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뜻밖의 말이었다.
순간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듯 멍한 기분이 들었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서희가 멍한 얼굴을 했다.
뒤이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진짜 1급 비밀인데……."
"뭐가?"
"아니다.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야, 너 누구 답답해 죽는 꼴 보고 싶어? 빨리 안 털어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얼른 말해 봐. 뭔데, 뭔데?"
뭔가 말하기를 망설이는 여자를 다른 여자들이 재촉했다.
서희도 덩달아 귀를 기울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여자가 결국 귓속말처럼 속삭이듯 말했다.
"그게 말이야. 최 PD가 게이바에 드나드는 걸 누가 봤다더라고."
"어머, 정말?"
"그렇다니까."
"에이, 설마. 그거 혹시 누가 지어낸 얘기 아냐?"
"지어낸 얘기는 무슨! 지난달에 우리 팀 막내가 게이바에 들어가는 걸 직접 봤다고, 헉!"
"어머, 진짜?! 대박!"
"아, 미치겠네. 막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졸지에 제보자의 정보까지 털어놓은 여자가 금세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들 그런 건 관심이 없었다.
방금 전해 들은 따끈따끈한 정보에 흥분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희 역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정말일까…….'
더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 그가 누구를 좋아하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말이다.
곧 여기저기서 새로운 증언들이 추가되었다.
"하긴. 나도 그런 소문 들어본 적 있어. 남자랑 팔짱까지 끼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걸 봤다는 얘기 말이야."
"그것뿐만이 아니야. 심지어 남자랑 키스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어."
"꺅! 미쳤어, 미쳤어!"
"어머, 어쩌면 좋니."
키스 얘기가 나오자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서희 역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서 그가 남자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멋대로 상상해버렸다.
'앗! 무슨 짓이야, 윤서희! 정신 차려!'
서희가 빨개진 볼을 감싸며 엉큼한 상상에 빠진 자신을 다그쳤다.
그런 서희의 옆으로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나타났다.
방금까지 도겸의 '게이설'을 제기했던 그녀들이었다.
서희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여자들은 얘기에 집중하느라 그런 서희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서희를 지나면서도 그녀들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어쩐지. 내가 그렇게 들이대도 꿈쩍도 없더라니."
"어머, 동기님. 아무래도 그건 너에게 문제가 있었던 거 같은데요?"
"이게 죽으려고!"
"악, 살려 줘!"
두 명의 여자가 곧장 추격전을 벌였다.
뒤에 선 여자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최 PD가 남자들한테만 유독 호의적인 건 분명한 사실이야."
"맞아.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니까."
그녀들이 말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그제야 서희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붉어진 뺨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후끈했던 열기는 여전히 남아 서희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아갈 때야.'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서희가 냉큼 올라탔다.
7층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퇴근할 때 지우려 했지만 내친김에 지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오후에는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더는 누군가에게 보여 줄 기회도 없었다.
'잠깐이었지만 즐거웠어.'
거울을 바라보는 서희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곧이어 그녀가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마치 화장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지워나가듯 그녀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
저녁 무렵.
좁은 주택가로 낡은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왔다.
운전석에는 무심한 얼굴을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지닌 남자.
바로 도겸이었다.
어쩐지 낡은 승용차가 그의 빛나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물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칠 뿐이었다.
곧이어 새로 지은 듯 깨끗한 외관의 건물이 나타나자 그의 차가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건물 주차장에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비싸 보였다.
어둡게 선팅이 된 창문.
그 안으로 빛이 나는 외모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서늘한 눈빛의 남자.
그는 다름 아닌 도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잠깐의 시간을 두고 그가 전혀 다른 차를 타고 나타났다.
바뀐 것은 자동차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복장도 바뀌어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 차림이었던 좀 전과는 달리 매끈한 각이 살아있는 고급 슈트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차려입고 고급 승용차까지 타고 있자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회사 동료들이 그를 보더라도 전혀 몰라볼 정도였다.
그렇게 전혀 다른 모습의 도겸.
하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싸늘했다.
고급 승용차의 운전대를 잡고 있지만 아무런 감흥도 못 느끼는 듯 그저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때 마침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도겸의 시선이 차량 거치대의 최신 스마트 폰으로 향했다.
그가 업무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이었다.
도겸이 느긋한 동작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짜증 섞인 남자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휴우, 기다리다가 숨넘어가겠네. 전화 좀 빨리빨리 받아."
통화 연결음이 길어지자 답답했는지 상대가 대뜸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도겸은 묵묵부답이었다.
"여보세요? 너 내 말 안 들리냐?"
"말해."
"쳇! 여전히 무뚝뚝하기는."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도겸이 툭 쏘아붙이자 휴대폰 너머의 남자가 핀잔을 날렸다.
"어디야?"
"가는 중이야."
"오, 정말 오는 거야?"
도겸의 대답에 상대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도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까 낮에 얘기가 다 된 거로 아는데."
"거참, 말투하고는."
"……."
"좀 다정하게 말할 수 없어? 네가 자꾸 까먹나 본데 난 너의 베프야, 베프.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다른 건 몰라도 너와 나 사이에는 좀 더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계속 헛소리나 할 거면……."
"안 돼! 끊지 마!"
도겸의 싸늘한 말에 상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쓸데없이 수다 떠는 걸 질색하는 그의 성격을 잘 아는 듯 보였다.
"할 말이 남았나?"
"하여튼 인정머리 없는 놈 같으니."
"역시. 끊는 게 좋겠군."
"앗, 잠깐!"
도겸이 또 전화를 끊으려 하자 상대가 화들짝 놀라며 매달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용건만 말해."
도겸이 여차하면 버튼을 누를 태세로 말했다.
그 기운을 느낀 것인지 상대의 목소리가 금세 고분고분해졌다.
"하, 녀석 참. 그래, 알았다. 용건만 말할게. 낮에 얘기한 거 잘 기억하고 있는 거지?"
"물론."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가는 건 무효야. 명심해."
"너야말로 약속 지켜."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싫었어?"
상대의 질문에 순간 도겸이 움찔했다.
영원히 잊고 싶은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서진우.
지금 도겸과 통화하는 상대의 이름이다.
도겸의 오랜 친구이자 DG 프로덕션의 기획조정실 팀장이기도 했다.
거기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더 있었다.
그는 게이였다.
오래전.
그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얘기를 꺼냈을 때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도겸은 별 반응이 없었다.
당시의 대화 내용이다.
"나 게이야."
"……."
"나 게이라고."
"알아."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방금 네가 말했잖아."
"……."
"……."
"안 놀래냐?"
"왜 놀래야 하지?"
"관두자."
"……."
"해줄 말은 없냐?"
"난 게이가 아니야."
"……."
"……."
"어쩌라고."
"명심해."
"쳇. 나도 너 같은 놈은 싫어."
"어째서지?"
"게이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더는 묻지 마."
"그렇군."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 주면서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최근 문제가 발생했다.
한 달 전 일이었다.
이제 막 자려고 누운 도겸.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진우였다.
귀찮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 받으면 더 귀찮아지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건너편에서 진우의 횡설수설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취한 목소리였다.
은근히 걱정이 됐다.
위치를 묻자 여러 개의 술집과 클럽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걸어보니 역시 그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도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밤중에 나랑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가!'
결국, 도겸이 출동했다.
진우가 말했던 술집과 클럽들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가는 곳마다 여자들이 귀찮게 달라붙었다.
무섭게 쏘아보기.
차갑게 밀어내기.
단호히 거절하기.
보유하고 있던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들을 떼어냈다.
잘 밤에 굉장한 곤혹을 치렀다.
슬슬 오기가 발동한 도겸.
'네놈을 반드시 찾아주지!'
그때부터 진우가 갈 만한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허름한 게이바에서 술에 잔뜩 취해 있는 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겸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있었군.'
예상대로 진우의 주변에는 다른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술에 취한 진우에게 치근덕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겸이 서둘러 그들을 제지했다.
하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들을 상대할 때의 방법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남자였기 때문이다.
도겸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결국, 몸싸움이 벌어졌다.
주먹이 오가는 몸싸움은 아니었다.
서로 밀치고 당기고.
진우를 사이에 두고 사내들끼리 힘겨루기를 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우가 아니라 자신에게 더 많은 사내들이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대부분의 사내들이 자신에게 밀착해왔다.
그들은 어느덧 그와의 몸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라면 진우가 아니라 자신이 더 위험했다.
위기를 느낀 도겸이 순간적으로 힘을 쏟아 남자들을 뿌리쳤다.
뒤이어 널브러져 있는 진우를 둘러멘 채 게이바를 뛰쳐나왔다.
그 뒤를 남자들이 쫓아 나왔다.
서둘러 진우를 차에 태운 도겸이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따돌렸다.
속 편하게 자고 있는 진우를 바라보며 도겸이 중얼거렸다.
'무슨 속셈인 거지?'
생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친구였다.
함께 어울리며 한 번도 불편했던 적이 없었는데.
도겸은 화가 나는 것보다 걱정이 앞섰다.
다음날.
진우가 사과했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한바탕 곤혹을 치른 도겸이 다음날 진우를 추궁했다.
결국, 그가 실토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속상한 나머지 술에 자꾸 의지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겨우 그따위 일로!'
도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정도의 일로 자제력을 잃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도겸이 차갑게 쏘아보며 꾸짖었다.
위로 따위는 없었다.
그러자 진우가 대뜸 도움을 요청했다.
도겸이 차갑게 거절했다.
그런 도겸에게 진우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딱 한 번만. 딱 요번 한 번만 도와주면 돼. 그럼 앞으로 절대 걱정하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을게.'
'…….'
'맹세해.'
어느새 진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결국, 도겸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나 보지.'
그 말에 진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작전을 풀어놓았다.
이름하여 '도겸은 그저 거들뿐' 작전.
진우의 설명이 끝나자 도겸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딱 한 번뿐이야.'
그의 말에 진우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도겸이 그 손을 잡았다.
이렇게 두 사람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이상한 이름의 작전이 실행되는 D-DAY가 다가왔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