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은 궁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원래는 다 내 것이었단 말이지."
"누가 듣겠어요."
"어제는 왜 안 들어왔어?"
아라는 간 밤의 일이 떠올라 가던 길을 멈췄다. 밀실에서 쓰러진 자신을 안고 나가던 무열의 모습이 생각났다.
"신경 쓰지 마세요."
도담은 아라의 손목을 힘껏 잡았다.
"어찌 신경을 안 써! 내가 널 여기 보내고 무슨 마음으로 사는데!"
"오라버니, 다 접고 떠나자."
"뭐?"
"복수고 뭐고 왕이고 뭐고 다 접고 아무도 모르는 곳 가서 옛날처럼 다시 내 오라버니 하면 안 돼? 그럼 나도 마음 다 접을게."
아라는 도담의 복수를 막으면 무열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담은 아라의 손목을 더 꽉 잡았다.
"아니, 난 왕이 될 거다."
"오라버니."
"이제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마. 내가 왕이 되면 널 왕비로 책봉할 테니. 그놈 하고도 다시는 밤을 같이 보내지 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라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도담과 같은 곳에서 같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이질적이고 불편했다.
"말도 안 돼."
"내가 모를 줄 알아? 날 위해 첩자를 자처한 척했지만 사실은 그놈을 보고 싶어서 온 거 다 알아."
"알면서 보내준 거 나도 알아. 그래서 고마웠어.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그래?"
"널 지키려고! 그분은 널 왕자비로 만들고 홍길동과 그놈의 아들을 제거한 뒤 너도 제거하려 했어. 널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네가 내 여자가 되는 길뿐이야."
"도대체 그분이 누구야? 날 죽일 수도 있다면서 왜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는 건데? 이건 날 지키는 방법이 아니야."
"아니. 난 널 지킬 거야."
그때, 창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라는 있는 힘을 다해 도담이 잡은 손을 뿌리쳤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윤직관?"
"오라비를 배웅 중이었습니다."
창이는 도담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네. 그럼 전 이만."
"아, 네."
창이는 서둘러 가는 도담을 보고 당황했다.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네. 왕자님께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도담은 멀리서 창이와 함께 걸어가는 아라를 바라보았다. 도담은 아라에게 이렇게 고백할 마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왔던 이야기였다. 류혼에게서 친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다시 율도국을 찾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아라의 방 한가득 쌓여있던 화첩 속 무열의 초상화, 그게 문제였다. 무열을 그리워하는 아라를 보면서 도담의 마음속 잠자고 있던 욕망이 폭발했다. 그래서 율도국을 되찾고 왕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아라를 왕비로 만들어 평생 함께 최고로 살 수 있을 테니. 이제 그날이 머지않았다. 계획한 일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도담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요즘 나라 안에 이런 것이 나돈다고 합니다."
"이건 율도어 아닙니까?"
"네. 그 내용이 참담하여 아직 대왕께 보고하지 않았지만 워낙 자주 백성들을 만나시니 이미 알고 계실 듯합니다."
"약탈자 왕을 섬기는 백성들은 죽게 될 것이다."
무열은 글귀를 읽고 머릿속에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얼굴은 열이 난 듯 화끈거렸다. 율도어로 이런 소문을 퍼트렸다는 것은 율도국 원주민과 조선인 사이의 분열을 위한 계책임이 자명한 일이었다.
"이것도 나리상단의 계략이오?"
"아마도......"
"이건 대놓고 역모를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대왕 말씀으로는 전 왕조의 잔당들이 일본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니 나리상단이 그 잔당일 가능성이 크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역권만이 아닌 대왕께 복수하려는 걸까요?"
"하온데 윤직관 말로는 나리상단이 능소화파와 결탁했다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호위대장."
"역모 무리는 의례 명분이 있는 자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하지만 율도국에서는 그동안 그런 조짐은 전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대왕의 치세에 만족하는데 역모라니... 너무 명분이 빈약합니다."
무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만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백성이 십만입니다. 그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린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폐주가 폭군이었다 하나 진심으로 그 왕을 따르던 자들이 있었을지 모르지요. 지난 열한 해 동안 남몰래 불만을 품고 역모를 준비해 온 것이 그 증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일부 역모 무리 때문에 무고한 희생이 있으면 안 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들을 찾아내 죄 없는 백성의 희생을 막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윤직관은 무슨 좋은 생각 없소?"
아라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기에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술만 깨물었다. 무열은 아라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두근두근......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정신 차려! 시선을 돌려야 돼~ 시선을~'
무열은 시선을 돌린다는 것이 창이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아니요. 그저 윤직관이 이리 말이 없으니, 호위대장이라도 뭐 좋은 생각이 있으신가 싶어서."
"아무래도 나리상단 쪽부터 은밀히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윤직관이 우리와 내통하는 것을 모르니 나리상단 조사는 윤직관이 전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윤직관 혼자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계획을 밝혀 죄 없는 백성의 희생을 막아야지요."
무열은 지그시 아라를 바라보았다. 아라는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임무가 주어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집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오라비와 함께 들어온 나리상단 중 이번 일에 가담하는 무리들이 필시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당분간 그들을 주시하겠습니다."
"정녕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그들은 절 동지로 알고 있으니까요."
무열은 또다시 아라를 사지에 혼자 두는 거 같아 불안했지만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가는 아라를 붙잡을 수 없었다. 아라가 방에서 나가자 무열은 갑자기 속이 탔다. 자신의 차를 마시는 것도 모자라 아라가 남기고 간 차도 마셨다. 찻잔에서 어쩐지 아라의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찻잔에 향을 남기고 간 아라가 금세 보고 싶어졌다.
"많이 좋아하시네요."
"네?"
갑작스러운 창이의 말에 무열은 화들짝 놀랐다.
"차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윤직관 차까지 다 드시고. 더 가져오라 할까요?"
"아닙니다. 이제 우리도 나가 봐야죠."
"네."
무열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면서도 창이가 했던 말이 여운이 남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많이 좋아한다. 내가... 아라 낭자를?
***
"내 집을 내가 잠입하다니."
아라는 지붕에서 집안을 지켜보았다. 상단 일꾼들이 창고에서 나온 후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아라는 짐들을 살펴보기 위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라는 상단의 짐을 살피던 중 여느 상자와는 달리 자물쇠가 잠겨있는 작은 상자를 보았다. 아라가 작은 상자를 들려고 하자 도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둬."
도담이 아라의 손목을 잡고 창고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상자 안에 뭐가 있는 거야?"
"넌 몰라도 돼."
"왜?"
"몰라도 된다고 했잖아!"
소리 지르는 도담을 보며 아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거 알아? 왕이 되겠다고 한순간부터 늘 화가 나 있는 거."
"왕이 된다는 건 신경 쓸 게 많으니까."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본 율도국 대왕도, 무열왕자도 늘 백성을 신경 쓰지만 그렇게 화내지 않아."
"내 앞에서 그 자들 편 드는 거야? 내 친아버지를 죽이고 나를 죽이려 했던 자들을?! 그렇게 해서 왕이 되니 좋았겠지. 하지만 그들도 곧 나처럼 화나게 될 거다. 소중한 것을 잃은 기분이 어떤 건지 알게 해 줄 거야."
"혹시 그 소중한 것이 백성이라면 그만둬. 죄 없는 백성들을 끌어들이지 마."
"그들은 내 백성이 아니야. 홍길동의 백성이지. 그들을 죽이고 홍길동의 무능함을 증명해 보일 거야."
"네 백성 내 백성이 어딨어. 다 같은 사람인데. 이건 옳은 일이 아니야. 오라버니가 진정 왕이라면 백성을 이리 함부로 대하면 안 돼!"
"아니. 내 자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거야. 그리고 너도 날 따르게 될 거다. 내가 왕이 돼야 너도 부모님 복수를 하지. 복수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야."
아라는 도담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아라는 혼란스러웠다. 이성을 잃고 이리같이 눈을 번뜩이는 도담을 보는 아라의 마음이 아파졌다.
"이런 방법으로 복수하는 거 우리 부모님도 원치 않으실 거야. 우리 부모님도 그저 평범한 백성이었으니까."
"평범한 백성이었으니까 당하신 거야. 그래서 힘을 갖자는 건데 뭐가 문제야?"
"힘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거야. 위에서 누른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그래? 과연 그런지 두고 보면 알겠지."
도담의 눈이 번뜩였다. 아라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 도담을 더 이상 마주하기 힘들었다.
"계십니까?"
도담과 아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열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아라는 무열에게 달려가 목례를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호위대장과 순찰을 하다가 고을 할머니 짐을 들어드렸더니 아주 좋은 술을 주셨소. 마침 윤직관 집 근처라 윤직관 오라비께 율도국 술맛 좀 보여드리려고 왔소. 하하하."
무열은 호탕하게 웃으며 도담을 향해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도담은 차분히 목례를 했다.
"방으로 드시지요. 술상을 방으로 들이겠습니다."
"좋지요~"
아라는 걱정이 되어 무열에게 귓속말을 했다.
"호위대장은 어디 있습니까?"
"마저 조사를 마치고 오기로 했소."
"적지에 홀로 오는 장군이 어디 있답니까?"
무열은 검지로 아라와 자신을 가리켰다.
"낭자도 적지에 홀로 잘 돌진하지 않소."
"저랑 왕자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르오. 다 같은 사람이거늘. 얼른 들어갑시다. 낭자의 오라비가 날 잡아먹을 듯이 보고 있소."
무열은 도담에게 또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 들어오려던 아라를 도담이 막았다.
"넌 여기 있어."
"아니, 왜요~? 윤직관도 율도국 술맛 좀 봐야지요~ 오랜만에 오누이끼리 회포도 푸시고~ 들어갑시다~"
무열은 도담과 아라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도담은 무열의 여유와 능청이 불편하고 싫었다. 홍길동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율도국의 왕자로 자랐다면 아라에게 화낼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라가 무열이 아닌 자신을 봐줬을 것이다. 지금처럼. 도담은 무열만 보고 있는 아라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도담은 당장 저 술병에 독을 타 무열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무열이 뜻밖의 말을 먼저 꺼냈다.
"계획은 잘 진행되고 계십니까?"
도담과 무열의 시선이 허공에서 전투적으로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