.
회귀 전의 그는 롱소드를 썼기에 롱소드를 중심으로 보게 되었다.
아직은 신체가 성장 중이라 숏소드를 쓰지만, 다음에 여행을 나올 때는 롱소드를 쓸 생각이었다.
결정적으로 지금 롱소드를 사기에는 가격도 부담되었다.
그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단검이 보였다.
계속 보다 보니 단검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축용 단검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전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여분의 무기는 있는 편이 좋으니까 하나 사도 괜찮을 것 같아. 가격도 싸고...’
롱소드는 비싸서 포기했지만, 단검은 가격이 부담 가지 않아서 충동적인 욕구가 들었다.
잠시 후 대장간을 나서는 레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의 품속이 불룩하니 튀어나와 있었다.
이틀 뒤 레이는 [신속의 반지]를 찾아 클리앙 영지를 떠났다.
왼쪽 허리에는 수리를 마친 숏소드가 있었고, 오른쪽 허벅지에 단검이 걸려있었다.
가방에는 일주일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놨다.
목표로 하는 마을까지는 2~3일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이 정도면 준비가 충분하였다.
그는 조금은 느린 속도로 이동했다.
혼자 이동하는 중이라 고블린이 10마리씩 나타나면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주위를 경계하며 가다 보니 자연스레 속도는 느려졌다.
식사는 양도 충분히 들고 왔고 혼자 먹으니 언제, 어디서 먹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가는 동안 물은 아껴서 마셔야 했다.
마음껏 먹을 만큼 들고 다니기에는 무게가 무거워서 많이 챙길 수 없었다.
하루에 3컵씩 먹으면 3일간 먹을 수준을 챙겼는데, 이것은 목표로 하는 마을 근처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일 문제는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가 잠을 자면 불침번을 설 사람이 없으니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회귀 전의 경험을 살려 상점에서 사 온 끈으로 해결했다.
해가 질 무렵 적당히 높은 나무를 골라서 올라갔고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그 뒤 몸을 나무기둥에 묶는 것으로 떨어질 위험을 없앴다.
짐승이나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었으나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레이를 먼저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발견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어서 대응할 수 있었다.
다행히 레이는 중간에 몬스터를 만나지도 않았고, 잠을 자는 동안 습격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드디어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에 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