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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마스터
작가 : 아범
작품등록일 : 2017.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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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연인이 된다는 건
작성일 : 17-07-26     조회 : 356     추천 : 0     분량 : 7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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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희가 금세 긴장한 얼굴을 했다.

 곧이어 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서희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여자가 먼저 앞장섰다.

 

 그녀의 이름은 추보리.

 예능 2국 3팀의 메인 작가다.

 계현호 PD가 이끄는 팀이었다.

 더불어 한유리가 속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서희가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뒤를 따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귀찮은 잡일이나 맡아 하는 자신을 메인 작가인 그녀가 따로 부를 일이란 없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곧 복도 한쪽에 멈춰 선 추 작가가 대뜸 서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윤서희 씨, 최도겸 PD랑 무슨 사이야?"

 

 "네?! 그, 그게 무슨……."

 

 뜻밖의 말에 서희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와 무슨 사이라니.

 대답할 말도 마땅히 없는 황당한 질문이었다.

 서희가 추 작가를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추 작가의 가느다란 눈매에서 칼날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섬뜩한 기분에 서희의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러자 추 작가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미 다 알고 얘기하는 거니깐 편안하게 말해도 돼."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서희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무, 무슨 사이는요……. 그, 그냥 아, 아무 사이 아닌데요……."

 

 서희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추 작가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꼭 두 번 얘기하게 만드는구나. 이미 알고 있다고 했잖아. 무슨 사이야, 두 사람!"

 

 당장이라도 잡아 죽일 듯이 사나운 목소리가 달려들었다.

 서희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저, 정말……. 아, 아무 사이 아니에요……."

 

 도대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굳이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PD와 파견 직원 사이라는 뻔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어리둥절한 서희를 향해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윤서희 씨, 사람 참 뻔뻔한 구석이 있네. 어제 두 사람 같이 있는 걸 내가 봤는데도 시치미야?"

 

 "네?!"

 

 "어제저녁에 두 사람 같이 있었잖아. 포장마차에서 시시덕거리는 게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던데. 내 말 틀려?"

 

 "……."

 

 순간 서희가 말문이 막혔다.

 아무래도 어제 두 사람이 포장마차에 같이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사이냐고 추궁을 당할 만한 일인가.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서희에게 바짝 다가선 추 작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좋게 얘기하면 꼭 가지고 놀려고 드는 것들이 있어요. 너 내가 누군지 몰라?"

 

 "그,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면?"

 

 "그, 그건 그냥 같이……. 저녁 먹은 게 다예요……."

 

 서희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그러자 추 작가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하던가. 최 PD가 미쳤어? 당신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랑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저녁을 먹게?"

 

 "지, 진짠데……."

 

 은근히 무시하는 말이 섞여 있었지만 지금 서희는 그런 말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는 괜한 오해로 최 PD에게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날까 봐 불안한 마음이었다.

 

 "너 안 되겠구나. 제대로 한 번 당해봐야 사람 무서운 줄 알겠네."

 

 안절부절못하는 서희를 향해 추 작가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을 기세였다.

 그러자 순간 서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자동 스킬 '카리스마'가 발동되었습니다]

 

 길동이의 목소리와 함께 서희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러자 추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물러섰다.

 

 '뭐야, 이거?'

 

 추 작가가 놀란 눈으로 서희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싸늘한 그녀의 눈빛에 추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뒤이어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몸을 옥죄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눈앞의 서희는 더이상 겁에 질려 있던 그녀가 아니었다.

 곧이어 무섭게 내려앉은 서희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전해졌다.

 

 "제가 왜 추 작가님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요. 일단 궁금해하시니까 말씀드릴게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나머지 추 작가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알 수 없는 기운에 잔뜩 짓눌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서희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제 제가 안경을 잃어버렸어요. 근데 마침 최 PD님이 그걸 찾아주셔서 고마운 마음에 제가 저녁을 대접해 드렸어요. 그게 다예요."

 

 말을 마친 서희가 추 작가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꽤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긴.

 서희 본인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추 작가가 갑자기 손을 뻗어오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대로 머리채를 잡히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지배해 버렸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마음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겁에 질려 있을 이유를 못 느꼈다.

 곧이어 자신도 모르게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희 본인이 듣기에도 오싹할 정도였다.

 

 추 작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희의 말에 크게 동요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은 떨쳐내지 못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쏘아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후, 추 작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고마운 사람한테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줬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요."

 

 "흥!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게다가, 최 PD가 당신 의도대로 순순히 그렇게 허접한 곳에 따라갔을 리도 없어."

 

 "그래서요? 어떤 말이 듣고 싶으신 건데요?"

 

 서희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더 이상 소문으로 듣던 그 호구가 아니었다.

 추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게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거지?'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서 여전히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추 작가 역시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마침내 추 작가가 처음부터 품고 있었던 의심을 드러냈다.

 

 "최 PD가 당신한테 뭐 약점 잡힌 거 있지?"

 

 "하아……."

 

 서희가 기가 찬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추 작가가 주춤했다.

 

 "아니야? 그러면, 둘이 정말 사귀기라도 한단 말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도겸을 주시해 오던 그녀였다.

 누가 그에게 접근하는지, 그가 어떤 이에게 관심을 두는지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그 결과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정작 그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이에게 서슴없이 상처를 입히며 으르렁댈 뿐이었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 일부러 사납게 구는 것 같았다.

 

 그를 남몰래 가슴에 품고 있던 그녀로서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가 알아서 접근을 차단했다.

 제발 이대로 계속되길 바랐다.

 이 미치도록 갖고 싶은 남자를 꼼짝 못 하게 가둘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이런 간절한 바람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인물이 그의 철통같은 경계심을 뚫어 버렸다.

 처음으로 그가 먼저 관심을 보이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 인물이 바로 윤서희였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고작 파견 직원 따위에게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보잘것없는 계집이라니.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 할 상대가 너무 가소로워 그저 헛웃음만 났다.

 

 겁도 많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부려 먹기에 제격인 여자.

 

 적어도 그녀가 알고 있던 서희는 딱 이런 정도의 인물이었다.

 살짝 겁만 줘도 알아서 꽁무니를 뺄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녀의 예상이 빗나간 것 같았다.

 지금 보니 보통 계집이 아니었다.

 온갖 순진한 척은 다 하더니 다급해지자 사나운 본성을 드러냈다.

 근본도 없이 굴러먹던 티가 났다.

 

 추 작가가 묘한 눈빛을 한 채 서희를 노려보았다.

 이런 추 작가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서희는 그저 차분하게 본인의 얘기를 할 뿐이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거 같아요. 형편이 너무 빠듯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포장마차에 모시고 간 거예요. 다행히 최 PD님이 이해해주셔서 같이 가주신 거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흥!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추 작가가 톡 쏘는 말투와 함께 서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서희가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저도 최 PD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이런 말씀 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요, 적어도 저처럼 허술한 사람에게 약점을 잡혀 끌려다니실 분은 아닐 것 같아요. 하물며 최 PD님과 제가 사귄다는 건……. 그저 황당한 얘기일 뿐이에요."

 

 말을 마친 서희의 얼굴에서 더는 싸늘한 기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씁쓸한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람과 내가 연인이 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스스로 그렇게 단정 짓고 나자 어쩐지 찹찹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좋아하는 감정 말고도 필요한 조건이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한 꼴이었다.

 갑자기 기운이 빠져버렸다.

 

 그런 서희를 위아래로 흘겨보며 추 작가가 말했다.

 

 "하긴. 최 PD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같은 사람이랑 사귈 이유가 없지."

 

 그제야 상황을 납득한 듯 그녀의 표정이 개운해졌다.

 그렇다고 서희를 곱게 보내줄 수는 없었다.

 추 작가의 표독스러운 눈빛이 서희의 빈틈을 노렸다.

 서희가 불안한 듯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 다 끝나셨으면 이만 가 볼게요."

 

 "아니.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돌아서려는 서희를 추 작가의 날카로운 음성이 붙잡아 세웠다.

 서희가 주춤하자 추 작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주제 파악하는 게 좋을 거야."

 

 "……."

 

 "사람은 다 각자의 급에 어울리는 사람과 맺어지는 거야. 신데렐라는 동화책 안에서나 존재하는 거라고. 괜히 주접스럽게 최 PD 근처에서 얼쩡대지 말란 말이야."

 

 또다시 날카로운 바늘 끝이 심장을 찔러왔다.

 이미 서희 스스로도 인정한 것을 굳이 꺼내어 상처를 헤집어 놓았다.

 버둥거리는 상대를 기어이 끄집어내려 비참한 꼴을 만들었다.

 

 서희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더는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지쳐있었다.

 반대로 추 작가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자기 수준에 맞는 짝짓기 상대를 찾아봐. 술 따르는 여자처럼 엉뚱한 사람한테 찝쩍댈 생각하지 말고."

 

 비수 같은 말이 날아들었다.

 비참한 기분이 서희를 무겁게 찍어 눌렀다.

 그제야 추 작가가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하아."

 

 혼자 남은 서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말처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너무 쉽게 상대를 아프게 만든다.

 보이지도 않는 깊은 곳에 상처를 낸다.

 상대가 만만하면 그 잔인함은 더욱 인정사정없어진다.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야.'

 

 스스로 당당해지려 했다.

 그래서 일부러 화장도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긴 세월 길들여진 습관은 잠깐의 용기로 극복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말을 하다 보니 스스로 자신을 비하했다.

 사람들의 비웃음이 익숙해진 탓일까.

 한없이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오래된 타이어처럼 그녀의 자존감이 닳아 없어진 것 같았다.

 

 '엄살떨지 마, 윤서희!'

 

 마음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또 다른 그녀가 외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처럼 우울한 감정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은 기분이 서희의 마음을 어두운 수면 아래로 끌어내렸다.

 

 서희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많은 일거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같은 기분에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겠지만 그건 그녀의 사정일 뿐.

 기분 따위에 휩쓸려 일을 미루었다가는 더 큰 재앙이 밀려올 것이다.

 

 녹초가 된 듯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자 멀리 도겸이 보였다.

 그러자 서희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숨겼다.

 

 '아, 이런 바보. 왜 자꾸 숨는 건데…….'

 

 울컥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마음에 바위처럼 묵직한 비참함이 더해졌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서희가 허물어지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뭐가 두려워 숨는 것일까.

 

 추 작가의 말대로 급에 맞지 않는 상대를 탐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피하려는 건가.

 어차피 그는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혼자서 뭘 기대한 거야, 윤서희…….'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한심한 마음에 서희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때마침 근처에 모여 있던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 PD 정도 되는 남자라면 분명 만나는 여자도 보통이 아니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얼굴이나 몸매, 스펙까지 빵빵한 여자들이 번호표 뽑고 잔뜩 줄 서 있을 거야."

 

 "하아, 난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겠지?"

 

 "당연하지. 전생에 나라를 몇 번 구했다면 몰라도."

 

 "흥! 냉정한 것 같으니."

 

 눈앞에 완벽한 이상형을 두고도 손 한 번 댈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들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서희가 조용히 침묵하며 그녀들의 마음에 동조했다.

 어느새 동병상련의 마음이었다.

 이때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근데,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야?"

 

 "어머, 야! 너 간첩이지? 어떻게 저 사람도 모를 수 있어?"

 

 "간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도 나처럼 자료실에만 갇혀 있어 봐. 그런 소리가 나오나. 아무튼. 그래서, 누군데?"

 

 "누구긴. 저 사람이 바로 기획조정실 서 팀장이잖아."

 

 "헐, 대박! 그럼, 저 사람이 그……."

 

 "그렇다니까."

 

 알 수 없는 말들이 오고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한가하게 수다나 엿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크게 한 번 심호흡하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를 보면 속상해질 것 같아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나갔다.

 그렇게 막 모퉁이를 돌아 나왔을 때였다.

 

 "어? 방금 최 PD 웃은 거 아냐?"

 

 "어머, 어디 어디?!"

 

 갑자기 호들갑을 떠는소리에 서희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서 팀장이라는 남자와 함께 뭔가를 들여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가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다정한 모습이었다.

 

 늘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에게서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서 팀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매우 부드럽게 보였다.

 순간 서희가 움찔했다.

 

 '안 돼! 그만 쳐다봐. 어서 가, 윤서희!'

 

 서희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서희의 귀로 여자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것 봐. 저러니까 그런 얘기들이 나오는 거야."

 

 "무슨 얘기?"

 

 "어머, 너 아직 못 들었어?"

 

 "뭐야, 무슨 얘기? 빨리 말해 봐."

 

 "최 PD 말이야. 게이라던데?"

 

 "어머, 정말?!"

 

 서희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맙소사!

 

 그가 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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