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지 모를 아득한 공간.
잠시 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와, 예쁘다!"
아름다운 광경에 서희가 자연스럽게 탄성을 쏟아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 주변을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형형색색의 꽃잎이 우아하게 흩날렸고 그 곁을 작고 귀여운 새들이 한가롭게 날아다녔다.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아.
행복한 기분에 깡충거리며 뛰어다니던 서희가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복숭아처럼 생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결국, 서희가 슬그머니 열매에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저라면 먹지 않겠습니다. 맛은 나쁘지 않지만, 환청이 들리는 부작용이 있거든요."
"네?!"
느닷없는 목소리에 놀란 서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서희가 슬금슬금 나무에서 물러났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윤기가 흐르는 회색 털의 고양이였다.
"아, 귀여워!"
서희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고양이가 앞발을 거칠게 휘두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거절합니다."
"헉!"
고양이가 말을 했다. 분명 고양이가 말을 했다.
놀란 서희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는 태연하게 그녀를 지나쳐 햇살이 내려앉은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두 발로 섰다.
연이은 황당한 상황에 서희가 그저 멍한 얼굴을 했다.
곧이어 회색 고양이가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오해하기 전에 우선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전 천계 상층부에서 포상지원 업무를 맡고 있는 길동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당신의 상태 관리와 미션 하달 업무를 총괄할 예정이지요."
"……."
서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어쩌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 들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처음엔 다들 당황하는 법이죠."
묻지도 않았는데 고양이의 뻔뻔한 대꾸가 이어졌다.
서희가 움찔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근데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어떻게 알았지?'
그러자 이번에도 길동이라는 고양이의 대답이 날아왔다.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니깐요. 인간들은 원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종족이라 우리 담당자들에게 이 능력은 필수입니다."
"아, 네……."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길동이가 자연스럽게 털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오전에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서 많이 당황하셨을 겁니다."
"저, 그럼 혹시……."
"네, 맞습니다. 그거 제 목소리였습니다."
"아, 역시!"
아까부터 이상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르렁거리는 느낌이 흔치 않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서희가 반가운 얼굴을 하자 길동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어제 미리 만나서 설명을 했어야 하는데 윤서희 씨가 너무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다들 철수했었습니다. 오늘까지 미룰 수 없어 보시다시피 야근을 하는 중이죠."
"네?! 아,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 우리 일이 밤낮이 없습니다."
어느새 고양이와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워진 서희였다.
그녀가 말똥거리는 두 눈으로 바라보자 길동이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을 이었다.
"먼저,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드리죠. 여기는 소환의 연못이라는 곳입니다. 필요한 경우 앞으로 당신과 제가 만나게 될 곳이지요. 아, 물론 만남 요청 권한은 당신에게도 있으니 기억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저어……."
잠자코 듣고 있던 서희가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길동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저기, 제가요. 이렇게 멋진 곳에서 길동 씨를 만나고 해서 좋기는 한데요……."
뭔가 망설이는 서희를 보며 길동이가 두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궁금하단 얼굴이군요."
"네?! 아, 네……."
"신님을 만나고 오시는 길이 아니셨습니까?"
"네?! 아, 그럼 혹시 그 할아버지가……."
"신께서는 어떠한 모습도 하실 수 있으니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기록이지요."
말을 마친 길동이가 갑자기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금세 눈앞으로 작은 화면이 나타났다.
"와!"
서희가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자 길동이가 피식 웃었다.
곧이어 화면에 대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길동이가 말했다.
"여기 있군요. 기록에는 당신의 선행 충족도가 이미 포화 상태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신께서 직접 당신을 만나러 가셨다고 돼 있고요. 보상도 이미 지시하셨네요. 신님에게 이런 얘기를 못 들은 신 겁니까?"
길동이의 눈빛이 또다시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자 순간 당황한 서희가 황급히 둘러댔다.
"아! 제, 제가 아마 딴짓을 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나 봐요. 하하하……."
하지만 그런 어설픈 연기에 속아 넘어갈 길동이가 아니었다.
눈치 빠른 길동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께서 말씀을 안 하신 거로군요. 하여튼 요즘 너무 덜렁대신다니깐!"
길동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화면에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신에게 곤란한 일이라도 생길까 봐 서희가 안절부절못했다.
인간이 신을 걱정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심리였다.
잠시 후, 입력을 마친 길동이가 서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신님을 대신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기호들로 가득 찬 화면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신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선행을 쌓았습니다. 작게는 가진 것을 나눠주는 선행부터 크게는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행까지 말입니다. 여기, 나라와 종족을 구한 업적도 있군요."
"네?! 제가요?! 그, 그럴 리가요……."
정말로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해 이곳저곳에서 무시당하는 주제에 나라를 구하다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서희의 생각을 읽어 낸 길동이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있군요. 하지만 기록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 죄송해요……."
서희가 서둘러 사과를 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길동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튼, 당신이 그동안 쌓았던 선행이 기준치를 넘어섰습니다. 어젯밤을 기점으로 말이죠. 사실 이 정도 선행 업적을 쌓은 영혼은 흔치 않습니다. 그 때문에 신께서 직접 당신을 만나러 가셨고 이렇게 저 같은 천사를 당신에게 보내시게 된 겁니다."
"아, 길동 씨는 천사였군요."
"그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길동이가 두 눈을 번뜩이며 서희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희가 순간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저어,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서희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였다.
"앗!"
갑자기 길동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서희가 고개를 들자 길동이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나비 한 마리가 꽃 주변을 가볍게 날고 있었다.
'왜 그러지?'
서희가 의아한 얼굴로 길동이와 나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나비 같은데.
지금껏 침착하던 길동이의 표정이 크게 흐트러져 있었다.
잠시 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길동이가 크게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제가 어디까지 설명했죠? 아! 아무튼, 당신의 선행 업적에 대한 보상이 내려졌습니다. 여러 보상 방식 중 당신에게 추천된 것은 '잠재력의 재발견'입니다."
'잠재력의 재발견?!'
보상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서희가 금세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 몫의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자꾸만 일이 커지는 것 같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뭘 물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까부터 나비를 힐끔거리는 길동이의 표정이 매우 초조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추천된 방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다급하게 묻는 길동이의 말에 서희가 엉겁결에 놀란 소리를 냈다.
"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길동이가 화면에 뭔가를 부지런히 입력했다.
어?! 이게 아닌데?!
당황한 서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나비에 정신을 팔린 길동이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서둘러 입력을 마친 길동이가 입을 열었다.
"보상 절차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미 오늘 겪으셨듯이 특수한 상황에 맞춰 미션이 발동될 겁니다. 그럼 당신은 그 미션을 수행하고 성공 여부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아, 네……."
그제야 오전에 있었던 일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무슨 비밀 요원도 아니고 미션이라니.
덩달아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RPG 게임도 떠올랐다.
지금 당장 무시무시한 괴물을 죽이고 레벨을 올리지 못하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점점 난감한 서희였다.
"물론 미션을 실패할 경우 페널티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니 신중하게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페널티?! 혹시, 정말 지옥 불에 던져지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실패하면 정말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더 궁금하신 사항 있습니까?"
어느새 설명을 마친 길동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초조해 보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회색 털 안으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질문을 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서희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 아니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동이가 달려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비를 향해 몸을 날리며 앞발을 힘껏 휘둘렀다.
나비가 가볍게 피하며 저 멀리 달아나자 쏜살같이 쫓아가는 길동이.
그런 길동이에게서 더이상의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아주 행복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혼자 남은 서희도 그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황당한 말들을 들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행 업적이며 미션이며 모두 하나같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말들이었다.
기억에도 없는 선행에 보상이 다 웬 말이란 말인가.
이대로 잠시 기다렸다가 길동이가 다시 나타나면 차근차근 설명해서 오해를 풀어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서희가 차분하게 앉아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어느새 서희는 바위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니?! 아직도 여기에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앗! 깜작이야!"
화들짝 놀란 서희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다시 왔는지 길동이가 당황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아, 그게.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몰라서……."
그러자 길동이의 얼굴이 금세 답답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아, 이런. 윤서희 씨. 아직 모르겠어요?"
"네?! 뭐가요?"
"이건 꿈속이라고요. 그냥 잠에서 깨면 됩니다."
"아, 그렇구나……."
그제야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안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런 서희를 향해 길동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니, 뭐 하십니까! 얼른 깨어나세요. 지각 아닙니까?"
"네?!"
지각이란 말에 놀란 서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순식간에 호수가 사라지고 자신의 원룸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에 서희가 잠시 비틀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회색 고양이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해있었다.
당황한 서희가 두 눈을 비비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고양이나 호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너무나 익숙한 자신의 원룸 안이었다.
정말 꿈이라도 꾼 것일까.
만약 꿈이라면 정말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어?! 맞다, 지각!"
서희가 황급히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이럴 수가.
정말 지각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순간 어제 겪었던 황당한 일들이 떠올랐다.
오, 이런! 안 돼!
악몽 같은 순간이 다시 재현되려는 순간이었다.
***
"정말 귀찮은 여자군."
일찍 출근한 도겸이 업무 준비를 하다 말고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거슬리는 게 있는 듯 보였다.
윤서희.
예능 2국에 소속된 계약 직원.
도겸이 그녀에 대해 어렵지 않게 알아낸 정보였다.
벌써 1년 가까이 근무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거지?
같은 회사에,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편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말이다.
1년 가까이 같은 층에 있으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니.
정말 묘한 일이군.
하긴,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의 돌발 행동 때문에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냥 돈 몇 푼 쥐여주고 돌아서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쏜살같이 달아나버린 여자.
다 잡았다 생각한 물고기가 그물에서 스르륵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도겸에겐 매우 낯설고 불쾌한 느낌이다.
덕분에 쉽게 매듭지어질 일이 번거롭게 돼 버려 영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 보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더욱 거슬렸다.
한 번도 계획에 어긋나게 살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모든 일은 자신의 예상 범위 안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규칙에 균열이 생겼다.
출퇴근용으로 구입한 차가 갑자기 고장이 나고.
어쩔 수 없이 탄 택시에서 휴대폰을 놓고 내리고.
남들에겐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통제해야 만족하고 늘 완벽하게 짜여진 틀에서만 생활하던 그에겐 모두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슈트 안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어떻게 택시에 떨어졌는지 의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불편한 심기에 난데없이 그 여자가 나타나 기름을 끼얹고 달아났다.
역시, 거슬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매듭짓고 싶었다.
이대로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혀 지낼 수는 없다.
어떻게든 사례를 해야겠는데.
아, 그렇군.
갑자기 도겸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마침 적당한 방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