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0년 가을 1일 밤
: 단티아, 붉은 성채, 정문 ‘용의 아가리’ 위 성벽
# 단티아 왕국
: 국왕 할티르 단티아
“예를 갖춰라! 국왕께서 행차하신다!”
한걸음 앞장서 걸어가는 발린의 외침에, 어수선하게 뭉쳐 있던 무리들이 더듬더듬 길을 연다. 무장 하나 갖추지 않은 근위대 병사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어설프게 예를 표하고, 제각기 창이나 칼 따위를 손에 쥔 이들은 그마저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무질서한 근위대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양새는 대체 뭐란 말인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했던 훈련들은 대체 언제 팔아 먹었단 말인가.
‘젠장, 대체 놈들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리 무기력해서…’
단 한 차례도 실전을 치러 본 적 없기 때문일까. 형님이 왕으로 있을 때는 북쪽 고개를 넘어 외지인들의 침략이 몇 번 있었지만, 중부에서 이단자들이 득세한 후론 남부는 큰 탈 없이 평화로웠다. 왕국 내 여러 수비대의 정예 병사들을 가려 뽑은 근위대가 이런 모양새 밖에 보여줄 수 없다면, 데보니와 크루니의 수비대가 정식 보고서조차 작성 할 새 없이 무너졌다는 것이 마냥 한심하기만 한 소리는 아닐 터이다.
무장조차 통일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늘어선 병사들을 헤치며 야전 지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미리 배정해 둔 수성시의 무장규범은 다 잊어버린 것인가. 몇 일 전까지도 일사불란하게 내성의 이곳 저곳을 뛰어 다니던 이들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마치 전쟁이 일어나면 농부들을 급하게 잡아와 창만 하나씩 쥐어 준다는 중부의 병사들처럼 대오가 전혀 잡혀있지 않다.
“길을 열어라! 국왕께서 행차하신다!”
* * *
어설프게 예를 표하거나 제대로 돌아 볼 생각조차 않은 채 적당히 길을 비켜주던 병사들도, 이윽고 회의소로 들어가는 야트막한 계단 앞에 이르러서는 아예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어있다. 평소에 신경도 써 본 적 없는 이 짧은 길이 마치 험한 산길이라도 되는 듯 답답하다.
“길을 열… 열어! 야, 이! 젠장할! 굼뱅이 같은 놈들. 비켜서라는 말 안 들리나?”
발린이 큰 소리를 치며 바로 앞에 선 병사를 옆으로 힘껏 밀친다. 회의소 안에 무언가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인지, 좁은 곳에 꾸역꾸역 몰려선 병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앞사람에게 찰싹 달라붙어 모가지만 길게 빼고 있다. 발린이 제 아무리 밀고 당겨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다.
‘젠장, 부관들은 대체 뭘 하기에. 아니, 대체 이 놈들은 왜 여기 모여 있어?’
발린이 개미떼처럼 계단에 달라붙은 병사들을 하나하나 떼어 내는 동안, 주위에 널린 병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잔뜩 낀 구름과 한 없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 성벽을 따라 듬성듬성 내 걸린 횃불에 병사들의 옆얼굴이 이따금 비친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은 불빛들이 지금 상황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밝은 미소들을 보여주고 있다.
발린이 한참 힘을 쓰고 난 후에야 계단의 위쪽에 서 있던 누군가 뒤를 돌아본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예를 갖추지도 않고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환히 웃으며 손을 크게 내 젓는다.
“여! 거기 좀 비켜서! 국왕이다! 국왕이 왔다!”
* * *
@ 880년, 가을 1일, 밤
: 단티아, 붉은 성채, 정문 ‘용의 아가리’ 지휘소
전투시 임시로 회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지휘소로 이용되는 장대의 가장 낮은 곳. 평소라면 부관들 외엔 출입이 불가한 네모 기다란 그 공간의 벽을 따라 병사들이 잔뜩 늘어서있다. 그리고 절대 예상하지 못 했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상복 차림이 아닌, 마찬가지로 의관을 차려 입은 가족들이 한데 모여 있다. 나의 왕비 알레안, 단티아에 들른 김에 몇 일 동생들과 있다 가겠다던 장남 발간, 얼마 전 어른이 되었다며 가족들끼리 축하했던 벨르, 그리고 그런 언니의 품에 안겨 있는 막둥이 실르까지.
‘다들 화려한 옷들? 왜?’
바로 곁에는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늦게까지 신전에 있다 온 듯한 안네 누님도 서 있다. 신전의 수도자들의 상징과 같은 어떠한 장식도 색도 들어가지 않은 베로 짠 통옷을, 마찬가지로 가벼운 장식 하나 없는 민무늬 노끈으로 허리춤을 동여매고 있다. 그다지 밝지 않은 실내임에도 화려한 정복과 대조되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아, 오셨군요 할티르. 이쪽으로 오시죠.”
어째서 가족들이 이 곳에 있는지 주변에 물으려는 찰나, 가족들에 가려 눈에 띄지 않던 회의실 맞은편의 한 사내가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어쩐지 횃불에 둘러 싸인 그 사내 역시 수도자의 복장을 하고 있다. 슬쩍 훑어 본 그의 얼굴로 미루어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 사태가 정말로 이단자들의 반란이라면, 수도자 복장을 하고 회의실에 들어와 있으며 내게 먼저 말을 건넨 저 자가 바로 내가 상대해야 할 놈일 것이다.
“왜 아직도 멍 때리고 있어? 안 그래도 굼뱅이 같더니 뭘 더 기다려?”
그의 무례한 명령조의 말투와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는 병사들, 나를 제외한 주변 모든 사람들은 이미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한 상황까지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들이 지금 내게는 무조건 불리한 상황일 수 있다. 근위대 병사들이 우글대는 이 곳에서 저렇게 소리치는 걸 보면 배짱이 대단하거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 아니면 둘 다일 것이다. 허리춤의 칼을 뽑아 무례한 일개 수도자를 벌하는 것은 간단하다. 놈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 불안함을 떨치는 건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독대하겠다며 여기까지 온 저자를 해치는 시늉만 했다 해도, 밖에 몰려든 군중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찰나의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절대로. 화내면 안돼. 삿대질도, 고성도 안돼. 확답도 주지 말고 무조건 들어. 그래. 일단 듣기만 하자.’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 보았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 십 쌍의 눈망울들. 아니, 그럴 것이라 짐작되는 눈망울들. 회의실 내부는 밖보다 더 어두워 주변이 또렷이 보이지 않지만, 얼핏 보이는 그들의 윤곽으로 내게 쏠려 있을 시선들을 느낄 수 있다. 여전히 끊어지지 않는 성벽 너머의 웅성거림과는 대조적으로 회의실 내부에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하나… 둘… 셋… 됐어.’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고 특별히 신경 써서 걸음을 옮긴다. 지금 나의 모습이 저 자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알 수 없다. 또한 그 자가 내 걸음걸이에, 혹은 내 옷차림에 신경을 쓸 지 어떨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턱을 쳐 들고 눈은 동그랗게, 무릎과 양팔은 가능한 크게 하며 걷는다고 딱히 상황이 나빠지진 않을 터.
한 걸음, 한 걸음. 가족들을 지나면 저 사내와 마주설 수 있다. 무슨 연유로 가족들이 이 자리에 있는진 알 수 없다. 만약 발린의 지시나 자의였다면 최소한 넋 나간 표정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을 리 없다. 저 자의 동조자들이 속였건 협박을 했건 어쨌든 협상에 써 먹으려는 의도일 터. 그런 어설픈 심리전에 흔들리면 안 된다. 괘씸한 내통자를 즉시 찾아내 본보기를 보이고 싶지만, 그거야 말로 나중에 처리해도 될 문제이다.
“여기 이상해 아빠. 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쉿, 실르. 조용히 하기로 약속했지? 아버지 방해하지 말고.”
내색하지 않고 얕은 미소를 띈 채, 시선만 잠깐 움직이되 고개는 돌리지 않고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딸아이들을 스쳐 지나간다. 연이어 왕비와 발간을 차례로 지나고, 누님 마저 시야의 뒤편으로 멀어진다. 대관식 이후 가장 신경 쓴 걸음걸이.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을 지나쳐, 온 힘을 발 끝에 쏟아 사내의 앞에 섰다. 고작 그 몇 걸음에 무릎이 잘게 떨려온다. 부디 저 자가 눈치채지 못 하길.
지휘소를 가로지르는 내내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의 키는 내 어깨 정도에 불과해, 불과 한 걸음 정도 앞에 선 그는 목이 부러질 듯 날 올려보고 있다. 코 앞에서 내려다 본 그의 얼굴은 눈가에 옅은 주름 몇 개가 전부로, 그 흔한 팔자주름조차 보이지 않는다. 서른 혹은 서른 초반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멀리서 본 그가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와 비슷해 보였던 것은, 듬성듬성한 그의 정수리와 지저분하게 깎은 수염 때문이었으리라. 이 정도 나이의 수도자라면 유력 가문 출신은 절대 아닐 터, 그렇게까지 작은 키는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국왕 할티르 타리안이다. 자네는 누구인가?”
“나는 이름 없는 수도자입니다.”
이름 없는 수도자라니, 농담이 나올 상황인가? 그의 황당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멋대로 코웃음을 친 뒤 내가 대답할 새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잇는다.
“이름이 왜 없겠습니까만은. 당신은 지난 몇 년이나 우리 남부인들의 깨달음을 방해하며 수 없이 많은 동료들을 고문했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동료들을 존중하기에 당신에게 알려 줄 이름 따위 없습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빌어먹을 이단자들. 죽여도 죽여도 산을 넘고 대초원을 가로질러 숨어들어오던 놈들. 마침내 놈들이 내 코 앞에 나타났다. 누런 괴물들보다 못 한 이단자들이 나와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어코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돼지?’
이단자들을 처단하기 시작하면서. 아니, 가장 최근 전령의 보고를 받고 난 후로 밤잠도 설쳐가며 여러 상황을 가정해 왔다. 붉은 성채에서 농성할 계획은 당연하고, 가족들과 위겐이나 동맹으로 망명하거나, 폐쇄 된 옛 이브마인 탄광지대에 들어가 당분간 숨어 지내는 계획. 심지어 곰섬이나 폭풍섬의 무뢰한들 사이에 숨어 지낼 계획도 세워봤다. 하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그들과 마주서는 것은 진지하게 생각치도, 아니 스쳐가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 했다.
“이대로 붙잡아 두고 넋두리를 늘어 놓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국에서 애태우며 우릴 지켜보고 있을 동료들을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좋겠지요.”
아직 내 머릿속 생각들은 정리조차 되지 않았는데 사내는 멋대로 목청을 높인다.
“재판을 열겠습니다! 여기 이 이단자와 그 가족들을 전부 묶어서 밖으로 끌어내세요! 이들의 처형을 단티아의 모든 이들 앞에서 진행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 흔한 복명복창조차도 없이 사방에서 병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낯선 수도자의 명령에 내 병사들이 대답한다, 나와 내 가족들을 붙잡으려 한다.
“뭐, 뭐냐 너희들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간의 목소리. 아니, 저들이 진짜 내 근위대 병사들이 맞긴 한가? 그냥 옷만 주워 입은 반란자들인가? 그러고 보니 부관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고 병사들의 얼굴도 어쩐지 낯설다. 나의 착각일까? 젠장, 일반병들의 얼굴 따위 알 턱이 없다.
‘처형이니 뭐니 또 무슨 소리야.’
무릎의 떨림이 더욱 더 심해지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외마디 욕조차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이 모든 게 최근 받은 극심한 중압감에서 오는 악몽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누워있을 거 잠이라도 잘걸.
“이봐! 갑자기 이! 무슨…”
몇 개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손들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시야를 가리고 내 몸을 붙잡았다. 몇 개인가의 밧줄이 내 가슴팍을, 팔뚝을, 다리를 휘감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 앞에 선 사내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서 있다.
‘발린이 배신했어?’
이단자들의 교리라는 게 그렇게도 강력했단 말인가? 가족을 팔아 넘기고, 충성 따위 개나 줘 버리게 만들 정도로? 다른 사람도 아닌 발린마저 내게 등 돌렸다면 모든 게 끝이다. 대체 언제부터 저들 편에 서 있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모든 계획도 행동도 발린과 함께 해왔으니, 단 한 순간도 승산이 없던 싸움이었을 터. 그런 걸 근위대장이라고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야이 새끼들아! 뭐 하는 짓이야! 그만두고 손 떼! 그거 저리 치우고 꺼지라고! 니들이 그러고도 근위대냐 개 같은 새끼들아!”
발간의 연이은 큰 소리에 이어 들려 오는 둔탁한 소음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본다. 아니, 보려고 했다. 양팔을 꽉 붙들고 있는 손과 밧줄 때문에 만족할 만큼 몸을 돌릴 수가 없다. 그래도 무슨 소린지 보기 위해 최대한 목과 눈을 비틀었다. 오른쪽 어깨 너머 어지러이 몰려선 그림자들 사이로 바닥에 엎어져 있는 발간이 아른거리며 눈에 들어온다.
“지랄하네, 병신 새끼..”
“왕자님 왕자님 받들어주니 우리 같은 놈들은 만만해 보이냐? 응? 또 소리 질러 봐 씹새야.”
“니깟 게 뭐라고 유세야. 처 맞으면 무슨 소리 내나 함 들어보자.”
그를 둘러싼 병사들의 연이은 발길질과 욕설이 방 안을 채운다. 부족한 횃불 탓인지 필요이상 몰려든 병사들 때문인지 그들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저마다 뱉어대는 욕설들로 미루어 그들의 길 잃은 분노가 느껴진다.
‘어떻게 말려야 하지? 아니, 그럴 시간 없어.’
쓸데 없는 생각이 잠시 떠 올랐으나 잠자코 있는 게 나을 것이다. 몇 대 얻어 터진다고 당장 숨이 끊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어설프게 저항해 봤자 불필요한 매만 벌 뿐이다. 역시 저 사내랑 말을 해 보는 수 밖에 없으려나.
애써 걷어 차이는 발간에게서 시선을 거둬 앞을 바라본다. 만면에 미소를 띈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여전히 날 올려보고 있다.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그의 눈가가 한 순간이지만 씰룩거렸다.
“잠시 좀 멈춰보게. 협상을 하는 자리라고 들었는데, 다짜고짜 이 무슨 짓인가?”
“협상?”
나의 말에 사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던 사내는, 다시금 이쪽을 빤히 올려다보며 미소 지어 보인다.
“아, 저 자가 그렇게 얘기했나 보군. 글쎄, 난 그런 얘기 한 적이 없어서.”
말을 마친 사내는 팔짱을 풀며 고개를 쭉 빼곤 몸을 왼쪽으로 크게 기울인다. 나의 뒤 쪽을 보기 위해서인 듯, 한껏 몸을 기울인 사내가 손을 저으며 입을 연다.
“거기 적당히들 해둬. 재판도 안 받은 죄인을 그렇게 때려 죽이면, 우리가 이 자랑 다른 게 뭐가 있어.”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 뒤의 소란은 금새 잦아 들기 시작한다. 분주했던 발걸음 소리와 갑옷의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지고 발간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지휘소 내부가 다시 조용해지자, 사내는 다시 곧은 자세로 팔짱을 낀다. 신전의 잡일이나 도맡아 했을 이 남자가 병사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다. 아니면, 병사들 스스로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인가?
‘또 쓸 데 없는 생각을…’
애초에 이들이 내 병사들이 아닐지도 모르고, 그가 진짜 수도자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저들을 멈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잠시 입을 삐죽거리던 사내가 입을 연다.
“내가. 아니, 우리가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요?”
‘누구긴. 헛된 교리를 믿은 이단자들이며 주인을 죄인이라 부르는 반역자들이지.’
실수라도 속마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악물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가 다시 활짝 웃는다.
“그렇다면 얘기가 더 빠르겠군요.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그간 왜곡되었던 신의 뜻을 바로잡고, 다가올 일곱 번째 심판을 피해가는 길. 그것뿐입니다. 심판을 피하기 위해 우리 모두 최초의 심판이 내리기 전, 태초로 돌아가 신에게 대답해야 되는 것입니다.”
“태초로 돌아가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신의 말씀에 따르면, 심판을 피하기 위해선 신을 믿고 불신자들을…”
“아아, 바로 그게 왜곡이라는 거지. 당신은 왕이라는 자가 여행자의 책도 안 읽어 봤습니까?”
“여행자의 책이라니, 그야…”
물론 읽어 보았다. 운이 좋아 최고신관자리까지 올라섰던 부잣집 도련님의 소싯적 상상체험기. 그딴 소설 나부랭이를 가져다 만든 저런 개소리를 굳이 다시 들어야 하는가? 저들이. 저 이단자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굽히지 않고 피와 함께 토해냈던 그들의 열변을 기억하고 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아, 아니. 아니오.”
하지만 지금은, 지금 당장은 그냥 모르는 척 듣는 것이 나을 터.
“뭐, 어쨌든. 신전은… 그러니까 신관과 왕들은, 신을 믿지 않는 인간들과 오크를 전부 처단해야만 신의 심판을 피해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게 바로 신의 말씀이고 신께서 원하신 바라고 얘기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군대가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고, 왕이니 기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죠.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대답을 강요하듯 내 얼굴을 노려본다. 그런다고 이단의 교리에 티끌만큼도 동조할 생각은 없다. 잠시 후 그의 눈가가 씰룩 거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지난 여섯 번의 천 년 동안, 심판 때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누구죠?”
그는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잠시 정면으로 내 눈을 바라보던 그는 금세 나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바로 신전에서 말해오던 그대로 신을 믿은 자들입니다. 신께서 그 전능하심으로, 진심으로 불신자들을 처단하고자 했다면 자신의 손으로 해내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 대신 다른 어느 종족보다 자신을 믿는, 믿어 온. 우리 신전에 속한 인간들과 드워프들에게만 가혹한 시련을 내리셨습니다. 신을 믿어 온 우리들에게만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새로운 놈을 잡을 때마다 놈들은 이 자와 같은 말을 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산 채로 잡아 오는 놈들 마다 왕관을 버리고 죄를 뉘우치라는 억지를 부렸다. 그렇게 수십 놈의 숨통을 끊었지만, 결국 발린을 설득하고 날 붙잡았으니 놈들은 지옥에서 축배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에 의문을 품고, 지난 대신관 회의 때 각지의 여러 수도자들이 모여 신의 말씀을 같이 풀이했습니다. 수 백 명의 젊은 신관과 수도자들이 모여 몇 달을 해석하고 토론했습니다. 바르게 다시 해석한 신의 말씀에 따르면. 그 동안 해 온 일들이야 말로, 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먼저 그 잘못 된 말씀을 만들고 전파해 온, 신관들과 귀족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옳소!”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신 신께 영광을!”
“맞습니다!”
사내가 잠시 말을 멈추자 방안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다 똑 같은 놈들이었어.’
끝을 모르게 반복해 들었던 개소리. 저들을 이해해보려고 몇 번이나 대신관들을 붙잡아두고 얘기 했지만 절대 이해 할 수 없었던 말들. 귀를 닫아서 저 말을 듣지 않고 싶다. 아니, 저 자의 입을 꿰매 그 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싶다. 하지만 반역자의 입을 꿰매야 할 근위대는 어디 가고, 도리어 주인을 묶고 있다. 하긴, 어차피 발린도 넘어간 마당에 무얼 기대한단 말인가.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아니면 환호성을 즐기는 것인지, 사내는 한참을 말을 하지 않았다. 잦아드는 함성과 함께 서서히 미소를 지워가던 그는 이윽고 방안이 조용해지자 다시 입을 연다.
“우리의 자손들이 앞으로 백 년이면 닥칠 심판의 날을 피해가기 위해선. 우선 모든 위선자들을 처단하고, 최초에 신께서 우리 인간들을 창조해내셨을 때처럼 모두가 같은 처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내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양손을 모으고 위를 바라본다. 아마도 기도를 하는 듯 무언가 중얼거리던 그는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인다.
‘미친놈들.’
눈도 감지 않고 무릎도 꿇지 않았다. 바르게 기도하는 법도 모르는 게 대체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이제 보니 이 놈들이야말로 자신의 믿음에 빈틈이 있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추악한 놈들이다. 진심으로 신을 믿고 그 믿음을 지키며 살면 구원 받는다. 죽어서 천 년을 기다리던 만년을 기다리던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스스로 믿음이 부족해 지옥벼랑 코 앞에선 자들의 발악일 뿐. 여섯 번의 심판을 살아남은 교회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져 온 믿음을 지들이 어찌 재단한단 말인가? 지옥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놈들은 천 년을 기다려도 내 피는 단 한 방울도 담지 못 할 것이다.
“이걸로 시간 낭비는 끝입니다. 죄인 할티르 단티아와 그 가족들. 이들은 스스로를 왕족이라 칭하며 같은 남부인들의 주인 행세를 한 죄로, 신의 이름으로 재판을 열겠습니다.”
어느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가 한 마디 던졌다. 그는 곧바로 오른팔을 높이 들어 크게 한 번 내젓는다.
“전부 끌고 가세요.”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팔을 붙잡고 있는 손들에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길게 들어선다.
“이봐! 이봐! 야 임마! 야 이 새끼야!”
갑작스레 귀청을 울리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개새꺄! 왕을 데려오면 가족들은 풀어준다며! 나랑 왕 목숨이면 충분하다며! 여기 봐! 여기! 안 보여? 야 이 새끼야!!!”
좁다면 좁은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리고, 나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하지만 여전히 양팔을 붙든 손들 때문에, 고개를 한껏 돌려도 악을 지르는 발린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니들이 말하는 그 잘못은 왕과 나에게만 있어. 왕이니 귀족이니 집어 치우고, 누굴 부릴 수 있는 건 우리 둘뿐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니까 나머지는 풀어!”
그의 말은 분명 수도자를 자칭하는 사내를 향한 것이리라. 다시 고개를 돌려 사내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고개를 쭉 빼고 내 뒤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있다.
“그래, 너! 너 이 새끼야! 약속도 안 지키는 놈이… 큭”
사내의 손이 올라가며 동시에 발린의 말도 한 순간 뱉어내듯 멎어 버린다.
“잘하셨습니다. 시끄러우니 죄인을 이리로.”
여전히 고개를 쭉 빼고 선 사내는 짧은 칭찬과 명령을 던지고, 자신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한다.
다시 발린을 보기 위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 양 팔을 붙든 손들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 어수선하게 갑옷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리곤, 마찬가지로 결박된 발린이 옆으로 끌려왔다. 여전히 어두워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평소의 그를 생각해 보면 근위대원조차도 주눅들 정도의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자, 다시 지껄여보시죠. 소리 지를 필욘 없습니다.”
사내의 말에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발린의 그 험상궂을 얼굴을 마주하고도 그는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다. 수십 년을 기사로 살아온 발린 못지 않게 지독한 놈이다. 아니, 진짜 미친 놈이니 발린과는 비교도 안 될 터.
“약속… 약속을 지켜.”
“약속이요? 무슨 약속?”
“이 씨발새끼가! 그딴… 윽”
발린을 붙잡고 있는 자들의 팔이 크게 허공을 가르고, 다시금 그의 말이 멎는다. 그가 무엇을 노렸던 것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날 배신한 그가 다시 저들에게 배신당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안 될 걸 직감하고 순순히 따르는 척 한 것인가?
발린을 향한 수 차례 손찌검을 지켜보던 사내는, 일순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이며 발린을 붙잡고 있는 자들을 제지한다.
“아! 생각 났습니다. 그거. 그거 말이죠, 흐하하하…”
사내는 여전히 억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게 말이죠. 약속이라기보단 쓸데 없는 희생을 줄이고, 빨리 하기 위한 그… 뭐라고 하더라? 당신들 말하는 거 있잖아요. 전술? 아, 아니. 작전이 맞나요? 뭐, 어쨌든. 처음부터 죄인들은 하나도 풀어 줄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
힘겹게 숨을 몰아 쉬며 발린이 다시 입을 연다.
“… 하아… 더러, 더러운 새끼. 카아…”
“근본부터 썩었어도 마지막 정도는 똑바로 말 하시죠. 더러운 건 당신들입니다. 이렇게까지 세상을 더럽히…”
“퉤.”
발린이 뱉어낸 검붉은 침이 사내의 콧잔등에 그대로 달라붙으며, 동시에 그의 미소가 사라진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꽉 감은 그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쉴 새 없이 지껄이던 그의 입도 더는 말이 없다.
“만약, 진짜로. 니 놈들이 믿는 그런 세상이 온다고 해도. 너 같은 새끼가 이끌어서야 그게 오래 갈 리가 없어. 그럴 수가 없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자, 여기! 이 목만 따라고! 니 동료라는 새끼들 잡아오라고 명령한 건 왕이고, 잡아다 목을 딴 건 나니까. 이 모가지만 가져가란 말이다! 아직 안 늦었어. 보는 눈 많을 때 빨리 약속대로…”
“아! 안돼! 안돼!!”
“지이… 어엌… 컥…”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그리고 발린의 말이 멎으며 곧이어 그의 숨이 끓어 오르는 소리가 들려 온다.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 보려는 것을 억지로 눈을 감고 참는다.
그의 비명과 함께 얼굴로 날아든 뜨거운 액체에선 따뜻하고 붉은 냄새가 난다.
“이제 조용해졌군요. 입 틀어 막고, 몽땅 끌어내세요. 그 더러운 몸뚱이도 잊지 말고.”