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 낭자가 살아 있었어..."
무열은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열의 꿈에서는 늘 남장을 하고 있던 아라였다. 그런데 일본 여인이 입는다는 기모노 차림의 아라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과연 아라가 맞는지 확인하려 무열이 다가갔다.
"낭자의 이름이 윤아라가 맞소?"
입을 열려던 아라가 갑자기 무열을 잡아당겨 안고 돌았다.
"윽......."
무열은 자신의 품에서 힘을 잃고 쓰러지는 아라를 안았다. 아라의 등을 보니 단검이 꽂혀있었다. 무열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복면을 한 자가 한 번 더 무열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챙-!
창이가 검으로 단검을 쳐내고 도망가는 자객을 뒤쫓았다. 무열은 아라를 안고 소리쳤다.
"낭자! 정신 차리시오! 낭자!"
연회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이 대원전 밖으로 우르르 도망쳤다. 호위대원들이 무열에게서 아라를 떼어내려 했지만 무열은 아라를 안고 놓아 주지 않았다.
"왕자! 왕자야!"
길동이 아무리 무열을 불러도 무열은 들리지 않았다.
"홍, 무. 열!"
길동이 무열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무열은 그제서야 아버지 길동을 보았다.
"아라 낭자가 살아있었는데...그런데..."
"살릴 수 있다. 살릴테니 정신 차리거라! 어서 이 여인을 의원전으로 데리고 가거라."
길동의 불호령에 호위대원들은 아라를 의원전으로 데리고 갔다. 무열은 따라가려 했지만 길동이 잡았다.
"아직 위험하다. 호위대장이 돌아올 때 까지 왕자는 나와 함께 대전에 가서 경과를 기다리자."
"하지만......."
"그렇게 하세요. 왕자."
안현왕후와 해소왕후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무열을 보았다. 무열은 고개를 끄덕이고 길동과 왕후들을 따라 대전으로 향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큐슈현 나리상단의 행수가 바라보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재회로군. 왕자한테 확실히 각인되었겠어."
무열은 스산한 기운에 가던 길을 멈추고 연회장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
"왕자님?"
아라는 무열의 뒷모습을 열심히 따라갔다. 곧 손에 닿을 듯 할라치면 금방 앞서 달려가고 또 손이 닿을라치면 또 앞서 달려가길 여러번...드디어 무열을 붙잡아 돌아세운 아라는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
"아라야. 잘 들어. 이제 그 놈은 잊어. 그 놈은 우리 원수야."
"아니야."
"네가 그 놈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날 진짜 오라비로 생각한다면 이제 그 놈을 마음에서 지워야 해."
"싫어......."
"그렇다면 이번 일에서 넌 제외시킬 거야."
"...아니야. 내가 갈게."
"정말 그 놈을 마음에서 지울 수 있겠어?"
"응."
거짓말...미안해...오라버니...난 도저히 그 분을 마음에서 지울 수 없어. 어쩌면 도담도 알고도 속아줬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 지옥같은 곳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내가 꿈에 그리던 율도국에 갈 수 있도록 한 번 눈 감아 준거라고. 오라버니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니까. 늘 꿈꿨어. 다시 왕자님을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날이 오리라는 것을. 늘 목이 말랐지. 아무리 배를 채우고 책을 읽어도 그것을 나눌 이가 없다는 것에 마음이 허했어. 오라버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난 그 분을 지키러 이 곳에 온 거야.
***
"너에게 진작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이렇게 될 줄 아무도 몰랐던 일입니다."
길동은 또 다시 무열이 상심하여 골방에 틀어박힐까봐 염려가 되었다. 연회 전 나리상단 행수가 아라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 길동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삼년 전 조선에서 만난 그 당찬 낭자라는 것을. 그리고 무열이 비밀리에 그토록 찾고 있는 그 낭자라는 것을. 하지만 무열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픈 마음에 바로 만나게 해주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호위대장이 자객을 잡았다고 하니 곧 그 배후가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
"콜록 콜록......."
"괜찮으십니까?"
"별 거 아니다. 너도 놀랐을텐데 어서 돌아가 쉬거라."
무열은 지현왕후를 잃고 난 후 부터 점점 기력이 쇠약해지고 있는 길동이 걱정되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큰 것일까. 아니면 세월 앞에 정말 장사가 없는 것일까. 궁 안에 길동이 도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어 무열은 쉽사리 길동의 곁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 말래도."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더 걱정하면 할수록 대왕의 위신이 꺾일까봐 무열은 걱정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목례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무열의 발길은 아라가 잠자고 있는 의원전으로 향했다.
"낭자는 좀 어떠오?"
"오늘 밤 고비를 넘기고 나면 생명에 지장은 없을 듯 합니다."
'오늘 밤이 고비라.'
무열은 아라가 잘 이겨내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싶어 아라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아라의 손을 꼭 잡았다.
'낭자...부디 내게 다시 돌아와 주시오.'
밤새 무열은 아라의 곁을 지켰다. 아라는 고통스러워 하다가도 무열이 손을 꼭 잡아주면 마치 기를 받은 듯 이내 평온하게 다시 잠들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밤새 무열은 한잠도 못자고 아라 곁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꼭두새벽부터 의원이 진맥을 보러 왔다.
"고비를 넘겼습니다."
무열은 지난 삼년 간 지어보지 못한 미소를 지었다. 무열에게 아라가 살아나 돌아왔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삼년 간 무열을 짓눌렀던 죄책감 그리고 그리움. 지난 시간의 괴로움을 떨쳐내고 무열은 이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새싹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이제 문제 해결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나타났다. 아라가 고비를 넘긴 것을 확인한 무열은 밤샘 피로도 잊은 채 그 길로 자객을 심문 중인 창이에게로 갔다. 이 일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
자객은 죽음을 각오한 자 처럼 그 어떤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온 몸이 묶여있던 터라 혀를 물고 자결하려는 것을 막느라 재갈을 물렸다. 창이는 자객의 맞은 편에 앉아 자객의 핏발 선 눈을 응시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왕자님."
무열이 오자 창이는 벌떡 일어나 목례를 했다. 자객은 마치 무열을 기다렸다는 듯 무열을 보자 끙끙대며 드디어 소리를 냈다. 무열은 자객의 입에 물려있던 재갈을 풀어주었다.
"무엇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는가?"
무열은 율도어로 물었다. 하지만 자객은 알아듣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율도국 원주민이 아니구나.
"무엇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느냐고 물었다."
무열은 이번에 조선 말로 물었다. 자객은 알아들은 듯 피식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네 목숨을 스스로 중요히 여겨라. 누군가를 위해 죽고자 한다면 그것이 의로운 죽음인지 생각해 보라."
자객은 움찔했다. 여지껏 자객으로만 훈련 받아왔다. 스스로의 목숨을 중요히 여길 틈이 없었다. 그저 주인의 뜻에 따라 소모품처럼 쓰여왔던 인생이었다. 무열은 자객이 움찔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의 무예 능력을 율도국 백성을 위해 써줄 수만 있다면 가치있는 삶이 될 것이다. 정녕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느냐?"
무열은 자객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고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이게 무열의 힘이라고 창이는 생각했다. 창이도 자신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주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상대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무열의 매력에 매료된 사람으로서 희망이 보였다.
"당신은 덫에 걸렸소."
자객의 마음이 흔들렸다. 무열은 이때다 싶어 득달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무슨 덫? 누가 놓은 덫이오?"
하지만 자객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열이 자객의 마음을 흔든 건 여기까지인 듯 했다.
"배가 많이 고플텐데 먼저 배부터 채우시오. 그리고 더 말 할 마음이 생기거든 날 불러 주시오."
무열은 창이에게 뒷일을 맡기고 밖으로 나가며 자객이 한 말을 곱씹었다.
"내가 무슨 덫에 걸렸다는 것인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그림자가 있는지도 모른 채 무열은 골똘히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그날 밤, 무열은 창이로부터 자객이 독을 먹고 쓰러졌다는 비보를 전해들었다.
"하...또 당했습니다. 이렇게 또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순 없습니다. 어떻게든 살려야 해요."
"네. 꼭 살리겠습니다."
창이는 흥분한 무열을 진정시켰다. 이 궁 안에서 무열이 믿을 수 있는 건 창이뿐이었다.
'능소화를 조심하되, 단 하루를 살아도 즐겁게 살거라.'
어머니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무열이 행복하기를 바라셨지만 능소화를 꺾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궁 안 어디에 능소화가 피어있을지 모를 일이어서 대왕 길동에게조차도 지현왕후가 암살 당했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비밀리에 수사해왔다. 도대체 궁 안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 것일까?
무열은 또 다시 극심한 외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지현왕후의 죽음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역모의 기운. 율도국은 모두가 꿈꾸는 평등한 이상국이라 믿어왔던 나날들. 지현왕후의 죽음과 자신이 당한 피습이 이상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삼년 전, 아라가 무열에게 이상한 나라라고 말했던 날이 떠올랐다.
"호위대장은 율도국이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지켜야 하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호위대장 답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갑자기 궁금해서요. 저마다 다 다른 생각들을 품고 있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하는 무리들을 반드시 찾아내야겠다고 무열은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