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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차갑기 짝이 없는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내 장담하건대, 정주 분타를 시작으로 1년 안에 하오문을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고 약속하지.”
뿌드득.
“가, 감히!”
소가령이 노성을 터뜨렸다. 표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용무린은 자신만만해했다. 한 점 두려움도 없었다. 해 보려면 어디 한 번 해 보라는 듯 소가령의 눈을 마주 쏘아보고만 있었다.
소가령은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더불어 한층 깊어진 시선으로 용무린을 천천히 살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단순한 강호초출의 터무니없는 자신감만은 아닌 듯 보였다. 여인의 직감이다. 절대적인 그 무엇인가가 아득히 깊은 심연에 숨어 폭발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 믿어 본다.’
어차피 나쁜 뜻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다.
용무린의 말처럼 이것은 어쩌면 기회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림이란 본디 이처럼 우연한 만남에 맺은 간단한 인연이 미래의 막대한 이득이나 구원으로 왕왕 되돌아오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그 반대일 경우도 많긴 하지만…….’
지금 느낌은 무조건 전자라고 외치고 있었다.
결정했다. 투자한다.
“기회를 주려고 왔다면서 말을 참 예쁘게도 하는군. 그래서야 어디 거래가 되겠어?”
쪼르륵.
퉁명스럽게 말은 했지만 소가령은 죽엽청을 자신의 잔에 따라 용무린에게 건넸다. 화해의 뜻이다. 용무린은 그 잔을 기분 좋게 받아 마셨다.
“내 영업 방침이야. 누군가 날 억압하려 하면 나는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그걸 박살내지.”
신주오가를 입에 담지 않는다.
그 말은 곧 자신의 힘만으로 그렇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한 자신감이라면 좋아. 손해는 보지 않겠어.’
소가령은 이 순간 자신의 결단이 훗날 자신의 구명줄이 되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공과 실전감각 단련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지?”
용무린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후훗. 이야기가 빨라 좋군그래.”
“…….”
“보름. 그 정도면 충분해.”
“보름이라, 우리 손해가 꽤 큰데?”
오늘만 해도 배당이 150 대 1이었다.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녀석 붙여 놓아 봤자 다 깨질 것 같단 말이야.”
용무린이 계속해서 이긴다면 물론 배당이야 낮아질 터이지만 무투장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승부를 만들어갈 수는 없게 된다는 뜻이다.
용무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돈을 내게 걸어.”
“……훗. 그래, 그러면 되겠군.”
소가령은 결국 웃고 말았다.
***
다음날.
“흠. 꽤 많이도 변했군.”
날이 새도록 소가령이 넘겨준 서책을 읽던 용무린은 드디어 책장을 덮었다.
지난 70년 동안 변화한 무림의 대소사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신마대전 이후 새롭게 정립된 무림 세력 판도는 꼭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었다.
“좋아, 길어야 십 년이다.”
신마 진무량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무림을 접수해 줄 생각이다.
“이젠 일어나 볼까?”
밖으로 나선 용무린은 그 길로 정주 외곽의 한 대장간을 찾았다.
땅! 따당. 땅! 따당.
이른 아침이었지만 망치질 소리가 무척이나 맑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괜찮군.’
망치질하는 박자가 자로 잰 듯 정확했고 소리는 청명했다. 대장장이의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고 질이 좋은 쇠로 훌륭한 물건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과연 자신만만하게 소개해 줄 만한 곳이야.’
그때였다.
산발한 머리로 열심히 쇠를 두드리던 대장장이가 용무린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왜 남의 영업장에 와서 쳐 웃고 지랄이야? 볼일 없으면 썩 꺼져.”
어지간하면 기가 질릴 법도 하건만 용무린은 그저 씩 웃었을 뿐이다.
“이놈이 근데?”
“쇠 두들기는 소리가 참으로 좋소, 노인장.”
용무린의 입에서 처음으로 존대가 나왔다.
잠시 멈칫했던 대장장이 노인의 입술이 슬그머니 비틀려 올라갔다.
“네깟 놈이 그걸 정말 알기나 해?”
용무린은 대답 대신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주방용 칼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살짝 퉁겼다.
타앙.
맑은 쇳소리가 기분 좋게 대장간을 울렸다.
“이런 주방용 칼에조차 청명한 소리가 나질 않소? 양질의 쇠와 노인의 정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 아니오?”
피식.
“입은 살았군.”
노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어디 한번 골라 봐.”
정말 그만한 안목이 되는 것인지 보겠다는 뜻이다.
노인은 용무린을 대장간 뒤에 위치한 작은 내실로 이끌었다. 쇠를 두드리던 곳과는 달리 내실은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즐비했는데 한눈에 보아도 뿜어지는 광채와 예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씨이익.
용무린은 여인을 대할 때보다 더욱 환한 얼굴로 내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청강검, 원앙검, 협봉검 이건 언월도…….”
타앙. 타앙.
용무린은 하나씩 들어본 후 무게를 가늠했다. 중심과 균형이 잘 잡혀 있는지 살폈다. 일일이 소리를 들었다.
“정말 좋군요.”
말과는 달리 용무린은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용무린은 말꼬리를 늘이며 노인을 바로 보았다.
피식.
“젊은 놈이 눈치는……. 원하는 게 뭐냐?”
“만들어 주시려오?”
“당연한 일 아니냐? 대장간에 만들어져 있는 것들은 보통 뜨내기나 평범한 수준의 녀석들을 위해서야. 정말 좋은 작품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만든다.”
역시나 제대로 된 대장장이다.
“좋소이다. 한철은 충분합니까?”
“염려 마라.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녀석이 원하는 물건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좋소. 내가 원하는 것은 한 자루의 도와 한 자루의 검이오. 크기와 무게는…….”
용무린의 설명을 듣던 노인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듣기만 해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 눈에 빤히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정녕 네가 말한 그 도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이냐?”
씨익.
“내가 사용하지도 못할 물건을 주문하는 멍청이로 보이는 게요?”
종종 그런 놈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용무린은 자신이 주문한 무기들을 자신의 손과 발처럼 다룰 자신이 있었다. 신교 시절, 자신이 신마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사용했었던 병기였기 때문이었다.
“기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열흘, 아니 보름. 그래, 최소한 보름은 있어야 해.”
딱 좋다. 이곳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운가 애송이를 찾아갈 때 함께 하면 안성맞춤이다.
“선금이외다.”
쩔그럭.
용무린은 화운루에서 벌었던 은자 50냥을 통째 노인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얼마야? 으응?”
주머니 안에 가득한 은자를 확인한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그 정도의 거금을 선뜻 선금으로 건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은자 오십 냥입니다. 얼마를 더 원하시는지 노인장께서 직접 말씀하시구려.”
“허…….”
노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탄성을 쏟았다.
은자 오십 냥이라면 내실에 있던 보통의 검들을 송두리째 살 수도 있는 거금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녕 나를 믿는가?”
“믿소. 검명은 장인의 의지와 정성이 담겨야만 맑은 소리를 내는 법, 그 정도의 솜씨를 지닌 장인은 절대로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알고 있소이다.”
반짝.
노인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스물다섯 근의 한철과 그동안 임자가 없어 고이 모셔만 두었던 흑철 그리고 운철까지 깡그리 내어 놓지. 장담하네. 보기 드믄 녀석이 나올 게야.”
“하하하. 미리 감사하오, 노인장. 그런데 나머지 대금은 얼마를 생각하시는 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노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건 그때 보고 이야기 함세.”
“알겠소이다. 그럼 보름 후에 뵙도록 하지요.”
고개를 잠시 갸웃했던 용무린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화운루를 향해 움직였다.
***
보름이란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우와아아! 삼절일학 이겨라!”
“지랄! 오늘이야말로 분광검 종극이 이길 거라고!”
“맞아! 삼절일학의 실력은 거품이야. 언제나 마지막에 운 좋게 이겼을 뿐이라고!”
“저 자식, 순 운빨이라니까?!”
용무린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보다는 여전히 그와 맞선 상대의 우위를 예상했다. 그만큼 용무린이 싸움에 있어서 수위 조절을 잘했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50대 1인가?’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들인 은자를 한꺼번에 투자했으니만큼 대장간에 충분히 값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스르릉.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의 사내가 느릿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중단에 세웠다.
종극.
하오문 소속이 아닌 낭인으로 무공 수위는 이류라는 언질을 소가령으로부터 이미 들었다.
‘내공 수위만 이류야. 나머지는 달라.’
뿜어내는 기세로 보아 역시나 내공은 이류가 분명했는데 자세만큼은 일류를 넘어선 여유가 엿보였다. 그만큼 많은 싸움을 치러봤다는 뜻이리라.
‘최소 백전을 치른 사내라는 뜻.’
온실의 화초와도 같은 운가장의 다섯 애송이들보다 저런 사내가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한 법이다.
‘하지만 나완 상관이 없는 이야기지.’
씨익.
마지막은 모처럼만에 싸우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팡팡.
“덤벼!”
용무린은 손바닥을 감싼 무쇠 수투를 두어 번 두들긴 후 강아지 부르듯 두어 번 까딱였다. 팔목에는 한 뼘이나 됨직한 길이의 무쇠 팔찌까지 둘러져 있어서 용무린은 누가 보더라도 장법이나 권법에 자신이 있는 애송이로 보였다.
피식.
그 정도 도발에는 걸려들지 않는다는 듯 상대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시간 끌 것 없다. 빨리 끝내고 대장간이나 가 보자.’
이제는 수련도 마지막 단계다.
불사신기로 지금껏 근육과 뼈 그리고 혈맥을 단련해 왔으니 오늘은 마지막으로 피부까지 포함해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확인한다.
타닷. 후욱.
용무린의 신형이 경쾌하게 앞으로 쏘아졌다. 종극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차아!”
패액. 피피핏.
종극이 검을 짧게 여러 번 쳐냈다.
‘과연…….’
함부로 큰 동작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도법과도 흡사한 간결한 움직임으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해냈다.
카앙. 카카캉.
용무린의 수투와 팔찌에 종극의 검이 부딪치며 마구 불똥을 피워 올렸다.
‘좋아, 좋아.’
마치 사나운 들개를 마주한 기분이다. 만족스럽다.
조금 더 재미를 보고도 싶었지만 공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옜다, 먹이다.’
후욱.
용무린은 쫙 편 손바닥을 종극의 가슴을 향해 깊게 밀어 붙였다. 어서 빨리 보호받지 않은 곳을 향해 검을 뻗으라는 유혹이었다.
움찔. 타닷.
하지만 종극은 먹잇감을 바로 물지 않았다.
백전을 치른 노장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뒤로 성큼 물러났다. 혹시 모를 암수를 조심하는 거다.
‘이런 젠장. 이래서 대전 경험이 풍부한 놈들이 더 어려운 법이라니까?’
이럴 때 답은 하나다.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처럼 보여주면 된다.
“하아압!”
용무린은 좋은 기회를 잡은 것처럼 그대로 종극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을 마구 휘둘렀다.
파앙. 파파파팡.
때로는 손 그림자가 다음에는 손 날, 그런가 싶으면 주먹이 종극의 전신 요혈을 노렸다.
퍼억. 퍼퍼퍽.
용무린의 주먹이 두어 번 종극의 가슴에 꽂힌 순간,
키릭. 슈와악.
발밑에서부터 섬뜩한 빛이 쭉 솟구쳤다.
‘이런 여우같은 놈.’
양쪽 신발 끝에 날카로운 비수가 툭 튀어 나와 있다.
과거 용무린이 운룡장의 다섯 애송이들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너무 깊이 들어온 까닭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자세가 되자 드디어 참고 참았던 한 수를 꺼낸 것이다.
푹푹푹.
신발 끝에 돋아난 비수가 눈 깜박 할 사이 용무린의 복부에 세 번이나 꽂혔다.
씨이익.
종극은 그제야 차갑게 웃었다.
“잘 가라 삼절일학. 즐거웠다.”
암수라고 욕할 필요도 없다.
싸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소위 정파 나부랭이들과 나머지를 가르는 척도가 된다.
패애액.
짧게 끊어 치기만 하던 검이 커다랗게 호선을 그렸다.
그대로 용무린의 목을 노렸다.
씨이익.
용무린은 한 차례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흠칫.
‘위험하다.’
종극의 위기본능이 요란하게 경고성을 발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완전히 힘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용무린의 주먹이 작살처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뿌아아악!
종극의 광대뼈가 움푹 꺼졌다. 주먹 한 방에 완전히 함몰된 것이다.
뻐버벅. 뚜드득. 와득.
연이어 수도와 주먹 그리고 팔꿈치가 명치와 심장어림 그리고 갈비뼈를 두들겼다. 뼈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커다랗게 무투장을 울렸다.
“허으으…….”
챙그랑. 터얼썩.
종극의 손에 들린 검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허수아비라도 된 양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나도 즐거웠다, 종극. 덕분에 피부의 단련 정도까지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다음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우와아아. 삼절일학 만세!”
“역시 내 운빨의 사나이라니까?!”
“아우, 미쳐……. 그냥 저 새끼에게 걸어 볼걸. 무려 50대 1 배당이었는데…….”
“와하하하! 고마워 삼절일학. 오랜만에 화운루의 기녀를 끼고 술 한 상 거하게 받을 수 있게 됐어.”
시답잖은 소리를 모두 뒤로 한 채 용무린은 자신이 걸어 두었던 금액에 대한 배당금을 찾아 화운루 지하 무투장을 서서히 벗어났다.
‘약속했던 석 달이 코앞이다, 운적풍. 이제 네 놈을 찾으러 가마.’
씨이익.
용무린의 입가에 섬뜩한 흰 선이 쭉 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