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은 조선을 떠나 삼천 명의 부하들과 함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화려한 율도국을 발견한다. 율도국 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아 길동은 율도국을 정벌하고 율도국의 백성들을 위로한 다음 왕의 자리에 올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아라는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설 홍길동전을 다 읽고 덮었다. 얼마 전까지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의적 홍길동에 대해 소설이 나왔다기에 몇 날 며칠을 기다려 얻은 값진 책이었다. 그런데 아라가 기대한 내용이 아니었다. 이 책에도 여인이 하는 일은 없었다.
"왕이 바뀐다고한들 여인의 삶이 달라질까...?"
아라는 다대포 아미산 중턱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가보고 싶다.......율도국......"
1. 만남.
무열은 오랜만에 있을 부자상봉에 들떠있었다. 뱃길따라 수백리를 건너오는 내내 아버지 길동을 만나면 무엇부터 말씀드리면 좋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니 어느 덧 조선 다대포에 도착했다. 길동이 율도국을 재건하기 전 조선에서의 활약상은 익히 들었다. 활약상 대부분이 조선관리들과 우호적일리 없는 일화들인지라 무열이 길동의 아들이자 율도국의 왕자, 게다가 무열은 길동의 부친 삼년상을 마칠 때 까지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소왕이다. 이 사실을 그들이 알아봐야 좋을리 없어 눈에 띄지 않는 조선 평민 신분으로 위장하여 호패를 제시하는데 그때 마다 무열은 낯빛이 붉어지고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개똥이가 뭡니까..."
"조선에서 흔한 이름이라기에."
무열은 호위무사 창이를 돌아보았다.
"사부의 무예만큼이나 융통성이 있으셨다면 좋았을텐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속이 허하니 국밥이나 한 그릇 먹고 갑시다!"
***
지난 삼 년간 그랬듯 조선에 오면 늘 가는 주막에 들러 국밥 한 그릇으로 빈속을 달래고 이 산길을 넘어 대왕께 가는 길, 금일은 낯설다. 낯선 인기척이 주막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오고 있다. 그리고 산길로 들어서면서부터 간격이 좁혀지고 있다.
"소왕.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무열이 뒤따라오던 창이를 돌아보았을 때 그 뒤로 보부상 아홉 명이 서있었다. 창이는 무열을 방어하며 그들을 살펴보았다. 보부상행세를 했지만 자객이 틀림없다.
살.기. 아까부터 느껴지던 낯선 기운은 바로 살기였다.
"너희는 보부상이 아니구나."
"역시 홍길동의 아들이라더니."
"누가 보낸 것이냐?"
"그걸 모르고 죽게될 것이다."
보부상들이 무열과 창이를 둘러싸고 일제히 공격했다. 그때 무열이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계란만한 공을 꺼내 자객에게 던졌다. 그러자 자객 몸에 맞은 공이 팡 터지며 안개가 자욱해졌다.
"이게 뭐야!"
안개가 걷히며 보부상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습니다."
"홍길동의 아들이라더니 도술을 쓴건가."
"분명 도술을 못 쓴다고 했는데."
그때 자객 중 한명이 단말마를 내며 쓰러졌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독침에 맥없이 쓰러지는 다른 자객들의 모습에 마지막 남은 자객은 아연실색했다. 나무 위에서 허공을 가르며 자객의 눈 앞까지 단숨에 내려온 무열과 창이는 자객의 목을 검으로 겨누었다.
"마지막이다. 누가 보낸 것이냐?"
"그...그것은....헉!!!"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을 맞고 자객이 쓰러졌다. 무열은 창이에게 남아서 죽은 자객을 살펴보라고 지시하고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바위로 달려갔다. 바위 뒤에는 수수한 복장의 길게 뻗은 눈매가 강단 있어 보이는 무열과 같은 또래의 소녀가 숨어 있었다.
"너냐?"
소녀는 고개를 젓더니 무열의 등 뒤를 검지로 가리켰다. 무열이 뒤를 돌아보자 어디선가 단검이 날아왔다. 순식간에 무열은 소녀를 감싸안고 방어했다. 단도는 무열의 어깨를 스쳐 나무에 가서 박혔다. 창이는 달려와 무열의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자신의 옷깃을 찢어 동여매 지혈했다. 그리고 무열이 다른 팔로 꼭 끌어안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누구..."
"아라야!"
세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낙과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열과 아라라는 소녀를 번갈아보더니 다짜고짜 사내가 무열의 멱살을 잡았다.
"니가 뭔데 내딸을 안고 있냐?!"
"아버지. 그 분은 절 구해주셨어요."
"뭐?"
아라의 아버지 홍삼은 무열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아라야...흑흑...이게 무슨 일이야."
"어머니, 전 괜찮아요."
아라의 어머니 길섬은 아라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아라는 오히려 길섬을 달랬다.
"그러게 무슨 산짐승을 잡는다고 이 봉변을 당해! 도담이 너도 그렇지. 아무리 아라가 시켰다고 계집애를 혼자 남겨두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예요? 어서 아라부터 업고 집으로 가요."
"저 걸을 수 있어요."
"시끄러. 업혀"
홍삼이 아라를 업고 앞장서서 걷자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도담이라는 소년은 뒤따르다가 무열을 돌아보았다. 길섬은 아라 또래인 무열에게 목례를 했다. 비록 어리지만 딸 아라를 구해준 은인이니 절로 높임말이 나왔다.
"우리 아라를 구해줬다고요? 이 은혜를 어찌 갚지...일단 우리집으로 같이 가요."
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섬의 뒤를 따르려던 무열을 창이 붙잡았다.
"괜찮을까요?"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단도를 던진 자객을 본 사람은 아라라는 아이 뿐입니다."
***
아라가 단검을 던진 자객을 그린 그림을 무열에게 건넸다. 무열은 아라가 건네 준 그림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림 속 자객은 작은 키, 호리호리한 체구, 검은 옷의 검은 복면, 긴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흔히 상상하는 그런 자객의 모습이었다.
"역시 복면을 하고 있었군."
무열과 창이는 다소 실망했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거 또 생각나는 거 없니?"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왜 자꾸 반말이신지?"
"아...미안. 나랑 같은 또래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본 과년한 처녀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오."
무열은 그제야 자신이 조선의 낯선 여인과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선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사대부의 나라라고 들었다. 여인이 모르는 사내와 대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절을 의심받는다 들었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객의 모습을 잊기 전 그림을 그려주겠다는 아라의 강단과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그리 생각하니 무열은 자객의 정체만 밝히려 혈안이 되어 무례를 범한 것 같아 민망해졌다.
"축지법을 쓰는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갔다 했습니다."
"축지법?"
"도대체 어떤 분들이기에 그런 위험한 일을 겪으셨는지 생사를 함께 한 몸으로 알아야 겠습니다."
"아...우리는 그냥 그 산을 우연히 지나던 조선의 평범한 백성으로..."
"제가 바보로 보이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도사님들이죠?"
"네?"
"다 봤습니다. 안개를 만들고 나무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아~ 다 봤소? 하하하. 그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고심 끝에 만든."
창이는 무열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열은 자신이 발명한 것을 밤이 새도록 설명하고도 남으리라.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대왕께서 기다리십니다."
무열은 창이의 귓속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라는 그런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저...제가 보면 안되는 것을 본 게 맞지요?"
"무슨 말인지..."
"수많은 소설책에서 보았습니다. 보면 안 될 것을 보면 죽던데. 저 위험한 거 맞지요?"
무열은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방 한 구석에 책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나 보오."
하지만 무열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과는 다르게 아라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무열을 보았다. 아라의 얼굴을 보자니 무열도 걱정이 되긴 했다. 왜 자신을 죽이러 왔는지 모를 자객들. 그리고 그들을 죽인 또 다른 자객, 혹은 주범일지 모를 자를 아라라는 소녀가 봤다. 아라의 말대로 당장 오늘 밤 죽이러 찾아올지 모르는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 가겠소?"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오늘 같이 가서 아버지를 뵙고..."
"제가 왜 그쪽 부친을 뵙니까? 못 볼 걸 봤다고 바로 혼인하는 법이 어디 있답니까?"
"혼....인이요?"
무열과 창이는 놀란 눈으로 아라를 보았다. 놀라기로는 아라가 더 했다.
"저는 정도 없는 처음 본 사내와 혼인하느니 평생 혼자 살다 죽을 것입니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나 보오."
무열의 말에 창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아버지를 뵙고 그대를 구할 방도를 찾고자 하는데 그냥 두고 갔다가 오늘 밤 자객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화를 당할까 염려되어 그런 것이니 곡해 마시오."
"아..............................."
"나 역시 정도 없는 여인과 생사를 같이 했다 하여 하루만에 혼인할 만큼 모자란 놈은 아니오."
무열의 농에 아라의 얼굴이 다대포 아미산에 활짝 핀 홍매화처럼 붉어졌다. 그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가 또 악몽을 꾸었나 봅니다. 가봐야겠어요."
아라는 부끄러움을 모면하고자 도담의 비명소리를 핑계로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무열은 그제야 크게 웃으며 창이를 보았다.
"왜 부끄러움은 제 몫일까요? 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하하하. 그리 곡해할 줄은 몰랐습니다. 혼인이라니..."
"꼭 같이 가야겠습니까?"
창이의 걱정어린 물음에 무열은 웃음기 사라진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그 자객이 오늘 밤에라도 저 여인을 죽이러 오면 어떡합니까?"
"허나 우린 대왕만 뵙고 내일이면 조선을 떠나는데 그 후에는 어쩌시려고요?"
"대왕께서 윤허 해주시고 여인도 원한다면 율도국으로 데리고 가야지요. 조선에 있는 한 자객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을테니까요."
아라는 방 밖에서 무열과 창이의 대화를 듣고 알 수 없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왕? 율도국? 설마...그 홍길동?'
아라는 오늘 율도국에서 왔다는 이 사내를 만난 것이 인생에 중대한 변화를 몰고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드디어 조선을 벗어날 기회가 왔다!'
***
아라의 부모는 과년한 처녀가 외간남자와 동행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아라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아라는 늘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다. 특히, 책을 탐독하며 그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조선의 여인 중 누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아라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번 동행을 강행하리라 다짐했다.
"그럼 도담이도 함께 가거라."
"오라버니의 악몽이 시작되었어요. 곧 지병이 도질겁니다. 어머니께서 돌봐주셔야지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옷을 입으니 꼭 사내 같지요?"
아라는 도담의 옷을 입고 사내 행세를 하며 길섬을 안심시켰다. 무열도 그리 멀지 않아 하룻밤이면 된다고 아라의 부모를 안심시키는데 거들었다. 타들어가는 부모 속은 모른 채 아라는 굳은 결심으로 남장까지 해가며 무열과 창이를 뒤따라갔다. 그 모습을 도담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열은 그런 도담의 눈이 신경쓰였다.
"오라버니와 각별한가보오?"
"네. 오라버니는 저 없으면 안되거든요."
"여느 오누이랑은 좀 다르네요."
"그런가요?"
무열 일행은 한참을 걸어 마을에서 멀어진 산길에 들어섰다. 아라는 무열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아까 두 분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순간 무열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났다. 무열은 가던 길을 멈추고 아라를 보았다.
"율도국이라면 홍길동전에 나오는 그 율도국이 맞나요?"
"그 소설을 읽었소?"
"네. 소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짜 있었다니."
"하하하. 진짜 소설을 많이 읽나 보오."
"정말 그런 이상국이 있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율도국은 어떤 곳인가요? 조선처럼 여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인가요?"
무열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평등한 나라."
"여인이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무예를 익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곳입니까?"
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나라네요?"
"뭐가 이상합니까?"
"모두가 평등한 나라라면서 왜 왕이 계신거죠?"
무열은 호기심어린 아라의 눈빛을 응시했다. 무열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껏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은 것을 처음 본 조선의 여인이 무열에게 물었다. 무열은 누군가 이런 의문을 가져주길 바라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이을 거라고 여겨온 사람들에게 생각해 왔던 것을 들려주고 싶었는데 그걸 제대로 들어 줄 사람을 찾은 짜릿한 기분이 들어 설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