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은 전혀 다치지 않았지만. 정민이 겪는 고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날 이후 꿈에서 2층에 처박힌 유모차가 자꾸 나와서 잠을 잘 못 이루게 되었고, 빙글빙글 돌아서 겨우 멈춘 차 앞으로 덤프트럭이 빠르게 지나가는 광경은 자꾸 회상하게 되어 정민의 식은땀이 나게 했다.
거기에 가슴 속에 커다란 갈등을 안게 된 정민은, 목소리와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목소리에게 연락을 했다.
“오른 자동차 보험료 말고는 어쨌든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해피엔딩인줄 알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렇지도 않아요.”
“만약에 유모차에 진짜 아기가 타고 있었다면,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네. 생명을 저울에 올려놓는 행동의 위험함이야.”
“지금 생각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만약에 진짜 아기가 타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 상황이 너무나 끔찍해서 전 살아갈 힘을 모두 잃어버릴지도 몰라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야. 인정해.”
“하지만 정답은 없어. 생명을 저울에 올리는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고, 거기에서 나온 답이 정답이라는 보장을 절대로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정답을 찾지 못한 제 가슴속 어딘가는 언제나 불타는 듯한 기분이에요. 지금껏 켜켜이 쌓인 괴로움이 한데 뭉쳐있는 기분이에요.”
“그걸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을 것 같네. 보통 그러면 병원에 가질 않나? 인간들이 하는 말로 아프다고 할 때.”
“병원이라… 고민해 봐야겠어요.”
“그리고 연락한 김에, 마침 선물을 또 받을 때가 되었다는 걸 말하는걸 잊고 있었네. 지금 열어봐도 돼.”
정민은 앱을 실행해서 능력 버튼을 누르고 가장 먼저 들어오는 아이콘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입술 모양에 배경은 스마트폰 아이콘? 이건 뭔가요?”
그 순간 정민의 스마트폰과 입술이 밝게 빛났다.
“입술에 이 감각이 오는 건 더더욱 이상하네요.”
목소리의 설명이 바로 이어졌다.
“방금 네가 얻은 능력은 ‘어둠의 목소리’야. 지금 쓰고 있는 네 스마트폰과 연동해서 쓰는 기술인데, 이 기술의 효과는 바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면서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거야. 음성도 무작위 성별에 무작위 나이로 변조되어 바뀌게 돼. 이제 스마트폰 안의 전화 버튼이 하나 더 추가가 되었을 거야. 아주 새까만 전화기 모양으로 말이지. 이 능력은 내가 보기에는 장난 전화로 쓰는데 가장 완벽한 능력이겠지만, 실제로 112나 119에다 이걸 쓰지는 않겠지? 아 하나 더 써먹을 데가 요즘에 생겼지? 보이스피싱이라고.”
“112, 119에는 절대 안 써요. 보이스피싱도 안 할거고요.”
“과연 그 약속 언제까지 가나 지켜볼 테다.”
“한번 잘 지켜보세요. 그. 럼.”
정민이 먼저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 정말로 아픈 걸까? 병원에 가서 치료가 필요할 정도야?”
정민은 스스로 되물었다. 그리고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을 청했으나 잠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고, 다음 날 학교에서의 컨디션은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악화하였다.
정민이 병원을 찾은 것은 그 날이었다.
‘이 컨디션으로 한 번만 더 출근하면 쓰러져서 다시는 못 일어날지도 몰라.’
생각보다 병원의 분위기는 밝았다. 좋은 향기와 따뜻한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유난히 밝아서 기다리면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진료 차례를 기다리다 드디어 정민의 차례가 되었고, 정민은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 선생님과의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정민은 순간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게 맞을까를 생각했는데, 지금 겪고 있는 증상들을 위주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껏 겪었던 일들은 최소한의 정보만 알려주는 거로.
“어서 와요. 지금 불편한 점을 하나씩 이야기해 볼래요?”
“밤에 잠을 못 자거나 악몽을 꾸어요. 그리고 가슴 속에 불타는 무언가가 항상 자리 잡고 있는 듯해요. 그것 때문에 체중이 최근에 조금 빠졌어요.”
“혹시 우울한 기분이 들거나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거나 하지는 않나요?”
“우울한 감정까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즐거운 일들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어요. 그 자리는 가슴 아픈 일들이 가득 자리를 채웠네요.”
“지금 이렇게 아픈 게 어떤 이유 때문인 것 같나요?”
“한 마디로 책임감인 것 같아요. 가만히 있어도 될 일에 괜히 나서서 스스로 고통받는 경우가 요즘 들어 많아졌고요. 그리고 최근에 죽음에 가까이 직면한 적이 있어요.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해드리기 어렵지만요.”
“혹시 그게 자살시도 같은 것은 아니지요?”
“네, 그것은 아니에요.”
“저 어디가 아픈 건가요?”
“임상적 소견으로 보았을 때는 경증의 우울장애인 것으로 보여요. 흔히들 우울장애를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를 많이 하는데, 그 이유는 감기처럼 덜 아파서가 아니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기 때문에 우울장애를 그렇게 비유하는 거예요.”
“요즘 좋은 약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약물치료만으로도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단,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빠지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에스시탈로프람 10mg과 알프라졸람 0.25mg을 처방해 드릴게요. 매일 저녁에 드시는 거예요. 약은 일주일 치 나가고, 일주일 뒤 꼭 방문하셔야 해요. 약이 듣는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꾸준히 먹어야 해요.”
정민은 약을 받아 병원을 나와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혼잣말.
“이제는 내가 환자인데 누가 누구를 돌봐야 하는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