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0년, 가을 1일, 밤
: 단티아, 붉은 성채, 왕의 탑, 왕의 침실
# 단티아 왕국
: 국왕 할티르 단티아
* * *
두꺼운 문짝 너머 조금씩 가까워지던 묵직한 발소리. 이윽고 발걸음이 멈추자 나무문짝이 둔탁한 소리를 낸다.
“전하! 일어나십시오!"
근위대장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반쯤 꿈을 꾸고 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오고, 그의 발소리가 다시금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한다.
"반란입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두터운 외벽을 타넘어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잠에서 깬지 오래지만, 차마 침대에서 일어서 밖을 내다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느끼고 있으면서도, 근위대가 작업하는 소리길 바랬던 마지막 기대마저 발린의 목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으..."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힘을 잔뜩 주자, 한참을 그대로 누워있었던 몸뚱이는 절로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한껏 찌푸린 얼굴로 방안에 들어선 발린을 쳐다보았다. 지체 없이 침대 곁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더 딱딱해 보인다. 분명 오늘 밤은 성채에서의 농성을 대비해 식량과 식수를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고 있어야 할 그는, 어째서인지 갑옷과 투구는커녕 지휘도조차 들고 있지 않다. 외려 실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장식들이 어지러이 달린, 사열할 때나 쓰는 겉옷을 걸치고 있다.
“반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일이라는 것이 딱히 위험한 것도 아니고 기껏 일꾼들 감독할 병사들을 독려하는 게 고작인 일이 아닌가? 오히려 무겁기만 한 갑옷에 칼을 들고 설치기 보단, 쉽게 눈에 띄는 정복이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여름광장을 차지했습니다. 지금도 계속 몰려오고 있고, 더 이상 외부와 연락 할 길이 없습니다.”
“크럽니아가 뒤집힌 지 몇 일이나 됐다고. 대체 어디서 어떻게 놈들이 나타났어?”
“그게…”
발린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이곤,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다. 언제 어떤 일이건 자신만만하게 일을 해내던, 할 수 있다 말하던 그의 낯선 행동.
‘설마.’
등 뒤에 소름이 돋으며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정말로 이단자들이 성내에서 들고 일어선 것인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둘째 형님은 대신전의 분위기가 평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불과 몇 시간 전에 장담했다. 그렇다면 밖에 몰려온 저들은 뭐란 말인가?
“비켜봐요. 내 직접 볼 테니.”
여전히 불편한 몸을 일으켜 침대 끄트머리에 걸쳐 앉았으나 신발이 보이질 않는다. 늦게까지 이어진 회의로 발바닥이 부르터 벗어두고 자리에 누운 후의 기억이 없다. 하지만 팔자 좋게 신발이나 찾으며 시간을 버리기엔, 사항이 너무나 무겁다.
단티아 성내에서 일어난 소란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데보니의 반란자들이 선단을 차지해 그 배로 이동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매사에 예단은 절대 해선 안 될 일.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고, 우려는 우려에 그쳐야 한다. 아무리 그 둘째 형님이래도 대신관 자리에 앉아 한 지붕 밑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를 정도로 무를 리는 없을 터.
“제까짓 놈들이 해 봤자 얼마나 된다고. 이 밤중에 호들갑은…”
침대에서 내려서자, 맨발에 닿는 바닥 돌의 냉기가 허리까지 전해진다. 아직 흐릿한 눈으로 발치를 내려다보자 언뜻 둥그런 물건 두 개가 고작 한 발자국 정도 떨어져 아른거린다. 침실 문 옆에 걸린 횃불은 발린이 들고 온 것이려나?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인 후에야 비로소 널브러져 있는 가죽신 한 짝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앞에 두고도 헤매다니 참….’
아무 말 없는 발린을 외면한 채 신발에 대충 발을 구겨 넣고 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외벽을 덮은 두꺼운 휘장을 옆으로 젖히자, 가을밤과 함께 찾아 온 옅은 한기가 찌뿌둥한 몸뚱이를 덮쳐 온다. 역대 왕들이 한 층씩 높여가며 지은 왕의 탑. 그 중턱에 위치한 침실엔 다노니아의 그 어느 곳보다도 추위가 일찍 찾아온다.
몸을 부르르 떨어 한기를 털어내고, 벽에 박힌 네모난 나무 판을 양 손으로 당겨 뽑아낸다. 사람 주먹 두 개 정도의 작은 크기지만, 기름이나 물을 먹였는지 제법 묵직하다. 형님이 사망한 뒤 이 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한 동안 그 무게에 새삼 놀라곤 했었다.
‘퉁’
예전 일이야 어찌 됐든, 나무 판을 바닥에 던져 놓고 기지개를 쭉 폈다. 잠이 오지 않아 억지로 누워 있었던 탓인지 허리의 어딘가가 여전히 불편하다. 기지개를 펴던 팔을 그대로 내려 허리춤에 올린다. 손 끝에 힘을 주어 여기저기 찔러봐도 전혀 시원한 느낌이 없다.
위급상황을 대비해 밖을 전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들었지만, 너무 작아 좌우로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구멍이다. 몇 번인가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열어 본 것이 전부지만, 그마저도 아침에 수발 들러오는 시종에게 물으면 그만이었기에 최근엔 눈길조차 준 적이 없다. 방어전을 펼 때 매일 아침 적의 머리 위로 따뜻한 분뇨를 그대로 선사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시종장의 시답잖은 농담이 되레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 얼핏 쓸모 없는 작은 구멍으로 달빛도 들지 않는 깜깜한 밤하늘이 들어온다. 그 진한 어둠과 동시에 더욱 큰 시끄러움이 들어와 침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똑바로 한 발짝, 아니 반 발짝만 내디디면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아니, 알 수 있을까? 알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이 어두운 밤 하늘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바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인가?
‘후…’
크게 숨을 내 쉰 뒤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디디며 벽에 바짝 붙어 서고, 영원히 그 쓸모를 잊은 채이길 바랬던 그 작은 구멍이 기어이 제 기능을 한다. 창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어둠에 뒤덮인 다노니아의 들과 강이, 붉은 빛을 내는 단티아 성내가 연이어 눈에 들어온다. 거리로 나온 횃불들, 익숙한 풍경이 여러 골목들과 광장을 메우고 있다. 마치 한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한 해의 반이 지났고 반이 남았음을 알리는 하지 축제날 밤을 보는 듯 하다. 다만 따뜻함과 풍요로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만이 다를 뿐. 기분 탓이리라.
“발린.”
“예, 전하.”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알 순 없지만 썩 좋진 않을 터, 굳이 그를 돌아볼 필요는 없다.
“밖과의 연락이… 포위당했다고 했나요?”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면, 성채는? 성채 내부는 안전한 건가요?”
“그…”
또 다시 등장한 그의 낯선 침묵. 갑자기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왜 또 닥치는 건데.’
나의 질문에 대답이 없는 발린은 오랜만이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아주 오랫동안 그를 알아왔지만 내가 아는 그는 언제나 형님의 편이었고, 나의 편이었다. 우리 가족의 편이었고, 마침내 가족이 되었다. 모르면 모른다 싫으면 싫다 직언을 아끼지 않던 그의 침묵은 지금 처한 상황만큼이나 낯설다. 아니, 화가 난다.
“발린!”
큰 소리를 지르며 그를 돌아봤다. 잠시 나의 눈을 마주보던 그가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돌린다.
“내가 묻고 있잖아! 그러니까, 대답해요. 당장!”
“… 예, 일단은 안전합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슬쩍 고개를 들더니 겨우 눈을 마주치며 작게나마 대답을 하고 또 다시 시선을 떨군다.
“저들이 들이치기 전에 문은 닫았습니다만 규모가… 보시다시피, 예상보다 훨씬 큽니다.”
“피해는?”
“일리안 경과 부하들이 수비대와 조율을 위해 나가있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기타 소재파악이 안 되는 인원이 서른 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대형부두 쪽에 큰 불이 났다고 합니다만, 정확히 확인은 되지 않습니다.”
“병사들은 당한 겁니까? 불이 난 건 방화인가요?”
“죄송합니다. 어느 것도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문답에도 발린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부하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일까, 아니면 무기력하게 보고를 하러 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일까?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근위대장이 직접 날 찾아 온 이유가 뭐지? 단순 호출이라면 전령을 보내도 충분했을 것이다. 중대사항이라 전령을 보낼 수 없다 해도, 이 정도를 대신 전할 부관이라면 충분히…
“전하, 우선 의관을 갖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
어느새 고개를 든 발린이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의아한 처신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 먼저 튀어나온 그의 뜬금 없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관이라니?’
그의 복장에서 위화감이 느껴지긴 해도, 잠시지만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정복을 차리라는 그의 말은 얼핏 들어선 감도 잡히지 않는다.
“저들이…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광장에 잔뜩 몰려와 있습니다.”
“몰려와 있다면 일단 쫓아내야 할 것 아뇨?”
“자칭 그들의 대표라는 자가 전하와 대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아.”
짧은 한 숨을 뱉어내며 잠시 말을 끊은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잇는다.
“저들은 적이 아닙니다. 전하.”
나도 발린도 그가 씹어 삼켜 입 밖에 내지 못한 그 말을 잘 알고 있다.
‘아직까지는’
내 나라고 내 백성들이다. 역사 속의 여러 왕들이, 왕국들이 그것을 증명해 줬다. 성문을 지키는 누군가가 내지른 창, 성벽을 지키는 누군가가 날린 화살 한 대면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왕이 아닌 적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렇게 결정이 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내키지 않습니다만, 일단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으면 논의한대로 버티면 됩니다.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버티다가 저들이 좀 누그러들면. 가라앉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면 됩니다.”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않고 있지만 어느새 떨군 고개를 들고 있는 그가, 이번엔 말을 줄이지 않고 똑바로 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그의 말이 이치에 맞고 그의 말대로 행동함이 옳을 것이다. 그저 의관을 갖추고 정식으로 대면해 몇 마디 말로써 나의 백성들과 나의 백성들이 서로 피 흘리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을 것은 없다. 하지만 여섯 번째 천 년 내내 남부를 지배 해 온 단티아의 왕이 시위를 벌인다고 때도 없이 아무나 만나준다면, 분명 후일을 위해선 좋지 않은 예로 남을 것이다.
“전하, 저도 정말 이러고 싶진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찾아 오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도, 더 나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그 작은 창을 가득 메운 횃불에선, 어쩐지 온기가 아닌 살기가 느껴진다. 큰 형님이 제넌을 제거하고 왕위를 공고히 한 날, 동시에 아버님이 살해당했던 그 날. 단티아 성문 앞에 모여선 군중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기운을 느꼈었다. 기분 탓이겠지.
‘아니, 달라.’
굳이 20년도 더 지난 옛 이야기를 떠올려 봐도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그때의 적과 지금의 저들이 다르듯, 그때의 형님과 지금의 나 역시 다르다. 맥 없이 사라져간 중부의 머저리들과는 다르다. 나는 충분한 선례를 수집했고, 공부해 왔다. 그렇기에 나는 해결할 수 있다.
“발린 공.”
“예.”
“근위대장이란 자가, 자고 있는 왕을 깨워선 고작 한다는 말이. 의관을 차리고 저런 잡배들이나 영접하라는 것. 그것뿐입니까?”
“…”
발린은 또 다시 대답이 없다. 물론 그 대답은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그라면 분명 최선을 다 했을 것이고, 그가 이렇게 직접 와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정말로 다른 수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공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 방법 밖에 없는 거겠지.”
욕을 먹어야 하는 건 그가 아닌 저 머저리들인데, 엄한데 힘이나 빼고 있다니.
작은 창으로 보이는 불빛들이 고작 반 년도 지나지 않은 하지 축제날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날과 닮은 불빛들이 성을 가득 메우고 있다. 꼭 같은 횃불 아래서 나의 만세를 외쳤던 이들이, 이제 와서 다른 요구를 해 봤자 얼마나 더 나쁠 수 있겠는가?
형님은 몇 번이나 말씀 하셨다. 하기로 결심했다면 가능한 빨리,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그 단순한 두 마디가 형님이 왕관을 찾아올 수 있게 만들었고, 이제 왕관을 지키게 만들 것이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길고 깊은 호흡을 두 번 연달아 내쉬고 들이쉬었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발린의 형체가 눈가에 겨우 맺힐 정도로 상체와 고개를 돌렸다.
“내려가면서 누굴 좀 불러줘요.”
“올라오는 길에 시종장을 만났습니다. 문 밖에 대기하라고 일러 두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시간 끌 것도 없군요.”
다시 몸을 돌려 창 밖을 내려다 본다.
언제까지 이 안에 숨어 있어봤자, 저 횃불들은 스스로 꺼지지 않는다. 불 붙은 옷을 입고도 몸을 건사하려면, 곧장 벗어버리던가 진흙바닥에라도 굴러야 할 터. 하늘을 보며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만하다간 화상에 그칠 일이 목숨마저 앗아갈 것이다.
“먼저 내려가시죠, 의관을 갖추면 나도 내려가도록 하죠.”
“예, 전하.”
짧은 정적 후 점점 멀어지는 듯한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그가 침실을 나서면 시종장이 들어올 테고, 나는 국왕의 권위를 보여줄 수 있는 의관을 갖추고 저들 앞에 나서면 된다. 운이 좋다면 그들의 요구를 맞춰줄 수 있을 것이고, 통하지 않는다면 지원군을 기다리며 저들이 제풀에 지쳐 해산할 때까지 붉은 성채를 지키면 될 뿐.
여전히 뒷짐을 진 상태로 양 주먹을 꽉 쥔다. 그리고 수 십 년 동안 외워왔던 주문을 다시 한 번 되뇐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역시나 큰 형님이 늘 해주던 말이다. 자신을 가르쳐 자신을 설득하라.
‘겁낼 필요 없어. 그러니까 할 수 있어. 세상에…’
“죄송합니다.”
어느덧 멎은 발린의 발걸음 소리를 대신해 그의 한 마디가 침실을 가로질러 날아와 주문을 깨뜨린다. 짧게 한 숨을 내쉬고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발린을 마주본다.
그는 양팔을 몸 옆에 딱 붙인 차렷 자세로 출입문에서 불과 한 두 걸음 남짓 떨어져 서 있다.
“뭐가요?”
“제가 그냥… 죄송합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에 대해.”
잠시 날 마주보던 그는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떨군다. 또 다시 목덜미가 서늘해지지만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으리라.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내려가 있어요. 밑에서 만나죠.”
“… 예, 전하. 그럼.”
대답을 마친 발린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한다. 횃불을 코 앞에서 등진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으나, 조금씩 움직이는 그의 턱선을 보아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음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침실을 가득 메운 웅성거림 때문인지, 아니면 착각이었는지 그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시 후 고개를 크게 숙여 보인 발린이 문을 밖으로 열어 젖히며 침실을 나섰다. 자신감이 사라진 그의 뒷모습은 역시 기분 탓이리라.
* * *
시종장이 침실로 들어오며 문을 닫는다. 이런 시간에 깨어 있는 이유에 대해 물을까 했지만, 이런 소란 속에서 편히 잠을 자는 쪽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실로 걸어 들어와 내 앞에 서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상체를 숙이면서도 동시에 고개는 살짝 들며 시선을 내 가슴팍에 유지한다.
“전하, 의관은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마찬가지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이면서도 오늘은 별 다른 잡설이 없다. 어제의 그라면 날씨나 밤잠을 설친 것에 대해서, 혹은 야식에 대해서 먼저 언급했으리라. 얼핏 모든 일에 덤덤해 보이는 영감도 오늘 같은 소란스러움은 역시 신경 쓰일 터.
“제 소견으로는 예배용 의관이나 제례용 의관이 어떨지 싶습니다. 아무래도 밖에 저렇게까지 몰려 왔다는 걸 생각했을 때, 화려한 색이나 그런 것들 보다는 밋밋한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석이 박힌 칼과 왕관 보다는 실전용으로 장식이 덜 들어간 것이 나을 것입니다. 밖이 어두우니 붉은 색보단 노란색 어깨장식이 나을듯합니다. 약간은 반짝거리는 게 필요하지만 보석대신 쇠붙이 쪽으로 찾아보도록 하고…”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군.’
한결같이 수다스러운 영감이야 어찌 됐든 지금은 헛되이 보낼 시간이 없다. 비록 그가 오랜 기간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었고, 대부분은 콧대 높은 귀족들에 대한 악담과 저주였지만 맘놓고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던 몇 안 되던 상대라고 해도 지금의 우선 순위는 아니다.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저들의 요구대로 의관을 갖추고 내려가서 대면하고, 다음 상황을 준비해야 한다. 가능한 빨리. 그것이 단티아 왕국의 국왕으로써, 남부의 주인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동시에, 권위와 자존심은 똥통에 내다 버리는 일이다.
“조금 전 발린 공 봤지? 제대로 준비해. 근위대장이 화려하게 입었으면, 국왕은 더 화려한 걸로 입어야지.”
나의 말을 들은 영감은 아무 말 없이 눈알을 굴린다.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하는 그의 버릇임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신경 쓰이지 않는다. 불만이 있어도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그가, 원로원에 들어차서는 손들고 찬성만 외치면 될 일에 팔 대신 혀만 놀리는 쓸모 없는 거수기들 보다 쓸모 있고 믿음직스러우니까. 오히려 저렇게 알기 쉽게 불만을 표현하는 쪽이 되레 믿음이 간다면 이상한 것일까.
“…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다면 근위대 사열용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왕관과 투구 중 어느 걸로...”
“그런 거 말고. 그, 대관식 때 입었던 거 아직 남아있나? 그거 맘에 들었었는데.”
“그게…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대관식 이후 한 번도 입으신 적이 없어서…”
영감의 시선이 재빠르게 내려갔다 올라간다.
“조, 조금 수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의 시선을 따라 내 시선도 같이 아래쪽을 향한다. 매일 말을 타고 병사들과 씨름을 하던 때에 맞춘 옷을, 옥좌에 앉아 말씨름이나 하는 지금 바로 꺼내 입기는 확실히 무리일 터.
“흠… 그도 그렇군. 그럼 먼저 말한 걸로 준비해.”
“예, 전하.”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그가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침실 한 켠으로 걸음을 옮겨 옷가지들을 보관하는 곁방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하…”
참고 있던 한숨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웅성거림이, 영감이 사라져 버린 빈 공간만큼을 채우고 있다. 합이 맞지 않는 듯 저마다 내지르는 소리에, 한참이 지났음에도 온전히 귀에 들어오진 않는다. 물론 듣지 않아도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중부를 뒤덮었다는 이단자들과 그들의 엉터리 교리. 이름이 알려진 거의 모든 왕국을 무너뜨리고 다년간 교역에 상당한 피해를 끼친 그들의 반란. 그토록 철저하게 막아왔건만 어찌 된 일인가? 어쩌면 중부의 소문을 줏어들은 화적들이 구호만 베껴 일으킨 단순한 폭동일지도 모른다. 혹은 예전의 제넌처럼 누군가 옥좌를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지금, 초장에 잡아내야만 한다. 제 아무리 좋게 해결된다 해도, 질질 끌어선 좋을 게 없다.
기도를 드리기 위해 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차갑고 딱딱한 돌 바닥이 무릎에 와 닿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작은 창을 통해 검게, 동시에 붉게 물든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지막으로 신께 기도 드렸던 게 언제였던가? 하지 축제날? 아니면 정월대예배? 어느 쪽도 지금처럼 절박하지 않았다. 않았었을 것이다. 그런 날들은 그저 그냥 그런. 평범한 일상에서 저들의 주인으로써 마땅히 보여야 할 형식적인 모양새만 갖췄을 터.
눈을 감고 양손을 모은 뒤 고개를 숙였다. 태어나 처음 진심으로. 가장 간절하게. 신에게 소원을 빌기로 한다.
‘전능하시며 잔인하고 동시에 자비로운 신이시여, 진실로 당신을 믿는 자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 또한 당신을 믿는 수 많은 사람들을 지키는 자가 여기 있나이다. 제가 저들에게 무릎 꿇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스러질지 알 수 없나이다. 저들에게 굴복한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고통 받게 될지는 상상도 할 수 없나이다. 부디 당신의 피조물들을 굽어 살피시어 그들을 지킬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주시고, 저 불순한 자들과의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