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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마스터
작가 : 아범
작품등록일 : 2017.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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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이 발동되었습니다
작성일 : 17-07-17     조회 : 589     추천 : 0     분량 : 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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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DG 프로덕션 본사 3층.

 

 차가운 복도를 따라 작은 방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다.

 그중 화장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방.

 

 '타닥타닥.'

 

 좁은 공간으로 딱딱한 소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서희가 정신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반드시 집에 들어갈 거야.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확고한 의지가 드러났다.

 벌써 다섯 시간째 2팀 프리뷰 작업 중이다. 점심도 우유 하나로 때웠다.

 오로지 회사 휴게실이 아닌 집으로 퇴근을 해보겠다는 야무진 목표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래도 꽤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8시 퇴근도 노려볼 만했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오래된 원룸이지만 그래도 내 집이 제일 편한 서희였다.

 퇴근을 생각하자 어느새 그녀의 입가로 흐뭇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안 돼! 정신 차려, 윤서희.

 집중하지 않으면 막차를 타고 가는 수가 있어!

 

 흐물거리는 정신을 다잡으며 서희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다시 작업에 몰두하려던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출입문이 열리더니 짜증 가득한 음성이 날아왔다.

 

 "아휴, 이게 무슨 냄새야?"

 

 앗, 이 목소리는?!

 3팀 막내 작가 한유리다.

 순간 서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유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일단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서희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막 인사를 한 것뿐인데. 벌써부터 난리다.

 이놈의 안면홍조는 역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 서희를 향해 유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자기가 이 방 전세 냈어? 씻고 하든지 환기를 하든지. 다음에 쓸 사람도 생각해줘야지. 이런 건 기본 매너잖아. 꼭 이런 식으로 일한 티를 내야겠어?"

 

 괜히 또 저렇게 트집이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졸려서 방금 씻고 왔는데.

 게다가 아무도 안 쓰는 화장실 옆 방인데 말이다.

 마치 자신을 몰래 숨어들어온 부랑자 보듯 바라보는 상대를 향해 서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방금 씻었는데……."

 

 "아, 됐고. 윤서희 씨. 바쁜 일 없지?"

 

 서희의 말을 냉큼 자르더니 유리가 들고 있던 USB를 책상 위에 던졌다.

 

 "이것 좀 깔끔하게 정리해줘."

 

 역시 불길한 예감은 억울한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

 그래도 일단 한 번 발버둥은 쳐보자.

 

 "저, 그게 아직 할 일이……."

 

 "내일 아침 회의 때 써야 하니까 오늘 꼭 끝내야 돼. 그럼, 수고."

 

 "아, 저기……."

 

 '쾅!'

 

 서희가 웅얼거리는 사이 거칠게 문이 닫혔다.

 역시,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하아……."

 

 자연스럽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8시 퇴근이라는 야무진 꿈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문밖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견이 뭐래?"

 

 "뭘 뭐래. 제까짓 게 시키면 해야지."

 

 유리가 조롱하듯 대답하자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잠시 후, 키득거리며 발소리가 멀어졌다.

 

 어쩐지 그들의 웃음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서희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괜찮아. 조금 늦어진 것뿐이야…….'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서희가 다시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일을 시작했다.

 역시, 무한 인내를 소유한 그녀다웠다.

 

 

 ***

 

 

 DG 프로덕션의 또 다른 사무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때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여자들뿐.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아까부터 그녀들의 시선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결같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아, 정말 볼수록 매력적이구나. 볼매야, 볼매!'

 

 도대체 뭘 보길래.

 그녀들의 시선을 가만히 따라가자 구석 자리에 하얀 셔츠 차림을 한 남자가 보였다.

 

 최도겸 PD.

 

 예능 1국 3팀을 이끄는 팀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 직책 따윈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에게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엄청난 아우라가 그에게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눈썹 아래 깊고 서늘한 눈.

 굵은 얼굴선을 따라 견고하게 솟아오른 콧날과 매력적인 입술.

 한번 보게 되면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는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듬직한 어깨와 도도하게 뻗어 있는 긴 다리.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찰진 근육이 매끈하게 자리 잡고 있는 팔뚝.

 마지막으로 섬세한 각을 그리며 길게 늘어선 손가락까지.

 한눈에 보기에도 균형이 잘 잡힌 명품 몸매였다.

 

 빛이 나는 외모와 지독하게 섹시한 몸을 가진 완벽한 남자.

 

 그렇게 이 사무실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존재가 떡 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사무실 여자들이 퇴근도 잊은 채 넋을 잃고 있을 만했다.

 

 잠시 뒤.

 

 도겸이 손에 든 서류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하얀 셔츠 안으로 단단한 그의 가슴 근육이 살짝 보였다.

 

 '꿀꺽!'

 

 일순간 사무실 안으로 후끈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도겸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빛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마치 탐스럽게 익은 열매를 탐하듯 욕망으로 가득 찬 여자들의 눈빛이 사무실 공기를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또각또각.'

 

 요란한 하이힐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풍만한 가슴의 그녀.

 

 최근 지원실에 새로 들어온 여직원이었다.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회사 안에서 뜨끈뜨끈한 소문을 피워내는 가장 핫한 인물이다.

 

 몸에 딱 달라붙는 미니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사무실을 휙 둘러보았다.

 곧이어 도겸을 발견한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소문대로 꽤 섹시한 미소였다.

 

 그렇게 자신의 매력 1호를 장착한 채 그녀가 도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러자 사무실 여자들의 시선이 사납게 돌변하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수많은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도겸에게 다가선 그녀가 꽤 당돌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도겸 PD님?"

 

 그러자 도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머, 세상에! 정말 소문대로 대단한 남자네.'

 

 가까이에서 보니 소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단, 저 서늘한 눈빛은 조금 예상 밖이다.

 도무지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무감각한 시선이 그녀를 한순간 긴장하게 만들었다.

 

 '좋아.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그녀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

 

 "처음 뵙네요. 이번에 새로 지원실에서 일하게 된 박 에스더라고 해요."

 

 그녀가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도겸의 굳은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싸늘한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용건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차가운 반응에 에스더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여기 국장님이 전해 드리라고 하신 서류예요."

 

 그녀가 손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이메일로 보내면 될 것을.

 일부러 프린트해서 가져온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사무실 여자들이 에스더의 뻔한 속셈에 속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그때였다.

 

 "어머!"

 

 에스더의 짧은 비명과 함께 책상 위에 있던 연필꽂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서류를 건네다가 넘어뜨린 것이다.

 순간 에스더의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주울게요."

 

 그녀가 얼른 몸을 숙여 필기구를 줍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늘씬한 각선미가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넋을 잃게 만드는 그녀의 필살기였다.

 

 사무실의 다른 여자들조차 속으로 부러운 탄성을 질러댔다.

 에스더가 슬쩍 도겸을 올려다봤다.

 

 '좋아, 걸려들었어!'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다.

 만족한 미소를 짓던 에스더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이런.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네.'

 

 그가 자신의 몸을 훔쳐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몸이 뜨거워졌다.

 마치 그의 손길이 닿는 것처럼 온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거칠게 숨이 타오르는가 싶더니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

 경험 많은 그녀에게도 이런 아찔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결국, 그녀가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도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겸.

 그를 향해 에스더가 몸을 바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렇게 훔쳐보지만 말고 직접 가져보는 건 어때요?"

 

 순간 사무실 안으로 뜨거운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여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겸에게로 향했다.

 

 잠시 후.

 

 무심하던 도겸의 얼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겁게 닫혀 있던 그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보기에도 별로인데 굳이 가질 필요는 못 느끼겠군."

 

 찬물을 끼얹는 듯한 차가운 말투에 에스더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이 그녀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앞으로 이런 건 메일로 보내도록 하세요."

 

 냉정한 충고와 함께 옷을 챙겨 든 도겸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에스더가 그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곧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정말 독하다, 독해."

 

 "그러게. 어쩜 남자가 저렇게 무심할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표정은 다들 흡족해 보였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너도 가져선 안 돼.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다.

 도겸처럼 매력적인 남자는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마땅하다.

 어차피 저렇게 싸늘한 철벽남의 마음을 사로잡을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도 없다.

 물론 행여나 그런 여자가 나타난다면 합심해서 머리채라도 잡을 그녀들이지만.

 

 그렇게 도겸이 사라지자 마침내 그녀들도 하나둘 사무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사무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

 

 

 

 "으악, 살려주세요!"

 

 서희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여자들에게 붙들려 머리채를 잡아 뜯기는 꿈을 꿨다.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다.

 

 뭐 이런 흉측한 꿈이 다 있담.

 

 아직 잠에서 덜 깬 서희의 얼굴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지난밤, 막차를 타고 집에 왔다.

 긴장감이 풀린 나머지 잠시만 누워 있는다는 게 그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모처럼 집에 왔는데 자고 일어나니 끝이었다.

 귀한 시간을 악몽을 꾸는데 다 써버린 셈이다.

 서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슬쩍 시계를 올려다봤다.

 

 "헉, 지각이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윤서희 인생 최초의 지각을 할 위기였다.

 당황한 서희가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가방을 챙겨 들더니 냅다 원룸을 뛰쳐나갔다.

 옷을 입은 채 잠이 든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씻는 건 회사에서도 가능했다.

 어차피 직원 휴게실에 세면도구뿐만 아니라 여벌의 옷도 있었다.

 흔하게 밤샘 작업을 하면서 생긴 요령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원룸을 빠져나온 서희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각은 절대 안 돼!

 그렇지 않아도 미움받는 처지에 지각까지 하는 날엔!

 

 서희가 몸서리를 치며 더욱 힘차게 달렸다.

 오늘따라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딩동]

 [알려 드립니다]

 

 놀란 서희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어?! 방금 뭐지?!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당신에게 첫 번째 미션이 발동되었습니다]

 

 순간 서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번엔 확실히 들었다.

 

 맙소사!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무리 지금 정신이 없다고 하지만 환청이 들리다니!

 최근에 너무 과로를 한 탓일까.

 놀란 서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주춤거렸다.

 

 [미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션이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영문도 모른 채 점차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각을 면하십시오]

 

 어?! 지각하지 말라고?!

 무슨 환청이 이렇게 현실적일까.

 굳이 미션이 아니더라도 지각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이 미션은 강제력이 발동되어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이 미션은 실패 시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에 서희가 안절부절못했다.

 뒤이어 이번엔 한껏 밝은 목소리가 등장했다.

 

 [축하합니다]

 [최초의 미션을 수락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에게 자동 스킬 '신의 보살핌'이 생성되었습니다]

 

 수락한 적 없다. 게다가 느닷없이 보상이라니.

 당장에라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되었다.

 

 "아, 맞다. 지각!"

 

 난데없이 등장한 목소리에 그만 정신을 놓고 있었다.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다니. 이대로라면 정말 보기 좋게 지각이었다.

 환청보다 지각에 대한 후폭풍이 더 두려운 그녀였다.

 

 병원에 가더라도 일단 지각부터 면하고 보자!

 

 정신을 차린 서희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마침 횡단보도에 멈춰 서 있는 택시가 눈에 띄었다.

 

 아, 차라리 택시라도 탈까?

 

 하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출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괜히 더 늦지 않을까 싶어 서희가 망설이던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환청이 들렸다.

 

 [자동 스킬 '신의 보살핌'이 발동되었습니다]

 

 [택시를 타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서희가 움찔했다.

 마치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듯 적절한 순간에 목소리가 등장했다.

 덕분에 그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잠시 뒤.

 

 서희가 두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더니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모험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마음이 더 끌리는 쪽을 선택하는 수밖에.

 

 "어서 오세요."

 

 중년의 택시 운전사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반겼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 강남 DG 프로덕션으로 가주실래요?"

 

 "네."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가 곧장 출발했다.

 제발 이대로 회사까지 한 번에 쭉 달려가 주렴.

 서희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정지 신호에 연달아 걸려버렸다.

 

 아, 뭔가 느낌이 안 좋다.

 서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정체 구간을 만나 딱 멈춰 서버리고 말았다.

 

 아, 역시! 모험의 끝이 항상 해피엔딩은 아니구나.

 

 어느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희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지하철 타고 내려서 죽어라 뛸 걸.

 바보같이 환청 따위에 홀라당 넘어가기나 하고.

 팔랑귀의 씁쓸한 최후였다.

 

 이런 서희의 속을 알 리가 없는 택시 운전사가 꽉 막힌 도로를 보며 구시렁댔다.

 

 "여긴 아직도 이러고 있구먼."

 

 혼잣말을 하던 택시 운전사가 서희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도 DG 프로덕션에 손님을 태워다 주고 왔거든요. 오늘 연달아 두 번이나 가네. 허허허."

 

 "아하, 그랬군요. 와, 신기하다……."

 

 택시 운전사의 싱거운 얘기에 서희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택시 운전사가 안쓰러운 듯 서희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어쩌우. 보아하니 지각할까 봐 서두른다고 탄 것 같은데."

 

 "아, 네……. 뭐 어쩔 수 없죠. 하하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뭘 어쩌랴.

 이미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인 것을.

 서희가 허탈하게 웃자 택시 운전사가 뒷거울로 그녀를 힐끔거리며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 미안해진 서희가 서둘러 가방을 뒤적이더니 사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기, 기사님. 이거 좀 드실래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주고."

 

 얼떨결에 사탕을 받아 든 택시 운전사가 서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멋쩍어진 서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기, 저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집에서 제때 나오지 못한 제 잘못인걸요. 하하하…….

 

 서희가 괜히 씩씩한 척 굴었다.

 그러자 택시 운전사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서희를 돌아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기계 말고 날 한 번 믿어 보실라우?"

 

 택시 운전사가 내비게이션을 눈짓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의 눈빛에서 어쩐지 거절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네?! 아, 네……."

 

 엉겁결에 서희가 대답하자 택시 운전사가 눈에 잔뜩 힘을 주더니 갑자기 택시의 방향을 휙 틀었다.

 곧이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택시가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제집 앞을 달리는 것처럼 아주 능숙한 운전 솜씨였다.

 

 "내가 보기에는 이래도 서울에서 택시 운전만 십수 년이우. 골목 구석구석 모르는 길이 없지. 허허허."

 

 당황한 서희를 향해 택시 운전사의 넉살스런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함께 웃어줄 수 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아슬아슬 골목을 지날 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함께 날뛰었다.

 

 아, 부디 살아서만 도착해 주세요!

 

 서희가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간절히 빌었다.

 

 잠시 뒤.

 

 좁은 길을 몇 번 가로지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큰 도로가 나타났다.

 넓은 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택시가 멈춰 섰다.

 놀란 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 DG 프로덕션 건물이 보였다.

 

 이럴 수가.

 

 이렇게 빨리 도착하다니.

 서희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허허허."

 

 서희가 서둘러 요금을 계산하더니 가방 안에 있던 사탕과 껌을 모조리 꺼내 들었다.

 

 "너무 감사한 데 드릴 게 이것밖에 없어요……. 죄송해요."

 

 "아휴, 뭘 또 이런 걸."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서희가 가방에 휴대폰을 챙겨 넣으며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뒤이어 회사 출입문을 향해 힘껏 달렸다.

 출입증을 꺼내 게이트 단말기에 가져다 대자 삑 소리와 함께 파란불이 깜빡였다.

 

 "휴우, 살았다."

 

 그제야 서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출입 기록으로는 지각을 면한 셈이다.

 이제 서둘러 사무실에 올라가 얼굴도장을 찍으면 된다.

 그렇게 가쁜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다.

 

 [딩동댕]

 

 갑자기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서희가 움찔했다.

 곧이어 밝은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축하합니다]

 ['지각 탈출' 미션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의 잠재력 '침착함'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의 행운 포인트가 +1 만큼 증가하였습니다]

 

 아, 이런. 또 시작이다.

 정말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냐?!

 

 서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뒤이어 알 수 없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축하합니다]

 [최초의 미션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에게 일회용 스킬 '달달한 인연'이 생성되었습니다]

 

 지각을 안 했다고 두 번이나 축하를 받다니.

 다소 민망할 지경이다.

 근데 마지막에 '달달한'이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렇게 잠시 서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서희가 서둘러 가방을 뒤적거렸다.

 곧이어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의 손에는 같은 휴대폰이 두 개나 들려있었다.

 

 환청에 이어 이번엔 환각인 거야?!

 

 어쩔 줄 몰라하던 서희가 일단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그러자 반대쪽에서 곧장 서늘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휴대폰 주인입니다.

 

 깜짝 서희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달한 인연'이 발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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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의 이중 생활 7/27 356 0
15 그와 연인이 된다는 건 7/26 356 0
14 거슬리는 여자군 7/25 352 0
13 화장을 하십시오 7/24 339 0
12 다시 시작된 미션 7/23 344 0
11 달리는 포차 분식 7/22 334 0
10 주인님의 제안 7/21 367 0
9 더듬거리는 손길 7/21 329 0
8 주인님 7/20 373 0
7 용기가 필요해 7/20 358 0
6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7/19 348 0
5 신세 갚았습니다 7/19 369 0
4 소환의 연못 7/18 357 0
3 노인과 삼각김밥 7/18 344 0
2 달달한 인연 7/17 336 0
1 미션이 발동되었습니다 7/17 59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