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숨이 붙어 있다니 독한 계집."
"우리야 잘됐지. 바로 배 옆으로 떨어져서 키키키."
들린다. 도담은 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라 다 알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라의 이야기라는 것도 알았다. 마을 젊은 사람들이 잡여와 두려움에 떠는 가운데 도담은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예쁘장 하던데 두목 모르게 어때?"
"난 됐어. 괜히 두목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려."
"쩝..."
도담은 한 왜구가 아라를 노리는 듯 한 말을 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아라에게 가야한다. 그런데 아라를 어떻게 지키지? 자신을 도망시키려 왜구의 칼에 몸을 던진 어머니께 약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라를 지켜주겠다고. 도담은 왜 자신이 왜구들의 말을 알아듣는지 궁금하기 보다 아라가 살아있고 위험할지 모를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아라를 지켜야 할지 궁리하게 되었다.
"기둥 옆 짚더미 속에 무기들이 있으니."
기둥 옆 짚더미? 도담은 왜구 둘의 눈을 피해 그쪽으로 슬금슬금 옮겨 갔다.
"쉿. 누가 듣겠어."
"다 조선놈들인데 누가 알아듣는다 그래. 암튼 잘 지키고 있어. 나 잠깐 위에 좀 다녀올게."
"알았어."
도담은 뒤로 묶여있는 손을 짚더미 속으로 넣어 무기를 찾았다.
삭-!
칼날이 손가락을 스쳤다. 도담은 손가락이 쓰렸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칼날에 밧줄을 비벼 끊으려 노력했다. 그때, 도담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스윽 다가왔다. 들킨것인가! 도담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왜구는 도담을 지나쳐 더 안으로 들어갔다. 도담은 서둘러 밧줄을 칼날에 비볐다. 다들 지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틈을 타 남은 한 놈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라를 음탕한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슬금슬금 아라에게로 다가갔다. 아라는 간신히 뜨고 있는 눈으로 왜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불안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오지마...오지마..."
하지만 아라가 안간힘을 내어 뱉어낸 말은 허공 속에 흩어져버렸다. 불안감은 적중했고 왜구는 아라에게 다가와 옷을 벗기려 했다. 손에 들고 있는 창이 거추장스러운지 왜구는 잠깐 창을 옆에 두었다.
"악! 저리 가! 저리 가!"
아라가 온 힘을 짜내 왜구를 밀어내고 벗어나려 발버둥치려 해도 기진맥진한 몸으로는 무리였다. 아라의 옷을 벗기려던 왜구가 억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아라 위로 덥쳐오던 왜구의 몸을 누군가 아라의 옆으로 밀쳤다. 아라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장검을 든 도담이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도담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 번 더 왜구를 장검으로 푹 찔렀다. 핏물이 사방으로 퍼지고 도담의 얼굴도 피범벅이 됐다.
"오라버니......."
아라는 그 말을 하고 기절해 버렸다. 배 위로 나갔던 왜구가 내려와 그 상황을 보고 다른 왜구들도 데리고 와서 도담을 잡으려 혈투를 벌였다. 도담은 결국 수적인 열세에 붙잡혔고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서야 두목 앞으로 끌려갔다. 왜구들은 동료를 죽인 도담을 죽이자고 아우성이었다. 두목이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도담은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온 힘을 다해 외쳤다.
"그 놈이 두목의 여인을 겁탈하려 했소."
"너 우리말을 할 줄 아느냐?"
"그렇소. 난 일본, 조선말 모두 할 줄 아오. 나를 이용하면 조선포로들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니 살려주시오."
"호오~ 아무리 그래도 내 부하를 죽인 놈을 어찌 믿고."
"그는 당신의 것을 허락없이 취하려 했으니 당신의 부하가 아니오. 하지만 난 당신의 것을 지켜주었으니 이제 당신의 부하요."
두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책임지고 조선 포로들을 노예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고 팔도록 해라. 그러면 내 부하로 인정해주지."
"좋소."
도담은 아라를 지키기 위해 같은 조선 포로들을 비싼 값에 노예시장에 파는 일을 도맡아했다. 조선인의 원망과 멸시의 눈빛은 도담에게 신경 쓸 것이 못되었다. 오로지 아라만 지키면 도담은 그걸로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었다. 아라는 그런 도담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같은 조선인들을 자신들이 살기 위해 중간에서 파는 일을 하다니. 도담은 더이상 아라가 알던 조선 어촌마을의 순박하던 남자아이가 아니었다. 계산적이고 영악한 해적이 된 사내만 있었다. 아라는 도담이 그렇게 변한 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함인 것에 더 괴로웠다.
"나도 상단에 팔아줘."
"뭐?"
"오라비가 이런 짓 하는 거 더는 못 보겠어. 다 나 때문이잖아...나 때문에 사람 죽이고...나 때문에 부모 죽인 원수 놈들 밑에서 같은 조선사람 팔고..."
"아라야."
"나도 차라리 팔려가서 죽어라 일하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아."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노예로 팔려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그나마 두목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으니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우린 벌써 물고기밥 신세였을 거야."
"우리 부모님 죽인 원수 밑에서 같은 조선사람 파는 일이나 하고 사느니 그게 낫지."
"아니. 그럴수록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서 복수를 해야지."
"!"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지금 여기서 우리도 팔려가면 죽도 밥도 안 돼. 알겠어?"
"....복수....그래....복수해야지...그래...그럼 차라리 지금 당장 저 왜구놈들 죽이자......"
도담은 홀린 듯 두목에게 가려는 아라를 붙잡았다.
"해도 내가 해."
"아니, 내가 할래."
"정신 차려!"
그 후, 수시로 아라는 두목을 죽일 계획을 세웠고, 도담은 매번 그것을 막았다. 도담은 아라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아침에 부모님도 잃고 여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초도 겪었으니 오죽하랴. 그럴 수록 도담은 아라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점점 더 강해지고 악랄해져만 갔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아라가 두목을 죽이려다가 오히려 아라가 죽을 것만 같았다. 도담은 노예시장에 나온 상단 행수들 사이에서 마음이 약해 노예들을 함부로 부리지 못하는 규모가 작은 상단 행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노렸다. 일부러 그의 물건을 슬쩍 훔쳐 찾아주는 척 하며 환심을 사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행수는 도담을 마음에 들어했고, 제법 비싼 값을 치루고 도담과 아라를 샀다.
"아라야, 네가 싫어하는 일 이제 안 해. 이제 우리 둘만 생각하고 살자."
사실 도담은 처음부터 부모님 복수를 할 마음도 없었다. 그저 아라와 살아남기 위해, 아라를 살리기 위한 명분을 쌓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아라를 위해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이제 된 것이다. 비록 상단 노예면 어떠랴. 아라와 새로운 인생을 꾸려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라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고 아라와 혼인도 하고 지금처럼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며 살리라 다짐했다. 도담은 아라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리라 마음 먹고 일본 큐슈의 작은 상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구분투했다. 그런 도담의 노력으로 아라는 점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다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며 상단 일에 적응해 가는 아라를 보며 도담은 뿌듯했다. 아라가 그린 무열의 초상화를 보기 전까지는.
***
무열은 묵묵히 지현왕후의 삼년상을 치루고 스물한 살이 되었다. 길동은 무열이 서재에만 틀어박혀 지내자 국혼 준비를 서둘렀다.
"왕자가 여인을 가까이 할 일이 없으니 연회를 열어 다함께 즐기며 스스로 짝을 찾도록 해줘야겠소."
"차라리 조선, 명, 일본과 국혼을 하심이 어떠신지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걸 하라고 하는군. 하하하. 우리가 율도국을 재건한 것이 열한 해 밖에 되지 않았소. 아직은 나라의 화합과 민심을 아우르는 것이 우선이니 왕자비 또한 율도국의 여인이 합당할 듯 하오."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율도국이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조선 한양 면적의 두 배 조금 넘는 작은 섬나라가 연회로 들썩였다. 이번 연회에서 비밀리에 왕자비 간택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퍼지며 율도국의 처녀들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그 설레임은 연회를 위한 꾸밈비 지출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갑작스럽게 옷감이며, 화장품, 꽃신의 수요가 늘어나 곱다고 소문난 물건은 금방 동이 났다. 급기야 잦은 무역을 하는 일본까지 소문이 전해질 정도였다.
"연회준비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느냐?"
"예. 일본 큐슈현에서 온 상단도 연회에 참석하고자 찾아왔다고 합니다."
"오호~ 그래?"
"상단 행수가 연회 전에 대왕님을 미리 알현하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좋지. 준비토록 하게."
"예."
"왕자도 연회 준비를 잘 하고 있겠지? 자신의 짝을 찾는 자리이니만큼 왕자도 단장을 잘 하고 나와야 할 것이야."
"저...그것이......"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환관이 없는 율도국에서는 대신 직언관(直言官)을 곁에 두고 왕에게 직언을 하며 보필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길동의 직언관이 직책에 맞지 않게 난처해 하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
"왕자님, 어서 채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무열을 보필하는 임상궁, 하연은 무열의 서재 앞에서 안절부절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삼백육십오일 온난한 율도국에서 땀 흘리는 모습이야 흔하디 흔한 일이지만 가뜩이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데 이렇게 난처할 때는 몸에서 비오 듯 땀이 쏟아지니 하연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왕자님, 자꾸 이러시면 대왕님께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준비하셔도 빠듯합니다."
"내가 들어가 보겠네."
창이가 하연의 뒤에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하연은 볼이 발그레졌다.
"호위대장님~ 그럼 부탁드립니다."
"걱정마시고 가보시게."
"아니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러시던지. 왕자님, 들어가겠습니다."
한 해 전 호위대장이 병으로 직위에서 물러나고 창이가 호위전 수장인 호위대장이 되었다. 그 후로 궁녀들 사이에서 창이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져 왕자인 무열보다 율도국 신랑감 일순위가 되었다. 창이는 서재로 들어가 무열을 보았다. 늘 그렇듯 무언가에 깊이 빠져 창이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무열을 위해 창이는 인기척으로 기침을 세 번 했다.
"아! 사부 오셨습니까?"
"이제 호위대장이라 불러주십시오."
"아...자꾸 까먹지 뭡니까. 오늘은 능소화파에 대해 뭐 좀 얻은 것이 있습니까?"
창이는 고개를 저었다. 삼년 전, 무열을 피습했던 자객들, 그리고 지현왕후를 암살한 자객 모두 능소화 표식을 쓰고 있어서 무열과 창이는 그들을 총칭 능소화파라 불렀다. 하지만 지난 삼년 간, 무열과 창이 둘이서 비밀리에 조사하다보니 이렇다 할만한 증거도 잡지 못했다. 무열은 오늘 자신을 위한 날인 것도 잊은 채 여전히 그 뒤를 쫓느라 정신 없어 보여 창이가 한마디 했다.
"밖에서 다들 기다립니다. 왕자님을 위한 날이니 채비를 서둘러 주시지요."
"아...그렇지...호위대장도 내가 꼭 국혼을 해야한다고 보십니까?"
"네."
"과연 제가 해도 될까요?"
"그럴수록 더욱 가정을 일구시고 굳건한 모습을 보이셔야지요."
"제 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도요?"
"지키시면 됩니다. 제가 아는 왕자님은 지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전 삼년 전 어머니도 마음을 나눈 벗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단 하루를 살아도 즐겁게 살라 하셨지만 전 지난 삼년 간 단 하루도 즐겁게 살지 못하여 불효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혼을 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드리셔야 합니다."
"네. 그리고 모든 진상도 밝힐 것입니다."
"네."
"...오늘도 아라 낭자에 대해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까?"
"네."
"시신이 없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고 믿어도 되는 증좌겠지요?"
"그리 믿고 지난 삼년 간 찾아헤매셨지요."
"매일 밤 악몽을 꿉니다. 아라낭자가 화염 속에서 절 애타게 부르는..."
"왕자님, 아라낭자는 꼭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모든 걸 다 잊고 연회 준비를 하십시오."
"사부......"
"호위대장입니다."
하연은 서재 안에서 창이가 무열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귀기울였다. 하지만 잘 들릴지 않았다.
"호위무사님 목소리는 청량도 하지~"
하연은 무열과 창이가 서재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서둘러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창이를 바라보았다.
"임상궁조차 호위대장님만 바라보니 왕자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왕...왕자님, 무슨 그런 말씀을..."
"근데 어쩌나~ 임상궁 자네는 호위대장님 여인상이 아닌데~"
"네?!"
"하하하. 울지는 말거라~"
"짓궂으십니다."
앞장 서서 걷는 무열을 하연은 졸졸졸 초조하게 뒤따라갔다. 창이는 그런 하연 옆으로 지나가며 귓속말을 했다.
"왕자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거요."
무열 뒤를 따르는 창이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은 또 다시 볼이 발그레지고, 온 몸에 폭우가 쏟아지 듯 땀이 흘렀다.
***
평소에는 소박해 보이던 왕궁이 연회로 인해 화려하고 웅장해 보였다. 형형색색의 등으로 장식된 대원전(大園殿)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경이롭기 그지 없었다.
"대원전을 가득 메운 율도국 여인들의 곱디 고운 자태가 밤하늘의 별에 비할 바가 아니구나. 왕자도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예."
"대왕께서도 다시 장가가 드시고 싶으신가 봅니다."
"오셨소?"
안현왕후와 해소왕후가 길동과 무열 양 옆에 앉았다.
"왕자, 눈이 가는 여인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여인들 틈으로 들어가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우리 왕자는 학식이 높아 대화가 잘 통하는 여인이 어울릴테니."
안현왕후는 무열의 손을 잡으며 격려를 해주었다. 무열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모님은 절 잘 아신다니까요. 아! 왕비님."
"괜찮습니다. 이모를 이모라 부르는데 호칭이 대수겠습니까?"
"역시 왕비는 화통하시오."
"송구합니다. 대왕."
"왕자가 오늘 깜짝 놀랄 만한 인연을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길동은 무열을 격려하고 연회장으로 내려가 보라고 손짓했다. 무열은 길동과 왕후들에게 목례를 하고 연회장 한복판으로 내려갔다. 무열이 내려오자 율도국 여인들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길동과 안현왕후, 해소왕후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창이는 무열의 옆에 서서 귓속말로 지나치는 여인들이 어느 집의 여식인지 일러주었다.
"사부, 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위대장입니다."
"아! 참참...자꾸 미안합니다. 아무튼, 어느 집 여식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화가 잘 통하는지가 중요하지요."
그때, 한껏 꾸며도 감춰지지 않는 추녀가 다가와 무열에게 목례를 하고 술잔을 건넸다.
"미안하오. 금주 중이오."
무열과 창이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추녀는 아쉬운 듯 무열이 거절한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대화가 잘 통하는 것만큼 미색이 고운 것도 중요할 듯 합니다."
"네. 미색이 고와야 대화도 하고 싶을 테니까요."
"역시 사내들이란."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삼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 아쉬운 마음이 꿈으로 형상화되어 꿈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 벗이자 여인.
"아라낭자......?"
"네?"
"방금 아라낭자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젠 눈 뜨고도 꿈을 꾸십니까?"
"호위대장은 못 들으셨습니까?"
무열은 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스쳐지나는 여인들이 무열을 붙잡아도 뿌리치고 죽었을 게 분명한 아라를 찾아 연회장을 뒤지고 다니던 그때, 무열의 눈에 익숙하지만 낯선 아라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아라였지만 아라가 아니었다.
"아라 낭자가 살아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