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계획을 말씀하시는 건지......"
도담은 무열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진짜 이 자리에서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니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직되어가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상단이 무슨 계획이 있겠습니까? 율도국에서 장사 계획은 잘 진행되시느냐 물은 것인데 무슨 다른 계획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그런 게 있을 리가요."
무열은 술상이 들어오자 도담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맛 좀 보십시오~ 기가 막힙니다. 하하하."
"제가 먼저 올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보다 형님이신데 제가 먼저 올려야지요~"
"당치 않습니다. 제가 왕자님께 올리는 것이 예의지요."
"신분의 높고 낮음이 무에 대수겠습니까?"
"왜 대수가 아니겠습니까?"
서로 술병을 잡고 놓지 않는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아라가 술병을 빼앗았다.
"두 분 뭐 하시는 겁니까?"
아라는 본인 술잔에 술을 따라 혼자 마셨다. 무열과 도담은 입을 떡 벌리고 아라를 보았다. 아라는 물을 마시 듯 연거푸 자작을 했다. 보다 못한 무열은 아라가 들고 있는 술병을 빼앗으려 하자 아라가 꼭 끌어안았다.
"낭자. 진정하시오. 혼자 이걸 다 마실 작정이오?"
"제가~ 두 분을 보면~ 답답해서 그럽니다~ 이게 뭐라고~ 왜 놓지를 못해~"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볼, 게슴츠레 한 눈, 꼬인 혀. 아라가 취했다.
"낭자, 취한 것이오?"
"아라야. 괜찮으냐?"
"저리 가! 이거 내가 확 다 먹어버릴 거니까. 둘이 싸우지 마~ 제발~"
술병을 끌어안고 아라는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덩달아 어, 어, 어, 하며 무열과 도담도 일어났다.
"아니, 고작 그거 마시고."
"아라는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아니, 상단 일을 하면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니."
"아라는 주로 여인들을 상대해 왔기 때문에 마실 일이 없었지요."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이리 약할 줄이야."
"저도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시끄러! 말들이 많아~~~ 쉿! 조용히 해~ 이제부터 비밀을 말해줄 테니까."
아라의 갑작스러운 비밀 폭로에 무열과 도담 모두 긴장했다. 양쪽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아라의 입에서 무슨 말이 터져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여차하면 정말 이 자리에서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도 있는 말 한 마디에 두 사람 모두 온몸의 털이 서는 것 같은 긴장감이 순식간에 감돌았다.
"그 비밀은~~~"
꿀꺽! 무열과 도담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아라의 다리에 힘이 풀려 아라가 쓰러지려 했다. 무열과 도담은 모두 아라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무열이 아라를 품에 안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아라는 제가..."
도담이 무열의 품에서 아라를 데려오려 하자, 무열은 더 아라를 품에 안았다.
"아니요.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제 누이이니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제 사람이니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낭자의 방이 어딘지요?"
무열은 더 이상의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듯 아라를 번쩍 안았다.
"따라 오시지요."
무열은 도담을 따라 아라의 방까지 아라를 안고 갔다. 아라는 아기가 엄마 젖무덤을 찾아 파고들 듯 무열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무열은 생각지 못한 아라의 공격에 가슴이 뛰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도담에게까지 들릴까 봐 헛기침까지 했다. 도담은 무열이 조금이라도 더 아라를 안고 있는 것이 싫어 발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무열은 아라의 방까지 더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방입니다."
무열은 도담이 열어주는 방으로 아라를 안고 들어갔다. 무열은 침대 위에 아라를 눕혔다. 도담은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무열은 방을 둘러보았다.
'낭자 방은 이렇게 생겼군.'
방 안은 아라의 방답게 책이 쌓여있었다. 무열은 문득 삼년 전 조선에서 머물렀던 아라의 방이 떠올랐다. 그런데 방 가운데 원탁 위, 펼쳐져 있는 화첩 사이로 초상화가 얼핏 무열의 눈에 띄었다.
어? 저건...?
무열은 아라의 화첩에 홀린 듯 그림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앞을 도담이 막아섰다.
"제가 배웅하겠습니다."
"아... 네."
무열은 그림을 보지 못하고 나가자니 아쉬워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열이 아라의 집을 나서려 할 때 창이가 들어왔다. 무열은 구세주를 만난 듯 활짝 웃었다.
"호위대장!"
창이는 무열이 너무 반가워해서 다소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까지 쳤다.
"왕자님, 벌써 취하셨습니까?"
"에이~ 우린 입도 못 댔지 뭡니까. 아쉬웠는데 호위대장까지 오셨으니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네?"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는 무열을 보고 도담은 당황했다.
"호위대장과 윤직관 오라버니도 안면이 있으니 오랜만에 회포를 푸셔야지요~ 들어갑시다~"
무열은 호기롭게 도담과 창이를 양팔로 어깨동무를 하며 다시 술상이 있던 방으로 직행했다. 방으로 얼떨결에 끌려들어 온 도담과 창이는 얼떨떨하게 무열이 주는 대로 술잔을 받아 마셨다. 불현듯 무열은 배를 부여잡았다.
"아... 그런데 뒷간이 어디 있습니까? 갑자기 배가..."
"괜찮으십니까?"
"뒷간만 다녀오면 괜찮을 듯합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눈치 없는 창이가 지나친 충성심으로 분연히 일어났지만 무열은 달갑지 않았다.
"하하하.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호위대장이 지키고 서 있으면 나올 놈도 다시 들어갈 거 같습니다."
"아... 그럼 다녀오십시오."
무열은 도담이 일러준 대로 밖으로 나와 뒷간을 가는 척했다. 도담은 무열이 가는 모습을 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무열은 도담이 들어갔는지 확인하고는 곧바로 아라의 방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휴......"
무열은 숨까지 참아가며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오느라 아라의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라가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아까 자신을 홀렸던 아라의 그림을 다시 보기 위해 단숨에 걸어갔다. 아까 본 것이 맞는다면 이 그림은...
"나였어!"
원탁 위. 펼쳐져 있는 화첩을 한 장 한 장 다 본 무열은 손이 떨리고 가슴이 뛰었다. 모두 무열의 초상화였다. 너무 잘 그려서 누가 보아도 무열을 그린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솜씨였다. 책을 보는 무열, 일출을 보던 무열, 환하게 웃는 무열. 무열도 알지 못하는 모습의 무열이 가득했다. 무열은 가슴을 누가 침으로 찌르 듯 찌릿찌릿 아팠다. 그리고 자신도 들릴 만큼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무열의 심장이 바쁘게 무열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왕자님?"
무열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아라가 무열의 손에 들려있는 화첩을 보고 당황한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도 수없이 낭자를 그렸소. 만약 살아 있다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낼까 문득문득 그리울 때마다... 낭자를 다시 만나고 내 그림은 멈췄소. 이제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낭자는 여전히 나를 그리는 이유가 무엇이오?"
무열은 천천히 아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매일같이 보는데 나와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나를 그린 연유가......"
아라는 무열의 손에 들려있는 화첩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가 아직 술기운이 사라지지 않아 휘청거렸다. 무열은 휘청이는 아라를 품에 안았다.
"대체 낭자에게 나는 무엇이오?"
무열은 자신의 품에서 상기된 얼굴로 올려다보는 아라를 보았다.
"우리는 정녕 벗이 맞소?"
아라는 귀가 멍멍했다. 오로지 오물오물 움직이는 무열의 입술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라는 아직 가시지 않은 술기운을 빌어 적어도 내 마음은 벗이 아니라고 용기 내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길 밖에는 숨조차 쉴 수 없는 꽉 막힌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지난밤처럼 꽉 막혀서 쉬지 못하는 숨을 불어넣어달라고 매달리 듯 아라는 무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다시 만나고부터 무열만 보면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아라는 무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자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아라를 더욱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며 더 깊이 숨을 불어넣는 무열. 두 사람은 정적이 흐르는 방 안을 숨소리로 가득 채웠다.
***
도담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일어나 보겠습니다."
허락받을 마음으로 말한 것이 아니기에 말함과 동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도담을 창이가 불러 세웠다.
"행수도 없이 상단을 이끌고 올 수 있을 정도면 꽤 한자리하고 계시나 봅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 나리상단에서 윤직관을 첩자로 들인 것은 아닙니까?"
창이는 차분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도담을 떠보았다. 도담은 순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이 굳어졌다. 창이는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도 그 순간 도담의 표정을 읽었다.
"역시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면 누이가 첩자라니 놀라신 겁니까?"
도담은 얼굴 표정을 풀며 자리에 앉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라를 첩자로 들이다니요? 확실한 말씀이십니까?"
"모르고 계셨나 봅니다. 그게... 기이해서 말입니다."
"뭐가 기이하다는 말씀이신지..."
"상단이라 하면 능히 이권을 요구할만한데... 자신들이 부리던 사람이 율도국에 직책을 얻게 되었는데 요구하는 것이 없으니 기이해서요."
도담은 아차 싶었다. 그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제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이 자는 모르는 것인가?'
창이는 도담의 반응에 더욱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몰랐다면 아끼는 누이가 위험해 지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상단 안에서 노력을 할 것이오. 설령 계획에 가담 중이라고 해도 경고는 되었을 것이다.
"왕자님도 누이를 첩자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네."
도담은 무열 쪽에서 아라를 첩자로 의심하고 있다면 절대로 무열과 아라가 이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풀어졌다.
"아무리 제 누이라고는 하나 사람 속을 누가 다 알겠습니까? 저도 알아보고 혹여 누이가 그런 일에 관여하고 있다면 오라비로서 지켜야지요."
창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모호한 말이었다. 오라비로서 누이를 지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열에게도 칼을 겨눌 수 있는 일이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려 오누이 사이를 이간질 한 것 같아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이런 일로 흔들릴 사이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동시에 술잔을 들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맹렬한 전투력이 발산되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전쟁 선포였다. 창이는 도담에게서 불온한 기운을 느꼈다.
"왕자님께서 많이 늦으시네요. 아무래도 나가봐야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창이와 도담은 방을 나와 뒷간으로 무열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뒷간에는 무열이 있지 않았다. 도담은 곧바로 아라의 방으로 달려갔다. 창이도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도담은 아라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아라도 없었다.
'둘이 같이 없어졌다!'
도담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아라를 찾기 위해 곧장 밖으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