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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왕자
작가 : 이윤
작품등록일 : 2017.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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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지애
작성일 : 17-07-21     조회 : 304     추천 : 4     분량 : 6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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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열과 아라는 아침 일찍 짐을 꾸려 길동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아라의 집으로 출발했다. 창이는 길동의 명으로 조선에 남아 자객의 출처를 밝히고 길동과 함께 율도국으로 가기로 했다. 창이는 자객이 또 나타날 것이 염려되어 재차 함께 가지 않아도 되는지 확인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어린 애도 아니고."

 "제 눈에는 어린 애로 보입니다만."

 "사부님! 고작 세 살 차이인데 너무 밑으로 보십니다."

 "나이가 아니라 무공이요."

 "걱정 마십시오. 저에게는 든든한 무기들이 가득합니다."

 

 무열은 봇짐을 자신있게 두드리며 해맑게 웃었다. 무열의 미소를 보고 창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열은 창이를 만난 후로 떨어져 본 적이 없어 창이가 없는 빈자리가 어색했지만 아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금방 잊혀졌다.

 

 "낭자는 언제부터 그렇게 책을 좋아했소?"

 

 아라는 왜 서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잊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좋아서가 아니었다. 눈만 뜨면 '쓸모없는 계집애는 왜 낳아서...'라며 엄마를 구박하는 할머니도 싫었고,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는 엄마도 싫어서였다. 사내 아이들이 하는 것은 여자 아이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오기로 글을 배우고 서책을 읽었다. 무예도, 뱃질도, 사냥도, 사내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라도 다 배웠다. 하지만 아라가 서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할머니는 아라를 더 냉대했다. 특히, 오라버니가 8년 전 집에 온 후로 할머니는 도담이보다 뭐든지 잘하는 아라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계집애가 쓸데없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아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시울을 붉히는 아라를 보고 당황스러울만도 한데 무열은 묵묵히 그런 아라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낭자는 어떨지 모르지만, 난 진심으로 낭자를 벗이라 여기오."

 

 아라는 마음이 편해졌다.

 

 '괜찮아.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가 아니야.' 라고 무열이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나도 그랬소. 사내가 되서 방에 틀어박혀 책만 본다고 사람들이 수군댔지."

 

 홍길동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홍길동만큼 무예가 뛰어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무예 실력은 늘지 않았고, 무열은 아버지의 도력과 무예에 버금 갈 만한 자신만의 무기를 갖고 싶었다. 나무에 더 잘 올라갈 수 있는 신을 만든다던지 펑 터지면 안개가 퍼진다던지 하는. 사람들이 보면 놀랄만한,

 

 '역시 홍길동의 아들'이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그런데 이런 저런 방도를 찾기 위해 읽기 시작한 서책의 재미에 푹 빠져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자 사람들이 걱정했다.

 

 "나도 아버지가 서책을 자주 숨기셨었지. 무예 연습 좀 더 하라고. 하하하"

 

 무열의 화통한 웃음소리에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글을 익히고 서책을 많이 읽으면 여자 아이라고 아무도 깔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다.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했는데 오직 무열만이 자신을 인정해 주었다.

 고작 어제 만난 사람. 어디 있는지도 모를 나라의 왕자라는 이 사내 곁이라면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무열은 아라에게 그런 기운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어제 만난 것 따위는 중요치 않게 되었다. 이 사내를 따라가리라.

 

 "나 율도국에 꼭 가고 싶어요."

 "율도국에 가면 낭자가 읽고 싶은 만큼 읽고 살아도 아무도 뭐라 안할 거요. 우리 어머니께서도 서재원이라는 곳을 만드시고 그곳에서 자주 백성들과 책을 읽고 토론을 하신다오. 율도국에 가면 낭자가 서재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어머니께 말씀드려 보겠소 ."

 

 아라는 설레임과 기대감을 담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보부상이 무열과 아라의 옆으로 지나갔다. 보부상을 본 아라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것 마냥 긴장하여 무열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여차하면 있는 힘껏 달릴 준비를 했지만 보부상은 자객이 아닌 진짜 보부상이었다. 보부상이 지나가고도 아라는 한참이나 무열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이제 날 벗으로 여기나 보오?"

 

 무열의 말에 아라는 그저 제비꽃같은 소박한 미소를 지으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무열은 그런 아라를 보고 기분이 좋았다. 고작 어제 만났지만 대화하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걸 보니 마음이 통하는 벗을 얻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었다. 이 여인과 율도국에 함께 가서 앞으로 수많은 같은 책을 읽고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눌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그렇게 같은 상상을 하며 산내음 물씬 풍기는 산길을 함께 걸어 아라의 집 근처까지도 손을 잡고 오던 두 사람은 현실과 맞닥뜨린 순간 표정이 굳었다.

 

 "오라버니."

 

 아라가 순간 잡았던 무열의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을 노려보던 도담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아무 말없이 아라의 손을 잡아 끌고 집으로 갔다.

 

 "도가 지나쳐."

 

 무열은 도담의 눈빛이 여느 오라버니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8년 전.

 

 "이제부터 도담이가 아라 오라버니야."

 "나보다 작은데 왜 얘가 내 오라버니예요?"

 

 도담이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라한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다에 빠져 죽다 살아났다는 도담이는 그 후,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이전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도담은 틈만 나면 머리에 맴도는 이상한 말을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끄적이곤 했다.

 

 "야! 너 글 쓸 줄 알아?"

 "야가 뭐야! 오라버니한테."

 

 아라의 할머니는 아라보다도 체구가 작은 도담을 꼭 끌어안고 따뜻한 아랫목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아라를 노려보았다. 그러면 닫히는 문틈 사이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라를 도담은 끝까지 바라보았다.

 

 도담은 늘 밥을 먹을 때 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도담은 할머니와 홍삼과 갓 지은 밥에 갓 구운 생선으로 맛있게 먹었다. 늘 아라와 길섬은 아궁이 앞에 둘이 앉아 밥을 먹는데 도담은 오히려 그게 부러웠다.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도담은 늘 엄마의 사랑이 고팠다. 다른 집 엄마들은 딸보다 아들이 우선이었지만 어쩐지 길섬만은 도담보다 아라를 더 아끼는 것만 같아 서운했다. 그래도 도담은 아라가 싫지 않았다. 아니 아라가 좋았다.

 도담은 동네 사내 아이들과 놀 때면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너 주워 온 아이라며?"

 "맞아. 우리 아빠한테 들었어. 너 바다에서 아라네 아빠가 주워왔대."

 "아니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쟤 할머니가 아라네 엄마 구박해서 아라네 아빠가 쟤 밖에서 낳아왔대."

 "야. 네가 말해 봐~!"

 

 하지만 도담은 알아 듣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하는 도담을 아이들이 괴롭히면 아라가 나뭇가지를 들고 달려와 아이들을 때리며 도담을 지켜주었다. 꼭 그럴 때만 오라버니라고 하면서.

 

 "우리 오라버니 괴롭히면 가만 안 둬!"

 

 오.라.버.니 라고 하는데 도담은 아라가 그 소리할 때가 참 좋았다.왠지 그 말을 할 때면 아라가 자기 편인 것만 같아서. 그리고 아라가 손을 잡고 집으로 데리고 와 줄 때가 가장 좋았다.

 

 "자. 이거 따라 써 봐."

 

 가족 중에 아라 말고는 아무도 글을 몰랐다. 늘 아라를 혼내기만 하던 할머니 조차도 오라버니에게 글 좀 가르쳐 주라고 말할 때 만큼은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아라는 싫다며 그때 마다 집을 뛰쳐나갔지만 이렇게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올 때면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려가며 글을 가르쳐 주곤 했다.

 

 "그런데 네가 맨날 쓰는 글은 본 적이 없어. 악몽 꿀 때 하는 소리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고."

 

 도담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들은 말인지. 그저 가끔 찾아오는 온몸의 통증과 더불어 누군가에게 쫓기는 악몽을 꿀 때면 들려오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

 그 말을 알아내기 위해 아라가 알려주는 글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네 사내 아이들이 아라보다 커지기 시작하면서 도담도 아라보다 키도 덩치도 더 커졌다. 도담은 이제 자신이 그들로부터 아라를 지켜주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와서 아라와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아라를 데리고 가려 한다.

 

 ***

 

 "절대 안돼!!!!!"

 

 무열은 깜짝 놀랐다. 옆을 보니 아라는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해 보였다. 홍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조선은 위험합니다."

 "죽어도 고향에서 죽을 거요."

 "그러면 낭자만이라도."

 

 홍삼은 벌떡 일어나 아라의 손목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무열은 서둘러 따라나와 홍삼을 붙잡았다.

 

 "언제 그 놈이 나타나 낭자를 위협할지 모릅니다. 제가 지켜주고 싶습니다."

 "내 눈엔 그쪽이 제일 위험해 보이요. 갑자기 나타나서 뭐? 고향을 버리고 생판 모르는 나라에 가서 같이 살자고? 그럼 우리 어머니 묘 벌초는 누가 하나? 제사는 어쩌고!"

 "제사는 율도국에서도 하실 수 있습니다. 살 방도가 있는데 어찌..."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갈 순 없지. 죽어도 내 어머니 옆에서 죽을 거요!"

 "난... 갈 거야."

 

 아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라의 손목을 잡고 있던 홍삼도, 무열도, 발을 동동 구르던 길섬도, 도담도 아라를 보았다.

 

 "난 이 분을 따라 율도국에 갈 거예요."

 "뭐?!"

 

 홍삼은 화를 참지 못하고 아라의 뺨을 때렸다. 아랑곳 안하고 꼿꼿하게 서 있는 아라를 보자 홍삼은 더 열이 오르는 거 같았다.

 

 "서책 끼고 살 때 부터 알아봤어. 헛바람만 잔뜩 들어서. 이래서 계집애가 글을 알아봐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게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뭐요?"

 "아라는 제가 본 그 어느 여인보다 훌륭히 살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봤다고 아는 척이야!"

 "얼마나 봤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고 사는 인간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쓸데없는 소리.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한 번 사는 인생입니다. 따님이 좋아하는 책 마음껏 읽으며 능력을 발휘하고 살게 하고 싶지 않으신지요?"

 "오호라~ 이제 보니 지켜주네 어쩌네 하면서 애 허파에 바람만 잔뜩 넣었구만!"

 "아버지! 그만 하세요."

 "넌 가만 있어. 내 이 작자를 아작을 낼라니까."

 "그럼 저도 가만 안 있을 거예요."

 "가만 안 있으면 네가 어쩔건데?"

 "죽어버릴 거예요. 숨 막혀서 못 살겠어요. 계집애라 이건 안 된다, 저건 안 된다. 안 된다고만 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은 못 살겠다고요."

 "정신 차려 이것아! 저 작자가 뭐라 꼬였는지 몰라도 죽어도 넌 조선에서 죽어야 할 팔자야. 그렇게 태어났다고."

 "그런 팔자가 어딨어! 난 벗어날 거예요. 아버지 허락 필요없어요. 난 갈거니까."

 "이...이...천하에 불효막심한!!!"

 

 퍽!!!

 

 홍삼은 기가 막혔다. 무열이 아라를 감싸안고 대신 등짝을 맞았다. 홍삼이 무열을 아라에게서 떼어내려 하자 그때 도담이 달려와 무열을 아라에게서 떼어내고 주먹으로 얼굴을 쳤다.

 

 "꺼져."

 

 쓰러져 있는 무열을 아라가 일으켜 세워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갔다. 아라는 이대로 무열과 율도국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 앞을 도담이 가로 막았다.

 

 "비켜."

 

 도담은 아라의 손목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무열이 아라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오라버니. 난 이 분을 따라 갈 거야."

 "아라야."

 "오라버니도 알지? 내가 얼마나 답답해 했는지."

 "그래도 이건 아니야."

 "어차피 조선에서 시집 간 여인은 남의 집 사람이잖아. 그렇게 생각해."

 "뭐?"

 "그리고...아버지, 어머니는 오라버니만 있으면 되니까."

 

 도담의 가슴에 폭풍이 몰아쳤다. 우리 둘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라를 이해하고 도담을 이해해 주는 이는 우리 둘 뿐이라고.

 

 '도담이는 바다의 신이 준 보물이에요. 진짜 친자식처럼 잘 키울래요.'

 

 도담은 갑자기 그 말이 머릿 속에 맴돌았다. 듣지 말았어야 한다고.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잊고 진짜 친오누이처럼 지내려고 했는데.

 

 "알지도 못하는 놈 따라 가게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누구보다 날 잘 알아 주시는 분이야."

 

 도담은 아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서 영혼이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라는 힘이 풀린 도담의 손을 뿌리치고 무열의 손을 잡아끌며 바닷가로 달려갔다. 무열은 달리던 아라를 잡아 세웠다. 눈을 피하려는 아라의 양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마주쳤다. 무열의 두 손은 아라의 눈물로 물들어갔다.

 

 "정말 이대로 나와 함께 율도국으로 가도 괜찮소?"

 "늘 꿈꾸던 곳에 갈 기회가 왔어요. 너무...너무...가고 싶은데..."

 

 아라는 밤하늘과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아득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역시 저 혼자는 못 가겠어요."

 

 무열은 괜찮다는 듯 아라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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