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저께 질문을 하려다 마셨던 분이네요. 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변했다. 정민은 자신이 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던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최수연 씨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머지않아 올 거예요. 저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는 거랍니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하지만 정민은 자신의 발언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판단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제가 이야기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녀의 표정이 이쯤에서 완전히 굳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건가요? 당신 혹시 ‘도를 아십니까’ 이런 쪽 사람인가요? 듣다 보니 기분이 나쁘네요. 당신 말은 그만 듣겠어요.”
그녀는 정민의 말을 순간 잘라버렸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내뱉고 난 다음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오피스텔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직후, 정민은 또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허무함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쓸쓸했다. 정민은 버스 안에서 축 처진 채로 앉아 있었다.
‘아. 이번에도 실패했어. 내 이야기가 어딘가 이상했나?‘
정민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자신이 왜 실패했는지를 돌이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도 주어진 시간은 아직 충분해. 그리고 여러 번 있을 대화 중에서 단 한 번만 성공하면 괜찮아질 거야.’
쉽게 좌절할 법 했지만 정민은 남은 힘을 내어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주말은 최수연 씨의 일정을 알 수 없었기에, 다음에 말을 건네는 것은 그다음 주 화요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월요일은 불쾌함이 가라앉기 충분치 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했다. 정민은 부디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신에 대한 불쾌함이 거의 가라앉은 상태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시간은 금세 흘러 다음 주 화요일이 왔다. 정민은 다시 한번 그녀의 오피스텔 앞으로 향했다.
20시 1분, 그녀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정민은 쏜살같이 달려가 그녀에게 이야기부터 던졌다.
“전 사이비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진실만을 전해 주기 위해서 이야기 드리는 거예요”
“좋아요. 당신 이야기가 참이라고 생각하죠,”
그녀가 이전보다는 덜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도대체 내가 죽는다는 근거는 도대체 뭔가요?”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은 치명적이었다. 이 질문에 정민이 진실을 말하면 정민이 죽는다.
“그게. 제가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믿어 주세요. 분명히 이유가 있고 확실히 일어날 사실들이 있어요.”
순간 당황한 정민은 말을 돌리려 애를 썼다.
“이유조차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내가 왜 믿어야 하는 거죠? 당신 말을 끝까지 들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나네요. 당신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요!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아요.”
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뛰어서 자신의 오피스텔로 달려갔다.
정민에게는 이번이 세 번째 거절이라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주저앉을 틈도 갖지 않고 스마트폰 달력을 보면서 남은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날짜가 엿새뿐이야. 당분간은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을 거야. 이제 이야기할 기회는 많아야 한 번뿐이야.’
길고 긴 고민 끝에 정민이 결국 정한 날짜는 목요일이었다. 금요일은 혹시라도 그녀의 퇴근 시간이 변하면 바로 주말이 오기 때문에 기회가 없어지고 수요일은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았을 때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날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정민의 머릿속에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벨 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였다. 정민은 황급히 이어폰을 끼고 메신저를 켠 다음 대화를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이 충분히 길었다며? 지금도 충분히 긴 것 같은데.”
[하지만 저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에요.]
“이상하군, 매일 가서 질문해도 되지 않나?”
[사람의 감정이 가라앉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려요. 하루 만에 감정이 풀리고 하는 일은 별로 없다고요,]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가… 그래서 주어진 시간에 비해서 기회가 많지는 않은 거군. 거기에다 그 기회도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 가버리고.”
[그래요.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이제 한 번의 기회라고 했지? 그 결과가 궁금해지는군. 잘 해봐. 그럼.”
목소리의 연락이 끊어졌다. 정민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봤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아. 주어진 시간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문제에 어쩌면 지나친 여유를 가지고 접근했어. 단 한 번의 기회, 소중하게 생각하자.’
정민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긴장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감을 아주 내려놓지 않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이제 목요일. 이제는 열 번도 넘게 오간 장소가 되어서인지 이제 우리 동네와 같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오피스텔 앞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나타나기만을, 사실상 마지막 대화의 기회가 통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19시 58분,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민은 달려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 정말로 당신의 생명을 구하고 싶어요. 이대로 있으면 당신은 다음 주 월요일 밤에 죽는다고요! 퇴근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흉기에 무자비하게 찔린 채로!”
정민의 이야기는 설득이라기 보다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흔들렸을까. 그녀가 정민에게 조금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정말인가요? 그렇다면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그때 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이전의 연습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잔뜩 긴장한 상태의 정민이었기에 대답을 급하게 생각해서 해야만 했다.
“저와 함께 안전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해요. 둘이서만이요.”
정민은 말을 하자마자 자기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뿔싸. 이럴 때 한 번 내뱉은 말은 쏟아진 물처럼 절대로 주워 담지 못한다. 저 말 한마디에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리고 소리쳤다.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야! 이 변태 자식!”
“너! 내 눈앞에서 당장 꺼지지 않으면 당장 경찰에 신고하겠어!”
정민은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대로 반대편으로 도망치듯 뛰어갔고, 그 이후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참 벗어난 곳에서 멈춰 서서 겨우 숨을 고르고 나니 정민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자주 이곳을 오가며 이야기가 잘 되길 바랐는데, 내가 마지막에 전부 망쳐버렸어.”
울먹이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겨우 몸을 싣고, 자신의 무력함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눈물은 집에 다 와 가서야 겨우 그치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정민은 생각했다. 내일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말은 의미 없는 시간이고, 주말이 지나면 바로 그 날이다. 그녀의 생명을 누군가가 앗아갈 그 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들어왔다.
집 안은 고요했다. 정민은 고독한 그 공간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의 나 혼자만이 겪어야 하는 고민. 그리고 나의 실수로 풀리지 못한 문제, 그리고 그 대가. 다음 주 월요일이 지나면 어떤 고통에 또 사로잡히게 될까. 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 스마트폰에 알림이 떴다. 목소리의 메시지였다.
[마지막 기회마저 날아가 버린 건가. 그만 생각해도 되지 않아? 이건 그저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죽음일 뿐이야.]
[그래도 아직 시간은 남아있어서 그렇게 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시간 이네요.]
[뭔가를 하라고 하지는 않겠어. 남은 시간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모르겠어요. 지금껏 한 일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니, 그리고 한 번의 기회는 스스로 발로 차 버리다니. 그래서 더 기분이 가라앉네요. 그래도 견뎌 볼래요. 어떻게든요.]
[그래 부디 잘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그럼.]
그렇게 연락이 끊어지고 정민은 다시 고독에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 지나갔다. 목요일에 이야기한 그래도 견디겠다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의 무기력함에 사로잡힌 채로. 그녀의 관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은 그저 고요하게.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러가서 이제 정민이 그토록 오기를 원치 않았던 월요일이 찾아왔다. 바로 3월 27일 오늘.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자기 자신도 원치 않았지만, 정민은 퇴근 후에 송연으로 향하는 버스에 다시 한 번 몸을 실었다. 정민은 자신이 왜 이 버스를 탔는지 스스로에게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관성적으로 버스에 오른 것뿐이리라.
정민은 버스에서 내려서, 그리도 자주 오가던 그 길을, 고개를 숙인 채로 또다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제는 이 길도 당분간은 걷고 싶지 않겠지, 곧 벌어질 슬픈 일 때문에라도 더 걷고 싶지 않겠지.’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이 무기력함을 떨쳐내려 해 보았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항상 서성이던 그 자리에 또 섰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건넬 말도 더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정민은 언제나 서성이던 그 자리를 또 서성였다.
20시 5분, 그녀가 오피스텔로 들어간 시각이었지만 그녀도, 정민도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20시 20분, 정민의 마음속에서 단 하나의 후회가 겨우 떠올랐다.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후회가. 이제 20분 후면 내가 노력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정민은 이제 단 하나의 문장만 중얼거리며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순간에라도 내 곁에 있다면, 내 곁에 있다면. 내 곁에 있다면…”
“지금 내 곁에?”
이 말을 한순간 정민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민의 눈빛이 몸짓이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